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82화 (82/88)

82.

“라일라!”

라일라만큼이나 창백하게 변한 비오스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 쪽으로 허겁지겁 다가갔다.

“심장은 뛰고 있습니다! 어서 신력을!”

황실 의원은 그렇게 소리침과 동시에 허겁지겁하던 일을 이어 갔다. 그의 말을 들은 신관은 있는 힘껏 제 신력을 라일라에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입술로 제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원이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도, 신관이 짧은 시간에 자신의 신력을 모두 쏟아붓고 마침내 탈진에 이르고 나서도, 라일라의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 돼. 라일라!”

잠시 입술을 떼어 냈을 때, 비통한 목소리가 비오스트에게서 터져 나왔다.

“날 두고 가지 마. 제발…… 제발…….”

애절하고 안타까운 음성이 비오스트의 입술에서 흘러나와 라일라의 입술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너를 살릴 기회를, 제발 내게 줘.”

다시 한번, 비오스트는 라일라에게 숨을 불어 넣었다. 가능하기만 한다면 제 생명과 숨을 전부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다시 한번 라일라가 숨을 쉴 수 있다면, 어여쁜 파란 눈을 다시 뜰 수 있다면 비오스트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라일라에게 기꺼이 줄 수 있었다.

라일라는 그의 단 하나의 사랑이었고, 단 하나의 생명이었으며, 단 하나의 행복이었으니까.

그녀가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라일라!”

다시 한번, 제발 단 한 번만!

간절한 애원을 담아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후두둑 떨어진 비오스트의 눈물이 라일라의 뺨으로, 목덜미로, 눈꺼풀로 떨어져 내렸다.

“하아……”

그 순간, 가느다란 얕은 숨이 라일라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라일라!”

놀란 비오스트가 눈을 홉뜨며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라일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살짝 열렸다.

몽롱한 파란 눈이 허공을 맴돌다가 마침내 머물 곳을 찾아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애틋한 황금의 눈동자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고, 작은 미소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눈 맞춤으로 서로의 감정을 읽어 내고, 나누기에 충분했다.

“플로랜스는?”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살짝 몸을 틀어 세실이 플로랜스를 데려올 공간을 만들었다.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건강한 황자님이세요.”

세실이 흰 천에 감싸인 플로랜스를 보여 주자 라일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글썽였다.

그렇게 낳고 싶었던 아이를 무사히 낳아 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아가야.”

라일라가 작게 속삭이자, 플로랜스가 응답이라도 하듯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세실은 웃으며 아기를 라일라의 옆에 뉘었다.

“플로랜스.”

라일라는 자신이 플로랜스를 바라보며, 그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살아서 자신의 품에 플로랜스를 안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럴 수 있기를 원했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이루어져 있었다.

“플로랜스.”

감격에 겨운 라일라가 다시 한번 플로랜스의 이름을 부르자, 아이의 입술이 다시 꼬물거렸다. 마치 웃는 것처럼.

“봤어?”

라일라는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 감정을 나누고 싶어서 고개를 들어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웃었어.”

라일라의 말에 동의하듯, 비오스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그녀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 * *

“아프지는 않아?”

벌써 세 번째 물음이었다. 그것도 오늘 아침에만 말이다.

어제 비오스트가 그 질문을 몇 번 했는지를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으로는 모자랄 것이라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라일라는 그 질문이 아직 지겹지 않았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좋았다. 걱정하며 상처의 근처를 어루만지는 손도 좋았다. 비오스트가 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라일라는 썩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괜찮다고 말하고 웃어 주면,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는 저 미소가 좋았다.

“정말 아프지 않아?”

비오스트의 손이 슬쩍 라일라의 옷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꿰맨 자국이 남아 있는 배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비오스트는 그것이 속상했다. 자신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고, 그때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라일라의 몸에 상처가 남았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괜찮아. 정말로 아프지 않아. 오히려 이렇게 며칠 만에 다 나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인걸?”

라일라의 말대로 그녀의 상처는 며칠 전에 칼을 댄 곳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미 다 나아 있었다. 당연히 신력으로 회복을 한 덕분이었다.

