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81화 (81/88)

81.

“읏!”

고통은 항상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픔에 라일라는 구경하고 있던 작고 귀여운 아기 신발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라일라?”

그녀의 옆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던 비오스트는 앓는 소리에 당장 검을 내려놓고 라일라의 쪽으로 달려갔다.

“라일라!”

한걸음에 달려온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작은 손을 붙들었다.

“아픈 거야? 배? 배가 아파?”

그의 질문에 라일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고통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라일라의 표정을 확인한 비오스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세실! 세실!”

비오스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들을 불러와.”

그들이 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세실은 알아들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라일라와 그녀의 손을 쥔 비오스트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비오스트가 계획했던 일의 때가 바로 지금임을.

“괜찮아. 라일라. 곧 괜찮아질 거야.”

비오스트는 잡은 라일라의 손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더는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생각했던 시간보다는 조금 일렀지만 지금 시작해야 했다.

“내가 널 구할 거야.”

잔뜩 찌푸린 라일라의 미간에 입을 맞추며 비오스트는 작게 속삭였다.

그것은 라일라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기도 했고,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기도 했다.

라일라의 이마에 맞닿은 채, 중얼거리고 있는 비오스트의 입술은 실은 바싹 말라 있었다. 라일라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손 역시 살짝 떨리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

* * *

“할 수 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마법사는 중얼거렸다.

“나는 할 수 있다.”

주먹까지 꼭 쥐며 그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똑똑히 보였다.

침대에 누운 라일라였다.

“후우~”

오늘따라 유난히 볼록해 보이는 라일라의 배를 바라보며, 그는 심호흡했다.

“으읏!”

라일라의 고통 어린 신음에 마법사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라일라의 몸속에 있는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이미 몇 번 했던 일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라일라 안의 마나의 흐름을 약간 뒤틀리게 만들어서 신체 흐름을 느리게 만들었다.

“아앗!”

하지만 이전과 조금 달랐던 점이라면, 지금은 라일라가 평소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통제를 분명 먹었다고 했는데, 그녀의 고통은 이미 그것을 초월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대로 라일라의 몸속 마나가 재배치되지 않자 마법사는 당황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 황제의 얼굴을 쳐다볼 만큼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황제 폐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마법사는 이곳이 바로 제 무덤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안 돼! 이대로 내 인생을 끝장낼 수는 없어! 마탑 골방에서 인생을 다 보내고 죽을 수는 없다고!’

마법사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리고 눈앞에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평온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전에 자신이 이 여자의 신체를 조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슬립!”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굴린 결과일까? 그에게 하나의 묘책이 생각났다.

그리고 즉시 머리에 떠오른 주문을 라일라에게 걸자 조금 저항하는 듯하던 라일라의 미간 주름이 조금씩 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의 임시적인 방편이었다. 아픔을 느끼면 사람은 잠에서 깨기 마련이니 자신의 주문을 깰 정도의 아픔을 라일라가 느껴 버리면 그녀는 잠에서 깨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는 라일라 안의 마나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됐습니다.”

마법사는 작게 환호하며 뒤를 돌았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실 의원은 그사이 라일라의 상태를 체크했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비오스트는 가지고 있던 검을 들었다.

단검이 나을까도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는 자주 다루어서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평소에 쓰던 검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입니다.”

라일라의 배에 미리 표시까지 해 두었지만, 황실 의원은 다시 한번 그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배의 근육까지는 들어가야 하지만, 장기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읊었다. 그런 그의 조심성이 비오스트는 나쁘지 않았다. 라일라의 몸에 관한 것이라면 몇 번을 조심해도 모자랐다.

정신을 집중하고 비오스트는 이미 선으로 표시된 라일라의 배에 제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예민한 감각으로 장기에 닿기 전에 검을 멈췄다.

눈을 감고 있는 라일라가 잠시 움찔하더니, 붉은 피가 삽시간에 번져 나왔다. 분명 마력으로 피 역시 천천히 돌게 했는데도 그랬다.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 아니면 이들 말대로 역시 이것은 그저 미친 계획이었나?

