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헨리 마사드, 하차니아 공작가를 가문 대대로 섬겨 온 가신이자 가주의 부관인 그는 잠시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가스파르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께서 그렇게 초조해하신다고 아가씨가 빨리 돌아오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산만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일을 하라는 뜻이었는데, 가스파르는 헨리의 말을 거꾸로 이해했는지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차니아의 사병을 움직여야겠다.”
“예?”
“서부에는 솔로아 공작이 설치해 준 직통 포탈도 있는데 시간이 지체되고 있질 않느냐. 리니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헨리는 가스파르의 말에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레오노라가 저택을 떠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아무리 딸바보라지만 이 정도면 분리 불안이질 않나.
게다가 도노반에서 출발하겠다는 레오노라의 서신이 저택에 도착한 게 오늘 오전이었으니,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망상에 가까웠다.
“병사들은 전부 실비 도련님을 따라 하계 훈련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도로 불러오면 되질 않는가.”
헨리의 만류에 잘생긴 미간을 좁힌 가스파르는 고개를 저으며 벽에 걸린 장도를 꺼내 들었다.
“아니, 사병을 부리는 건 눈에 띌 수도 있으니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낫겠군.”
“아가씨가 엄청 싫어하실 텐데요. 조심해서 다녀올 테니 부디 가만히 계셔달라고 명령, 아니, 부탁을 하고 가시질 않으셨습니까.”
막무가내로 집무실을 나서려던 가스파르는 레오노라가 싫어할 거라는 헨리의 말에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일전에 공녀님이 교단을 방문하셨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각하.”
헨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레오노라가 교단에 붙잡힌 것이 분명하다며 전군을 이끌고 교단의 대신전에 쳐들어가려고 했던 가스파르의 과거를 끄집어냈다.
‘내전을 벌이려는 것도 아니고, 아가씨가 교단병과 하차니아군이 맞닥뜨리기 전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지.’
“헨리,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질 않았나.”
그러나 가스파르는 딱히 반성하는 기미도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긴 왜 없습니까? 안 쳐들어가면 그만인 것을.”
“레오노라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병이라면 훈련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제 주장에 헨리가 헛웃음을 짓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가스파르는 레오노라의 생일을 맞아 집무실을 알록달록하게 장식하고 있는 풍선 하나를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열두 살 생일 파티도 제대로 못 즐기고 떠나질 않았나. 가족끼리 즐기는 작은 데뷔탕트와도 다름 없는 것을.”
뿌우우.
가스파르의 손짓에 공기가 빠져나간 풍선이 힘없는 소리를 내며 집무실 바닥에 처박힌다.
축 처진 풍선이 마치 가스파르처럼 처량하게보여서 헨리는 짧게 혀를 찼다.
“제가 서부에 다시 한번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너무 걱정 말고 계세요, 각하.”
뿌우.
뿌우우.
대답 대신 들려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에 헨리는 한숨을 삼키며 집무실을 나섰다.
“어휴. 공녀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못 하시니, 원.”
평소 워낙 유능한 가주인 덕에 저택 일이라면 그냥저냥 해치우긴 했지만, 레오노라가 자리만 비우면 가스파르는 지켜보는 사람마저 기운이 빠질 정도로 처량맞은 분위기를 풍겼다.
‘공자님들도 같은 증세를 앓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각하께서 제일 심하시지.’
지금도 저런데 나중에 시집이라도 가면 어쩌시려고.
‘아니지, 우리 아가씨는 시집 같은 거 안 가셔.’
데릴사위를 들이면 들였지, 아가씨가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되는 건 가신으로서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헨리!”
가스파르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저택을 비추는 햇살마저 줄어든 기분을 느끼던 헨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헨리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반갑게 그에게 손을 흔들던 레오노라가 떨떠름히 입을 연다.
“내가 무슨 전쟁터로 떠난 것도 아니었는데 반응이 왜 그래?”
“연락이 도통 없질 않으셨습니까, 연락이!”
레오노라는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헨리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노반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었다고 편지 보냈었잖아. 못 받았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사이에 각하께서 보내신 편지의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난 아빠가 새로 일기 쓰는 취미라도 생긴 줄 알았지.”
헨리의 타박에 시큰둥하게 대꾸한 레오노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아빠, 저 다녀왔어요…?”
* * *
‘이게 다 뭐람.’
눈앞에 펼쳐진 진풍경에 떡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풀나풀 꽃잎 한 장이 날아든다.
퉷, 퉤퉷.
“리니!”
