제167화
‘결국 나랑 노엘만 남았네.’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나서야 조심스레 오두막을 빠져나온 나는 능선 너머로 보이는 깃발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다미아 백작가의 영식은 일찌감치 포기한 것 같았고….’
스텔라는 명예를 너무 중시한 탓에 정정당당하게 돌진하겠다고 호승심을 부리다가 병사를 전부 잃고 말았다.
‘그러게 멋 부리지 말지.’
나는 무너진 병사들을 흔들어 깨우며 신경질을 부리는 아이를 발견하고 짧게 혀를 찼다.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는 각오는 듣기에는 퍽 멋졌지만, 실효성이 떨어졌으니까.
“후보 셋만 남았으니 예선전은 지금 이 시점에 종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시합을 마무리 짓는 시종장의 말에 어깨를 툭툭 털어 낸 나는 뒤를 돌아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아벨, 부상자는?”
“비겁하게 산속에 숨어 일대 다수의 상황에만 튀어나와 싸웠는데 다친 애가 있을 리가.”
지금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아벨의 얼굴에는 은근한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저도 안 다쳤습니다. 털끝 하나도 안 다쳤어요.”
“…다행이네.”
눈을 빛내며 내게 머리를 숙이는 아벨의 행동이 마치 강아지가 예뻐해 달라며 머리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인다.
“잘했어, 잘했어.”
나는 떨떠름히 아벨의 공을 치하하며 덥수룩한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탁-!
아니, 정확히는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애꿎은 허공만 매만졌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나는 아벨의 머리 대신 내 손에 쏙 들어온 히스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걱정 안 해도 돼, 히스.”
‘처음 데려왔을 때만 해도 나보다 훌쩍 컸는데, 이제 나랑 덩치가 비슷해졌네.’
사람을 병기로 만드는 금술 때문일까, 히스는 내가 그를 억제하는 모든 제어구를 산산조각 냈음에도 여전히 자라지 않고 있었다.
나는 눈높이에 딱 들어맞는, 오목하게 하늘을 닮은 청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숙소에 갈 수 있도록 데리러 와 준 거지? 고마워.”
내 말에 아까부터 아벨을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던 히스의 눈빛이 아주 조금 풀어진다.
‘어휴. 이래서야 어디 가서 함부로 다른 아이 예뻐하지도 못하겠다니까.’
애견 캠프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예뻐해 달라고 난리들이다.
나는 작지만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 딱딱한 히스의 손을 붙든 채 아벨과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예선전은 끝났으니까 모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
“네, 대장!”
나는 씩씩한 병사들의 대답에 방긋 웃어 준 다음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아벨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히스가 언제 흥분했었냐는 양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연다.
“본선 주제는 아는 겁니까?”
“아니. 예선은 모의 전쟁이었지만, 본선 주제가 무엇으로 선정될지는 미지수야.”
황녀군과 배동을 함께 선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으니 예비 황녀군 병사들을 또 활용해야 하는 주제가 나올 수도 있었고, 단순히 배동 후보들만 움직이는 주제가 나올 수도 있었다.
“적들을 미리 제거해 놓을까요.”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히스는 농담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애였다.
“…히스, 난 황녀 전하의 배동이 되고 싶지도 않아. 괜히 이상한 사고 치지 마.”
히스를 붙든 손에 힘을 꽉 주며 대답한 나는 그가 적들이 있다며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노엘이네.’
숙소로 가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가 향하는 곳은 황녀궁에 딸린 손님용 별궁이 아닌 황제가 머무는 본궁이었다.
“히스, 잠깐만.”
묘한 기시감에 황급히 노엘을 따라잡은 나는 하녀나 레이첼조차 대동하지 않고 홀로 이동하는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
갑작스레 붙잡힌 탓에 방향이 틀어진 노엘이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무슨 일이지. 아니, 무슨 일입니까.”
같은 배동 후보여도 내가 한참 어리니 나를 보면 자연스레 반말이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노엘에게 불쾌감을 드러내는 대신 의구심 가득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어디 가요?”
“황제 폐하께서 나를 찾으신다더군요.”
“…황제 폐하가요?”
나는 노엘의 대답에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자그마한 미간을 좁혔다.
내가 병사들을 데리고 산속에 숨어든 탓에 예선전이 길어져 이제 해가 뉘엿뉘엿 지다 못해 하늘이 거뭇거뭇한 시각이었다.
‘수상하네. 노엘을 왜 이 밤에 본궁으로 불러들이는데?’
“왜요?”
“배동 후보인 나를 살펴보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저도 같이 갈까요?”
나는 내 물음에 별다른 감흥 없이 새까만 눈만 깜박이는 그녀의 팔을 흔들며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혼자 가는 거 무섭잖아요.”
