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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191/486)

제203화

루카스의 복귀를 알게 된 가스파르는 가장 먼저 삼남인 에녹을 호출했다.

“에녹, 선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평소에는 레오노라의 애정을 두고 아웅다웅 격전을 벌이는 부자지간이었지만, 공동의 적이 나타났으니 힘을 합쳐야 한다고 판단한 덕이었다.

“네. 봤어요. 리니 곁에서 한시도 떨어질 생각을 못 하는 곰돌이.”

에녹은 침울한 가스파르를 흘깃하다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녹과 실비가 레오노라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소담한 가제보 아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막내가 눈에 들어온다.

물론 방긋 웃는 레오노라 옆에는 뚱한 얼굴의 곰인형도 함께였다.

“하지만 저런 상태로 돌아왔으니 딱히 걱정할 필요 없지 않아요? 위엄이 없잖아요.”

지금의 루카스에게서는 대마법사의 마력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리니가 루카스를 따른 건 마법 스승이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그들의 자랑스러운 막내는 강한 사람을 좋아했고, 지금의 에녹은 곰돌이보다는 강할 것이다.

“그러니까 리니가 저나 아버지보다 루카스 전하를 더 따를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에요.”

“그리 간단히 판단할 일이 아니다, 에녹.”

에녹은 비딱하게 선 채 심각하게 굳은 가스파르의 얼굴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루카스 전하가 사라지셨을 때 아버지도 엄청 걱정하셨잖아요?”

에녹은 차분하고 좀처럼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가스파르가 루카스가 사라졌을 때 평소답지 않게 흔들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교단에 잠입하겠다는 리니도 말리지 않으실 정도로 걱정하셨으면서.”

“에녹, 너는 지금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가스파르는 에녹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는 레오노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루카스에게 고마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루카스가 무사히-정말 무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노라 곁에 돌아올 수 있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니는 귀여운 걸 무척 좋아한다.”

“……!”

가스파르의 한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은 에녹은 굳은 얼굴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헨리.”

그의 부름에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가주의 보좌관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네, 에녹 도련님.”

“제랄드에게 부탁할 일이 생겼는데 지금 어디에 있지?”

제랄드는 하차니아가 벌이는 사업 중에 가장 큰 수익률을 자랑하는 아티팩트 공방의 책임자였다.

“제랄드라면 마침 본 저택에 와있습니다. 제작할 마도구라도 있으신 겁니까?”

헨리의 대답에 에녹은 잘됐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러를 이용해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응. 이런 모자 제작을 맡기고 싶으니까 가능한 빨리 만들어 달라고 전해 줘.”

“……토끼 귀가 달린 투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보통 토끼 귀여서는 안 되니까 꼭 제랄드가 직접 제작하라고 해.”

에녹의 고집에 바쁜 제랄드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된 헨리는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떤 토끼 귀여야 하길래 그러십니까?”

“엄청 귀여워야 돼. 제랄드는 리니랑 친하니까 리니 취향을 잘 알 거 아니야.”

“……아, 네.”

할 말을 잃은 헨리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가스파르가 말을 덧붙인다.

“내 것도 부탁한다, 헨리.”

“각하의 것도 토끼로…… 말씀이십니까?”

헨리의 떨떠름한 물음에 대답한 이는 가스파르가 아닌 에녹이었다.

“안 돼! 아버지는 다른 동물 하세요!”

에녹의 다급한 목소리에 헨리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한숨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를 위해서 제작하시려는 거라면 토끼는 이미 선점당하셨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애초에 제랄드는 실비 도련님이 불러서 본 저택에 올라온 겁니다.”

헨리의 설명에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에녹은 하얗게 질린 채 가스파르를 돌아보았다.

“형이 더 빨랐어요, 아버지! 어떡하죠?”

“그럼 나는 다람쥐.”

삼남의 당황한 얼굴을 무시한 가스파르가 앞으로 나선다.

“레오노라는 토끼 다음으로 다람쥐를 좋아하니까.”

“악! 아버지, 치사하게 진짜 이러실 거예요?!”

또다시 선수를 빼앗긴 에녹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가스파르는 무감한 얼굴로 제 아들을 흘깃할 뿐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말라고 하질 않았느냐.”