“목숨을 구했잖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지만…….”

“쉿. 됐어. 그만해.”

비오스트는 무슨 말을 더하고 싶은 듯했지만, 라일라를 당해 내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는 라일라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이 흉터가 라일라의 몸에 새겨져 있는 동안은 말이다.

“그래. 알았어.”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비오스트의 손은 라일라의 배에서 쉽게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끈하게 아문 상처를 더듬던 비오스트의 애틋한 손이 이제 다른 목적을 지닌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라일라의 옆구리를 감싸고, 그의 손가락이 분명한 뜻을 담아서 라일라의 배를 건드렸다. 비오스트의 엄지가 배꼽에 닿자 움푹한 그곳으로 그는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라일라의 배를 문지르고 있던 다른 손가락들과 함께 마사지하듯 라일라의 흰 피부를 짓눌렀다.

“라일……”

“어머, 플로랜스가 일어났나 봐.”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달콤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아기 침대에 누워 있던 플로랜스가 우앵~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라일라는 그것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오스트의 입술에 닿은 것은 라일라의 촉촉한 입술이 아니라 그저 텅 빈 허공이었다.

“잘 잤니, 플로랜스?”

라일라는 침대에 뉘어져 있던 플로랜스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언제 울었냐는 듯이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잘 잔 것 맞아? 잠든 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원래 아기들은 그렇대.”

신생아는 자주 깼고, 자주 먹었고, 자주 배변 활동을 했다. 하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라일라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비오스트는 그렇지 못했다. 세실이 있고, 다른 젖먹이 유모나 플로랜스를 돌볼 궁녀들도 있었지만, 라일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플로랜스를 직접 돌보기를 원했다.

제 젖을 먹이고, 울면 안아 주고, 기저귀를 손수 갈아 주고 싶어 했다. 그게 세실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서툴지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이름을 불러 주고, 많이 안아 주고, 또 사랑을 주고 싶어 했다. 마치 자신은 받지 못했던 것을 플로랜스에게는 아낌없이 주고 싶은 것처럼.

비오스트는 그런 라일라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만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일라는 잠을 더 충분히 자야 했고, 아기에게 젖을 나누어 줘도 괜찮을 만큼 많이 먹지도 못했으며, 계속 저렇게 아기를 안고 있어도 괜찮을 만큼 튼튼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좀 더 쉬어야 했다. 아기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돌봐야 한다는 것이 비오스트의 생각이었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하지만 비오스트가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플로랜스를 안고 저렇게 웃는 라일라가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어떻게 그걸 막을 수가 있을까?

비오스트는 그러지 못했다.

“널 닮아서 그런 거겠지.”

소파의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삐딱한 표정으로 모자를 바라보며 비오스트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했다.

“뭐? 내 생각엔 플로랜스는 널 닮은 것 같은데?”

아기를 안고 다시 아까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라일라는 말했다.

“머리도 흑발이잖아.”

라일라는 보란 듯이 플로랜스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플로랜스는 비오스트와 똑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파란 눈은 널 닮았어.”

비오스트의 말이 옳았다. 플로랜스의 사랑스러운 파란 눈은 라일라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코나 입술은 널 닮은 것 같은데?”

라일라는 지지 않으려는 듯이 비오스트의 말에 반박했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플로랜스는 건방지게도 이미 오뚝한 코나 선이 뚜렷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분명히 비오스트를 닮아 있었다.

“그럴지도.”

빤히 플로랜스를 바라보고 있던 비오스트는 끝내 라일라의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라일라를 닮기를 바랐던 아이는 유감스럽게도 자신을 더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러했다.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

라일라는 환하게 웃으며 플로랜스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비오스트를 닮은 아기를, 자신이 안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비오스트가 함께 있었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꿈처럼 행복한 시간이었다.

“라일라.”

“응.”

“라일라?”

“말해.”

라일라는 플로랜스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아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처 몰랐다. 비오스트가 자기 못지않게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고, 그의 시선 끝에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왜?”

비오스트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자 그제야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비오스트의 입술이 라일라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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