어지러운 생각들이 비오스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물러설 수 없다.’

이것이 최선이었다. 비오스트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검을 그어 내렸다. 피가 더 많이 흘러나오자, 황실 의원은 황급히 그것을 닦아 내었다.

힐끗, 그가 옆을 쳐다보자 손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는 신관이 이미 라일라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가 반 가사 상태로 만들었긴 하나, 그 속에서 라일라가 느낄 수도 있는 고통을 덜어주고 지혈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앞서 그가 말한 대로 지혈만을 하고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힘이 드는지 신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실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많은 피에 당황하고 있는 황실 의원도, 침착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창백한 안색을 한 비오스트도, 제 할 일은 끝마쳤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방 안에서 보조를 봐 주고 있는 의원이나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세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잘 벼려 둔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다들 긴장하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단 한 명, 이 방 안에서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라일라였다. 오직 라일라만이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다음은 여기입니다.”

라일라의 피부를 벌리고, 온통 붉은 배 안에서 황실 의원은 한 군데를 가리키며 비오스트에게 말했다. 그곳에 아기가 있었다.

비오스트의 검이 다시 한번 라일라를 겨눴다. 그리고 황실 의원이 그 사이로 제 손을 밀어 넣었다.

“세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흰 천을 든 세실이 더욱 바싹 라일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 오오!”

황실 의원이 감탐사를 내뱉으며 핏덩이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세실은 재빨리 흰 천을 더욱 앞으로 내밀었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곳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어서!”

“네, 폐하!”

비오스트의 초조한 외침을 들으며 신관은 잡고 있던 라일라의 손을 놓고, 대신 제 손을 라일라의 상처 부위 위에 얹었다. 이제 꺼릴 것이 없는지라 그는 자신의 신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아까보다도 더욱 밝은 빛이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빨려 들어가듯이 라일라의 배에 흡수되고 있었다.

황실 의원도 재빨리 손을 닦고 라일라의 배를 꿰매기 위해서 실과 바늘을 들었다.

“황자님이십니다. 모두 정상이시고, 건강하십니다.”

뒤쪽으로 물러났던 세실이 외쳤다. 그리고 세실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듯,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이어서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방 안의 사람들은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했다. 일단 황자의 목숨은 구했다. 절반은 이미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라일라와 아직도 그녀의 배에서 흐르고 있는 피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 되어 가는가?”

“아직, 조금만…….”

초조한 목소리로 비오스트가 재촉하자 땀을 뻘뻘 흘리며 신력을 쏟아붓던 신관의 입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이 나왔다.

일차적으로는 그가 라일라의 장기를 회복시켜야 했다. 어느 정도 그것을 처리해야 황실 의원이 라일라의 상처를 꿰맬 수 있었다.

“피가 너무 많아. 당장 지혈과 치료를 해야 한다.”

황실 의원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지혈을 하고 있어도 피가 너무 많이 흐르는 것이 문제였다.

“둘이 동시에 해라.”

“네? 하, 하지만…….”

비오스트의 말에 황실의원과 신관이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신관이 안쪽을 모두 회복시킨 다음에 황실 의원이 그것을 확인하고 피부를 꿰매기로 한 것이었다.

의술로는 장기를 회복시키는 것이 힘들어서였고, 빠른 시간 안에 그것을 아물게 만들려면 그곳에 신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원래의 계획과 다른 지시를 하는 비오스트 때문에 둘은 당황하고 있었다.

“더 늦어지면 안 돼.”

“아, 알겠습니다.”

“네, 폐하.”

단호한 비오스트의 말에 황실 의원은 준비해 두었던 실과 바늘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라일라의 배를 꿰매기 시작했다. 신관 역시 잠시 멈추었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수, 숨을 쉬시지 않습니다!”

일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였다. 라일라의 머리맡에서 그녀의 상태를 체크하던 다른 황실 의원이 소리쳤다. 모든 사람이 고개를 번쩍 들어 그쪽을 쳐다보았다.

창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는 라일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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