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우는 레이첼을 한참이나 달래 주던 노엘은 아이가 겨우 눈물을 그치자마자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난 레이디 뮤리엘이 불러서 밖에 다녀와야 한다.”
“알겠어. 병사들은 내가 잘 감시하고 있을게.”
그제야 진정한 레이첼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아, 역시 노엘은 나에게만 다정해.’
보육원의 다른 동생들도 노엘을 보호자처럼 여기고 따르긴 했지만, 노엘이 이렇게 우는 어린아이를 달래 주고 받아 준다는 건 모를 것이다.
“조심해서 다녀와, 노엘.”
“그래.”
레이첼의 말에 힘없이 대답한 노엘은 조심스레 황성을 빠져나왔다.
배동으로 선발되면 노엘이 보육원에서 돌보던 동생들이 모여서 살 수 있는 집을 구해 주겠다는 교단의 말에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뮤리엘이나 아이네스나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네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마.”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때, 노엘은 뮤리엘이 자신을 이용하고자 함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고 느꼈다.
“저도 누군지 모르는 제 아버지를 뮤리엘 님이 어떻게 아시는 걸까요.”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노엘은 무심한 눈으로 잔뜩 상기된 뮤리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게다가 전 제 친부의 생사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레이디 뮤리엘.”
“잘 들어, 노엘. 네 진짜 아비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니까.”
그럼 그렇지.
노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쥘부채로 제 턱을 들어 올리는 뮤리엘을 노려봤다.
“중요한 건 누가 네 아버지가 될 사람이냐다. 네 비루먹은 인생, 바꿔 보고 싶지 않니? 인생역전이란 말 못 들어 봤어?”
“과유불급이란 말은 들어 봤습니다만.”
“아니. 사람은 야망대로 사는 법이다.”
노엘의 뺨을 쥘부채로 툭툭 두드린 뮤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너를 잃어버린 딸이라고 소개시켜 줄 남자는 마음이 약하고 성정이 다정한 사람이라 네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도 바로 내치진 못할 사람이야.”
뮤리엘은 가스파르의 섬세하고 단정한, 무심해 보이지만 따뜻한 눈빛을 떠올리며 생긋 웃었다.
‘그래, 가스파르는 그런 사람이지.’
몇 년 전부터 그가 부쩍 차가워졌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뮤리엘이 조우한 가스파르는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남자였다.
“네가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고 울며 안기면 쉬이 거절하지 못할 거다.”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을 속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뮤리엘의 말에 노엘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노엘이 자신의 말에 바로 복종하는 태세를 보이지 않자 살짝 기분이 상한 뮤리엘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보육원 동생들의 생사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네.”
“…….”
“아니면 하나 남은 레이첼까지 잃고 싶은 건가?”
뮤리엘의 말에 노엘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알레테이아 교단이 보육원의 아이들을 ‘키워 준다.’는 명목하에 전부 데려가 버렸다.
아이들이 교단병에게 끌려간 이후, 노엘은 동생들에게서 편지 한 장 받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 ‘아버지’라는 사람을 만나 볼게요.”
“잘 생각했다.”
뮤리엘은 싱긋 웃으며 단정하게 내려온 노엘의 앞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 * *
“안녕하세요.”
뮤리엘이 노엘을 들여 넣은 방은 하차니아 공작이 사용하는 집무실이었다.
고풍스러운 너도밤나무로 짜인 거대한 문에 인각된 늑대가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을 올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노엘을 향해 가스파르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다.
“이름이 뭐지.”
“노엘입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가스파르는 노엘이 제 이름을 말하자 조금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크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노엘은 자신의 이름이 죽은 공작 부인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녀를 따라서 지은 건 아닌데.’
오해를 살까 봐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구실이 없었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어버린 노엘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 ‘노엘’이라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저 남자를 보고 있노라니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지?’
노엘이 옆얼굴을 전부 가릴 만큼 길게 내려온 치렁치렁한 흑발을 매만지며 입술을 꾹 깨무는데 그런 소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던 가스파르가 느릿느릿 입술을 벌렸다.
“친부를 찾지 못해 힘들게 자랐다고 들었는데.”
“네. 보육원을 전전하며 자랐어요.”
“올해 몇 살인 거지?”
“열여덟… 로 추정됩니다.”
“내 장남과 또래인 모양이로구나.”
가스파르는 노엘의 설명에 고개를 까딱였지만, 노엘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는 못했다.
‘겉보기에 열여덟 살일 뿐이지, 나는 사실 내 나이를 모르는걸.’
