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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192/486)

제204화

“먼저 시종을 통해 전달드린 회의 안건은 다들 읽어 보셨겠죠?”

동물들 사이에 대충 엉덩이를 비집고 앉은 나는 원탁을 톡톡 두드리며 말문을 열었다.

‘침착해야 해.’

말로는 나만 믿고 있었다고 떠들어 댔지만, 원로들 중에서는 여자인데다 막내인 내가 가주 대리처럼 설치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네. 공녀님의 사업 참여에 관한 안건이었죠. 물론 워낙 똘똘하신 공녀님이니 저희 원로들도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만…… 준비하시는 사업안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를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어린아이라고 깔보는 듯한 원로를 향해 우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목소리부터 회의적이면서 무슨 걱정을 안 한다고.’

열두 살 어린아이가 준비하면 뭘 얼마나 준비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네, 지금부터 설명할 거예요. 에녹, 내가 부탁했던-”

남몰래 콧방귀를 흥 뀐 나는 별이 쏟아질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녹을 돌아보았다.

“자료 좀 원로들에게 전달해 줘.”

“응, 알았어!”

내 말에 붉은 여우귀를 자랑하듯 쫑긋 세운 에녹이 벌떡 일어나 서류를 나눠주기 시작한다.

원로들에게 다가서는 그의 엉덩이 부근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붉은 꼬리가 살랑이고 있었다.

‘혹시 멍청이처럼 동물 의상을 뒤집어쓰고 나온 건 내가 오늘 회의에서 주목받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벌인 짓일까?’

에녹과 실비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회의장에 나타난 덕에 내 똘똘함이 유독 돋보이는 것 같긴 했다.

“왜 그렇게 봐?”

“어?”

“역시 내가 제일 귀엽지? 리니는 여우를 제일 좋아한 거야!”

잠시 에녹의 의도를 의심했던 내가 바보였다.

나는 내 시선에 설렌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웃는 에녹을 향해 떨떠름히 얼굴을 굳혔다.

‘아니, 그냥 바보인 거야.’

“헨리가 고생이 많았겠네.”

에녹과 실비, 가스파르에게 의상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을 헨리의 어깨를 툭툭 토닥여 주자, 그가 감동받은 얼굴로 눈시울을 붉힌다.

“역시 제 고충을 알아주시는 건 아가씨뿐이세요!”

“제랄드에게도 상여금 지급해 줘. 쓸데없는 물건 만드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인데, 무척 고통스러웠을 거야.”

“네, 아가씨!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공손히 읍하는 헨리를 소리없이 치하한 후 내게 질문을 던졌던 원로에게 다가섰다.

“제가 열두 살을 맞아 하차니아의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권리가 생겼다는 건 다들 아시는 바일 테고, 무슨 사업인지 궁금하신 거잖아요.”

담담하게 말문을 연 나를 바라보던 나이 지긋한 원로가 타이르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떤 사업인지도 궁금하긴 하지만, 말리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열두 살이라는 나이는 형식적인 규율일 뿐이고, 대개 성인이 되고 나서야 사업에 손을 대곤 하니까요.”

“네, 공녀님. 벌써부터 머리 아프게 가문의 일을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원로들이 공녀님 편하라고 존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복잡한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는 게…….”

그리고 그런 그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나를 둘러싼 원로들이 하나둘 말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원로회에 맡겼다가 가문을 말아먹을 뻔했잖아요? 다들 기억이 안 나시는 건지, 안 나는 척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자르파라와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공작가의 자금줄은 원로회의 잘못된 선택으로 바짝 말라 버렸을 터였다.

가주인 가스파르는 사업에 재능은커녕 관심 자체가 없는데다 재물을 모을 생각 따위도 하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원로회는 하차니아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급급했으니까.

“예? 각하께서 원로회에게 사업을 맡겼던 적이 있습니까? 게다가 말아먹을 뻔했다고요?”

그 시절을 모르는 듯한 젊은 가신 한 명이 두눈을 동그랗게 뜨며 원로들을 돌아본다.

“크흠, 흠! 거 공녀님이 참 똘똘하긴 똘똘하십니다. 어렸을 때 일도 무척 잘 기억하시는군요.”

“그, 그래서 하고 싶으신 사업이 무엇이라고요?”