열심히 꽃잎을 뱉어 내고 있는 내게 달려온 가스파르가 두팔을 벌려 나를 번쩍 안아든다.
“아빠, 제 생일이라면 벌써 일주일은 지났는데요.”
나는 그에게 안긴 상태로 파티장인지 집무실인지 헷갈리는 상태의 방을 천천히 훑었다.
벽 한 면을 전부 채운 책장에는 내 이름과 초상화가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흩날리고 있었고, 거대한 책상 뒤에 자리잡은 통창에는 색 조합이 아름다운 파스텔톤 생화들이 덩굴처럼 잔뜩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축하해 주지도 못하고 넘어갔지 않느냐.”
정확히 말하면, 가스파르가 준비한 생일 연회에 내가 참석하지 못했을 뿐이다.
생일보다 루카스를 되찾는 일이 백 배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가스파르의 생각은 조금 달랐는지,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지금이라도 축하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속삭였다.
“제가 언제 돌아올 줄 알고 생일상을 이렇게 잔뜩 차려 놓으셨어요.”
소파 앞에 준비된 디저트들은 필시 나를 위한 음식이리라.
나는 갓 구워 냈는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쿠키의 고소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가스파르의 목을 껴안았다.
‘나도 참, 고마운데 고맙다는 말이 잘 안 나오네.’
“오래된 음식은 아니란다. 이건 오늘 내가 갓 구워 낸 케이크니 한 조각이라도 먹거라.”
“아빠가 직접요?”
“그래.”
공작가 일처리에 사병까지 길러 내고 있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텐데.
나는 가스파르의 정성이 가득 담긴-사실 모양은 형편없었다.- 버터 케이크를 흘깃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빠, 리니 정말 감동-”
“흥.”
그러나 가방에서 쏙 튀어나온 인영이 내 말을 끊으며 신랄하게 입을 연다.
“열두 살 생일에 겨우 이런 케이크라니, 여전히 그 간만큼이나 스케일이 작군, 공작.”
“……?”
난데없는 곰인형의 비난에 가스파르는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리니, 내가 지금 헛것이 들리는 모양이다. 어디서 선황자 전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환청 아니에요, 아빠.”
우우웅.
내 말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일제히 양팔을 들어올린 루카스의 위로 거대한 블랙홀이 형성되었다.
쿵!
새까만 구멍에서 그 구멍을 전부 메울 것처럼 환한 빛을 뿜어대는 돌덩이를 꺼낸 곰인형이 옆구리에 손을 올린 채 위풍당당하게 턱을 치켜든다.
“열두 살 생일 축하한다, 레오노라.”
나는 내 앞에 떨어진 광물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토끼눈을 떴다.
“이게 뭔데?”
“오리하르콘.”
“……오리하르콘?”
‘파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초금속 아닌가?’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광물 아니었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러겠지. 하지만 나는 대마법사다.”
나는 어쩐지 으스대는 루카스와 약간 풀이 죽은 가스파르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고마워, 루카스.”
“현자의 돌처럼 딱히 기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검으로 만들면 쓸만하겠지.”
루카스의 설명에 화색을 지은 내가 오리하르콘을 안아 드는 순간이었다.
“선황자 전하?”
그제야 곰인형의 정체를 눈치챈 가스파르가 루카스를 번쩍 들었다.
“이것이 선황자 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이것이라니, 불쾌하군.”
곰인형은 자신을 붙잡은 가스파르의 손등을 신경질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탁! 탁!
“하나뿐인 딸아이 생일에 고작 케이크 따위를 내놓는 공작 주제에 말이다.”
“루카스, 못되게 말하지 마!”
나는 행여라도 가스파르가 상처받을까 루카스를 말리며 가스파르의 팔을 붙잡았다.
“아빠, 전 정말 케이크로 충분해요.”
그러나 가스파르는 내 말이 더 충격적이라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어째서 내가 준비한 게 케이크뿐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냐, 리니.”
곰인형-루카스-를 안아든 채 창가에 다가선 가스파르가 작은 상자를 내게 안겨 준다.
“열어 보거라.”
촘촘하게 루비가 세공된 상자 안에는 마찬가지로 루비가 중앙에 박힌 열쇠가 들어 있었다.
‘무슨 그림이 인각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열쇠인데요?”
“제독이었던 노엘의 것보다 큰 함선이다. 수용 인원은 천 명 정도니 네가 원하는 선원으로 채워도 좋다.”
“……네?”
“영지 근처 항구에 정박해 놓았으니 언제든 살펴보러가.”
아니, 누가 열두 살 생일 선물로 함선을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