레이첼과 처음 만났을 때, 세 살에 불과했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벌써 여덟 살이 되었다. 하지만 노엘의 모습은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전혀 변하지 않고 있었다.
복잡한 생각을 하느라 착잡하게 가라앉은 노엘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입술만 달싹이던 가스파르가 어렵게 입을 연다.
“네게는 실망스러운 말이겠지만, 레이디 뮤리엘의 주장은 그르다.”
“네?”
“네가 내 아이일 리 없다는 말이다.”
딱히 자신이 공작의 사생아라고 우기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노엘은 단호한 가스파르의 태도가 의아해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노엘이 알기론 정략 결혼한 귀족들에게 불륜은 취미와 마찬가지였다. 사생아는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물이었고.
‘그러니까 보육원 아이들 절반이 귀족의 사생아로 이루어진 거였겠지.’
사생아를 둔 귀족들의 후원금이 없었다면 나라의 지원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육원은 금세 망하고 말았으리라.
“어째서요?”
“어째서라니?”
노엘이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 말에 가스파르가 난감한 듯 뺨을 긁는다.
“어째서 제가 각하의 딸이 아니라고 확신하시나요.”
노엘은 가스파르가 당황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차분하게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러니까, 나는 내 부인이 아닌 사람과-”
“사람과?”
“그러니까… 으음.”
노엘은 말끝을 흐리는 가스파르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그에게 다가섰다.
“자 본 적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뭐?”
“다른 여자와 몸을 섞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어린 너와 나눌 만한 대화 주제는 아닌 것 같구나.”
가스파르는 노엘의 직설적인 화법이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단정한 미간이 좁아지며 옅은 주름을 만들어 냈는데, 노엘은 문득 그 주름이 제법 섹시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 생각보다는 나이가 있을 텐데요. 아마도.”
그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말을 중얼거리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가스파르의 시선이 조금씩 짙어지는 게 느껴진다.
“왜 그렇게 보세요?”
고개를 든 노엘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가스파르를 마주한 채 긴 속눈썹을 느릿느릿 팔랑였다.
“아니,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식뻘 되는 여자에게 그런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수작을 거시다뇨.”
“무슨-!”
노엘이 자신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하는 말에 가스파르가 발끈해 주먹을 쥐었지만, 그녀는 화를 내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가스파르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묘하게 흡족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상했다.
“정신 차리세요, 각하.”
“허!”
노엘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가스파르를 무시한 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예비 황녀군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과제에 배동 선발전에 참가하겠다고 나선 아이들 절반이 포기한 상황이었다.
결국 스텔라 솔로아-발렌의 미인대(美人隊), 노엘의 경국대(傾國隊), 그리고 레오노라의 미남대(美男隊)를 포함한 여덟 개의 예비 황녀군 분대와 후보만이 남아 예선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경국대는 기사 서임 직전의 병사들만 모였다면서요?”
“노엘이란 소녀가 운이 좋나 보네요.”
“이아론 후작가의 레이디 뮤리엘이 후원하는 아이라던데 그녀가 손을 쓴 게 아닐까요?”
참가자들 중 유일한 평민인 노엘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남들이 자신의 흉을 보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모의 전쟁이 이뤄질 야트막한 동산 위로 모습을 드러낸 노엘이 경국대의 푸른 휘장을 휘날린다.
밤의 장막처럼 새까만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선연하게 빛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외모 하나는 눈에 띌 정도로 빼어나긴 하군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예요.”
“하차니아 공녀님도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아직 어리니까요.”
“뭐, 공작 부인이 절세가인 소리를 듣던 미인인데다 공작 각하의 외모도 출중하시니 당연히 미인으로 크겠지요.”
노엘을 힐끔하던 귀족들의 대화는 저마다 자신들이 미는 후보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레오노라의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마담 티에리가 왜 꼭 공녀를 모델로 삼아 아동복을 발표하는지 알겠다니까요? 오늘은 또 얼마나 귀여운 옷을 입고 등장할지.”
누군가 사랑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레오노라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는다.
레오노라는 중요한 공식 석상에는 꼭 마담 티에리가 디자인한 옷을 입었는데, 레오노라만큼 마담 티에리의 화려한 파스텔톤의 드레스를 잘 소화하는 아이가 없었다.
뽀작뽀작.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레오노라가 아장아장 걸어 능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
카모플라주, 그러니까 녹색과 갈색 얼룩무늬가 뒤섞인 군복을 입고 얼굴은 새까맣게 칠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