“네! 네! 모두 들어나 봅시다. 고리타분한 옛이야기는 그만들 하시고!”

하차니아 말아먹기 일등 공신이었던 원로들이 민망한 뺨을 긁적이며 주제를 돌렸고,

“금융업이요.”

이를 기회삼아 냉큼 룰루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준비한 사업 계획서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지금 돈놀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공녀님, 아직 연치가 어려 잘 모르시겠지만 금융업은 하찮은 상인들이나 벌이는 사업입니다.”

“모름지기 귀족은 돈이 아닌 명예를 좇아야지요!”

그러나 보수파를 자처하는 원로 서넛 명이 사업안을 본체만체 인상부터 찡그린다.

“그래요? 그럼 다들 의자에서 일어나세요.”

나는 그들의 반발에 자리에서 일어나 원탁을 빙 둘러싼 삐까번쩍한 대리석 의자를 가리켰다.

“지금 원로님들이 앉고 계시는 의자, 전부 자르파라 상단의 상인들이 발품 팔아 번 돈으로 산 거예요.”

귀족은 돈을 좇으면 안 된다니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권력을 이용해 배를 불리는 데 앞장서는 게 누군데?’

물론 노블리스오블리주를 실천하며 검소하게 사는 귀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내게 귀족의 명예 운운하는 저들은 아니었다.

“돈이 싫으시다니 명예롭게 땅바닥에나 앉으세요.”

나는 내 말에도 뚱한 얼굴로 도통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원로들을 노려보며 화려한 회의실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재작년에 공작성이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는 건 알고 계시죠?”

가스파르가 노블리스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몇 안 되는 귀족이었던 탓에 공작성은 아름다운 고성이긴 했어도 하차니아의 재력을 과시할 만큼 화려하진 않았었다.

‘자르파라 상단이 축적한 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공사하지 않았다면, 북부가 부유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

내 예상대로 언덕 위에서 영지를 굽어보는 호화로운 성의 모습에 사람들은 제국내에서 하차니아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랜드마크 효과로 관광객을 끌어들여 그 이득을 톡톡히 누렸으면서, 이제 와서 무시한다고?’

“북부에서 가장 호화로운 성으로 탈바꿈했다고 수도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는데 누가 모르겠습니까?”

“기둥에 인각된 섬세한 조각하며, 하차니아의 품위가 느껴지는 성으로 재탄생하였지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효과도 엄청났고요!”

나는 내 말에 호응하듯 대답하는 젊은 원로 몇을 눈여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있는 기술자며 장인이며, 전부 상단에서 벌어들인 자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에요. 천박한 돈이 없었다면 하차니아의 위세를 보여줄 공작성도 없었을 거라고요.”

“……공녀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귀족이 본격적인 금융 사업을 벌이는 건 현 제국법상 불법입니다.”

나는 내 말에 반쯤 넘어왔는지 미적미적 입을 여는 원로를 똑바로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제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은행을 만들자는 건 아니에요. 제국 은행은 황실이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공녀님이 하고자 하시는 사업이란 게 정확히 뭡니까?”

“전대륙 권력자들이 비자금을 예치할 수 있을 만큼 신용도 높은 비밀 금고.”

원로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한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확히 말하면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이지만, 아직 제국에는 없는 시스템이니까.’

“비, 비자금이요? 그런 걸 받아서 뭐에다 쓰시려는 겁니까?”

“게다가 타국인이라면 제 모국에서 직접 재산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 굳이 제국까지 와서 돈을 맡길 이유가 없을 텐데요?”

나는 역시나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원로들을 설득하기 위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런 게 왜 필요한지 설명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테지만-”

“권력자들의 비밀스러운 자금을 끌어모아 관리해 주는 명목으로 그들이 하차니아를 보호하게 만들 심산이시군요.”

그러나 누군가 건방지게 내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온대륙이 전쟁터가 되어도 하차니아만은 온전히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싶으신 거겠죠.”

‘이 세계는 세계 대전을 겪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지?’

나는 내 목표를 정확히 꿰뚫은 젊은 가신의 말에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국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차니아는 절대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요.”

내 속을 읽기라도 하는 걸까.

낯선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눈을 가늘인 나는 그의 명쾌한 해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맞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동안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원로들조차 호오, 흥미로운 신음을 흘리며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하, 아무리 공녀님이라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망상에 빠지신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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