“딱히….”
“리니, 황제 폐하 오랜만에 뵙고 싶으니까 그냥 같이 가요!”
노엘이 내가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고, 그레고르는 얼굴만 생각해도 구역질이 나오지만 나는 별수 없이 본궁으로 향했다.
열여덟이라고 해도 그냥 우리 집 장남이랑 동갑인 건데, 이 어린애를 변태 황제 손아귀에 떨어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폐하, 리니 왔어요~!”
뿌우-
그레고르가 노엘을 책망할까 부러 어린아이처럼 발랄하게 알현실에 들어선 나는 눈을 부라리며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알현실인데 시종도, 시녀도 없어!’
이 어두컴컴한 밤에 사람을 불러 놓고 궁인들도 전부 내보낸 이유가 뭐가 있겠나 싶다.
“…공녀도 왔구나.”
“네, 폐하!”
나는 떨떠름한 그레고르의 목소리에 방긋 웃으면서도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 변태놈이…! 공식적으로 들인 비가 둘, 비공식적인 정부는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주제에!’
“예선전을 통과한 후보들을 부르시는 것 같기에 리니도 왔어요!”
내 눈빛 공격에 양심은 이미 예전에 개나 줘 버려서 찔리는 게 없는 건지, 그레고르는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짐은 노엘이란 아이가 딱히 예선전을 통과해서 부른 건 아니다.”
“네?! 그럼 왜 부르셨는데요?”
“소녀라고 부르기엔 과년해 보여, 과연 짐의 딸인 아이네스 황녀의 배동을 맡을 만한 나이인가 싶어서 확인하려고 불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나 대신 그레고르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노엘이었다.
“올해 열여덟입니다. 커트라인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차분한 노엘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 그레고르가 입맛이라도 다시듯 입술을 들썩인다.
“열여덟이면 배동보다는 유모에 어울릴 나이지.”
‘열여덟이 어떻게 유모에 어울릴 나이야? 전혀 아이네스 엄마 또래가 아니잖아!’
나는 그레고르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으려다 애써 억누른 채 노엘의 반응을 살폈다.
‘신분 상승인 줄 알고 덥석 받아들이면 어떡하지…?’
룰루와 랄라처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를 모셔 왔던 하녀도 아닌 노엘을 갑자기 아이네스의 유모로 삼는 건 상황에도 맞지 않는데다 황실 법도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 짓을 감행하면서까지 노엘을 왜 유모로 들이려고 하겠어.’
황궁 내에 상주하는 자신의 ‘비밀 정부’를 늘리고 싶은 거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정부들은 지켜보는 눈이 많을 테니까.
“어떻겠느냐. 황녀의 유모직을 맡아 보지 않겠느냐?”
어린 내가 제 속내를 읽지 못한다고 생각한 건지, 그레고르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노엘에게 다가와 인자한 미소를 꾸며냈다.
“손이 곱구나. 황녀를 보필하기에 적절한 손이다.”
‘손 예쁜 게 아이 돌보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눈빛도 더러웠다.
눈이 탁하다 못해 흐리멍텅해서 아주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레고르의 동태 눈깔에 치를 떨며 앞으로 나섰다.
“폐하, 그런데 리니가 알기로는 황녀 전하는 이미 유모가 계시잖아요.”
“황녀라면 너서리메이드(nursery maid)가 서넛은 있어야 하는 법이지.”
“리니가 황녀 전하의 친구라서 잘 아는데, 황녀 전하는 너서리메이드를 더 늘릴 필요 없어요!”
“왜지?”
“아이네스 황녀 전하는 똑똑하고 자립심이 강한 어린이시니까요! 리니처럼!”
양 주먹을 다부지게 쥔 채 목소리를 높이는 나를 힐끔한 그레고르가 방해꾼이라도 나타났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공녀는 밤이 늦었으니 이미 돌아가는 게 좋겠다.”
“네!”
나는 그레고르의 말에 씩씩하게 대답하며 활짝 웃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폐하!”
야무지게 인사까지 마친 나는 내 옆에 서서 황제의 꺼림칙한 시선을 감내하고 있는 노엘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우리 어서 돌아가요, 노엘!”
“자, 잠깐.”
그러자 당황한 그레고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리를 붙잡는다.
“공녀 혼자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네? 하지만 밤이 늦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어린이인 노엘이랑 저는 이제 잠에 들 시간이에요, 폐하!”
열여덟,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노엘도 어린이였다.
‘어딜 감히 미성년자를 넘봐!!’
사나운 사자처럼 눈을 홉뜬 나를 내려다보는 노엘의 시선이 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