“아버지는 적에게도 정중하라고 가르치셨지, 그런 말 한 적 없잖아요! 그건 리니가 하는 말이라고요!!”

“그랬나.”

가스파르는 에녹의 억울한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제랄드를 찾아 복도를 나섰다.

* * *

오늘은 열두 살 생일이 지나고 처음 원로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두근거리던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누른 채 룰루를 따라 걸었다.

“원로 회의에 가문의 주인으로 참석하시는 건 오늘이 처음이시네요.”

내가 조금 긴장했다는 걸 눈치챈 룰루가 설핏 웃으며 입을 연다.

“응. 열두 살이 지나야만 직계라도 권한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원로들에게 요구할 건 있으세요?”

나는 룰루의 물음에 야무지게 주먹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차니아의 새로운 사업 확장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야.”

열두 살, 이제 데뷔탕트를 치러도 무방한 나이가 되면 공작가의 직계들은 하차니아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물론 아직 어리니까 당연히 제약도 있겠지만, 나름 계획을 갖춘 편이니까 원로들도 무턱대고 반대하지는 않겠지.’

여태까지는 루카스를 통해 가주의 권한으로 아티팩트 공방이며 자르파라 상단을 운영했는데, 내 이름으로 활동할 시기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나 어때, 룰루?”

나는 오늘을 위해 특별 제작한 남색 원피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룰루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우시지만, 가문의 주인으로서의 위엄도 보여요.”

움후후.

나는 룰루의 모범 답안에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먹으로 가렸다.

‘역시 티에리야.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서 의상을 제작해 준다니까.’

오늘 입은 의상은 귀족 여자아이의 드레스라기보다는 내가 공작가의 일원임을 일깨워 주는, 정복에 가까운 엄숙한 디자인이었다.

물론 티에리의 프릴 사랑은 못 말리는 수준이라 여전히 사랑스러움이 묻어나긴 했지만, 평소처럼 마냥 귀엽게 보이지는 않을 터.

‘직계 권한을 처음으로 발동하는 자리니까 원로들에게 얕보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

물론 아빠와 가까운 원로들은 내가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이며 자르파라 상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평범한 어린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 사실을 알아도 믿지 못하는 원로들도 있었으니까.

“오늘 회의는 아빠랑 오빠들도 전부 참석하는 거지?”

“네. 어떻게 보면 아가씨의 첫 사업 데뷔니까 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나는 믿음직스러운 가족들의 지지에 흐뭇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에녹도 적랑에서 정보부를 통솔했던 만큼 공식 석상에서는 카리스마를 보이는 편이고, 실비나 아빠는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공녀님이 드십니다!”

복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내게 허리를 숙였던 시종이 공손히 내 등장을 알리며 문을 열어 준다.

끼이익.

“안녕하세요, 원로님들.”

정중한 비즈니스 미소를 안면에 띄운 채 회의실에 들어선 나는 비즈니스고 뭐고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되어 흠칫 몸을 떨었다.

‘사람들이 얼굴에 뭘 뒤집어쓰고 있는 거야?’

“제가 장소를 착각했나 봐요. 전 원로 회의에 참석하려고 했거든요.”

회의실이 아니라 동물 페스티벌이 열리는 방(?)에 잘못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뇨, 공녀님! 여기가 원로 회의장이 맞습니다!”

나는 믿기지 않는 원로의 말에 기함하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럼 설마 상석에 앉아 있는 저 다람쥐 인간이…….”

“예. 각하이십니다!”

내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젊은 원로 한 명이 씩씩하게 대답한다.

“리니! 나도 참석했어!”

내가 아빠만 발견했다고 생각했는지, 뾰족한 여우 귀를 달고 있는 에녹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아……. 가주 아들로서의 위엄이…….’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내며 그들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는데, 아빠 뒤에 서 있던 분홍 토끼가 헛기침을 한다.

“큼. 흠흠.”

“…….”

“나도 있는데.”

“응, 알아.”

귀가 너무 길쭉해서 안 보고 싶어도 안 볼 수가 없었어, 실비.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내게 무슨 반응을 기대하는 듯한 아빠와 오빠들을 무시한 채 상석에 앉았다.

“자, 우리끼리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이 바보들은 내버려 두고.

내 뒷말을 용케 알아들은 원로들이 조금 밝아진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공녀님!”

“역시 저희는 공녀님만 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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