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80화 (80/88)

80.

“조건?”

비오스트가 뜬금없는 말에 되묻자 라일라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날 계곡에서 돌에 부딪히고, 긁히고, 살기 위해서 물풀과 바위를 붙잡다가 생채기가 가득 생긴 손이었다.

“내가 첫 번째가 아니야.”

비오스트의 손을 잡은 라일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바라만 보아도 애틋해지는 황금색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위험해진다면, 그래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내가 아니라 플로랜스가 먼저라는 거야.”

“라일라!”

홀린 듯이 말간 푸른 눈을 바라보고 있던 비오스트의 인상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그 약속만 해 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 미친 계획에 동참해 줄 수 있어.”

“그런 약속은 필요 없어.”

라일라가 잡고 있던 비오스트의 손이 힘주어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아기가 네 목숨이라면, 라일라 넌 내 목숨이야. 그러니 둘 다 내가 살리고야 말겠어.”

꼭 잡은 손으로 그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라일라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래. 믿어.”

툭- 작은 이마가 커다란 가슴에 닿았다. 애교를 부리듯 슬쩍 문지르자, 알았다는 듯이 커다란 손이 라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살려 줘.”

한숨과 같은 고백이 라일라의 입술에서 비어져 나오자 비오스트의 손이 멈칫했다.

처음이었다. 라일라가 살려 달라고 말한 적은.

그녀는 항상…… 죽고 싶어 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목숨을 쉽게 포기했었다.

제 입에 독버섯을 가져갔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절벽 끝에 섰을 때도.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인 양, 너무도 쉽게 제 목숨을 버리던 라일라가 비오스트에게 살려 달라고 말했다. 그 말의 무게는 아주 무겁게 비오스트에게 다가왔다.

“네 옆에서 살고 싶어.”

비오스트는 아무 말 없이 제 몸을 라일라에게서 떼어 냈다.

살고 싶다고 말하는 라일라가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키스를 했다.

마주치는 입술에 사랑을 담아 살짝 깨물고, 문지르듯 비볐다. 밀어 넣은 혀는 그저 혀가 아니라 제 감정이었다. 혀가 더듬어 가는 곳은 축축한 입안이 아니라 그 마음이었다.

비오스트의 혀가 라일라의 혀를 톡톡 건드리자, 살그머니 그것이 일어났다. 주인을 닮아 작고 귀여운 혀의 아랫부분을 쿡쿡 찌르자, 움찔하며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에게 반응하는 라일라가 귀여워 견딜 수가 없어서, 비오스트는 더욱 깊게 숨을 빨아 당겼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혀가 비오스트의 입안으로 넘어왔다.

단단한 이로 그 혀를 긁어내려 자극을 주고, 입안으로 들어오면 재빨리 제 혀로 휘감아 올렸다. 그의 환대에 라일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더불어 비오스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비오스트에게 매달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오스트를 더욱 기껍게 만들었다.

좀 더 그녀가 자신에게 매달리게 만들고 싶었다. 좀 더 자신을 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원하고 있는 만큼이나 그녀도 그러하길 바랐다.

“읏!”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라일라의 혀를 빨아 당기자, 그녀가 움찔하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안 되지, 안 돼.’

새어 나오는 신음도 아까웠다. 라일라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모두 다 자신이 가지고 싶었다. 비오스트는 더욱 바싹 제 입술을 라일라의 입술에 붙였다.

거의 삼켜 버릴 듯이 라일라의 입술을 머금은 채, 그는 다시 라일라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욕심껏 그 안을 더듬고, 아래에 고여 있는 타액을 맛보았다.

라일라의 혀에 뜨겁고 축축한 제 혀를 마음껏 비비고, 감아 올리고, 씹어 삼켰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은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키스만으로 만족해야 했기에, 더욱 그가 라일라의 입술을 탐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아…….”

길고 긴 키스 끝에 드디어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놓아주었을 때, 라일라는 비로소 버거웠던 숨을 겨우 토해 내었다.

그러자 비오스트는 또 후회되었다. 저 입술을 놓아주지 않는 건데!

그럼 저 한숨도 제 것이 될 수 있었다. 저 달콤한 숨결도 자신이 삼켜 버릴 수 있었다. 라일라를 한입에 꿀꺽 삼키지 못한다면, 그것들이라도 제 뱃속으로 밀어 넣고 싶은 것이 비오스트의 심정이었다.

결국, 비오스트가 그 욕망을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라일라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아!”

라일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짧은 감탄사가 비오스트의 행동을 제지했다.

“왜? 아파?”

욕망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걱정이 그곳에 자리 잡았다. 비오스트는 허겁지겁 라일라의 배를 살피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아, 아니.”

라일라는 고통보다는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더불어서 약간의 기쁨도.

“플로랜스가 방금 움직였어.”

“움직였다고?”

“응.”

“방금?”

“응.”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녀가 아픈 것이 아니라니 다행이긴 했다. 다만 아기가 배 속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에게는 뭔가 이상하게 다가왔다.

“만져 볼래?”

“어…….”

비오스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라일라는 그의 손을 끌어다가 제 배에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옷감 너머로 라일라의 둥근 배가 느껴졌고, 이어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아!”

그러다가 뭔가 툭 치는 듯한 감각이 비오스트의 손에 느껴졌다. 아주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약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미묘했다. 그리고 그 느낌처럼 비오스트의 표정도 아주 미묘하게 바뀌었다.

“느꼈어?”

물어보긴 했지만, 비오스트의 표정에서 그가 이미 느꼈다는 것을 알아차린 라일라였다.

자신이 처음으로 아픔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플로랜스가 제 배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지었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비오스트가 짓고 있었다.

놀랍고, 신기하고, 새삼스럽게 아이의 존재를 깨달은 그런 표정이었다.

“귀엽지?”

라일라의 질문에 비오스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라일라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로랜스가 귀엽냐고 하면, 쉽게 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저 도구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라일라가 사랑을 쏟고 있는 대상이 바로 이 생명체라는 것이, 이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강하게 다가왔다.

“비오스트.”

대답을 망설이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당신 때문에, 이 아이 때문에 살고 싶어.”

미소와 함께 라일라는 비오스트에게 눈을 맞췄다. 잡고 있던 손은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래. 라일라.”

그제야 비오스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내 옆에서 살아 줘.”

* * *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이 방 안에 있는 세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세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연습……해 보셨습니까?”

황실 의원의 말에 마법사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마탑에서 어젯밤 제가 반 가사 상태로 만들어 버린 마법사가 열두 명이었다. 그중에서 셋은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였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들은 깨어나면 아주 만족스러워할 것이다.

“연습이야 당연히 했고, 성공했지만, 그 뒤에도 그게 계속 이어질지를 알 수 없는 거지요.”

그랬다. 다른 마법사들을 반 가사 상태로 만드는 것까지야 당연히 연습할 수 있었지만, 배를 갈라 보는 것까지 연습에 동의할 사람은 없었다.

“신관님께서는?”

조심스럽게 신관에게 물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그 역시 연습해 보았다는 것을 이미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늘 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 조절이라는 게 쉽지 않아서요.”

어젯밤, 그는 참으로 미안하게도 신전에서 키우는 돼지에게 일부러 상처를 내고, 그것을 회복시키는 것을 연습했다. 지혈과 고통은 덜어 주되, 너무 빨리 상처가 아물지 않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아기를 꺼내기도 전에 배의 상처가 아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자신이 신의 지팡이가 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게다가 자신이 황궁에 불려올 정도로 뛰어난 신의 지팡이였던 것까지 후회했다.

조금만 덜 뛰어났어도 이곳에 불려오지 않았을 텐데! 그게 아니면 아예 더욱 뛰어나서 그 귀한 분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신께서는 하나의 신체에는 하나의 신력만을 존재할 수 있도록 하셨단 말인가? 적어도 다른 신관과 협력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는 그쪽께서는……?”

마법사가 슬쩍 황실 의원에게 물었다.

“그게 연습을 하기가…….”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임산부의 배를 째고 아이를 꺼내는 연습이라니. 그걸 대체 어디 가서 한단 말인가?

“대, 대신 이론서를 확실히 보았습니다!”

마치 자신이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봐 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정확하게 얼마나 절개가 필요할지, 황제에게 어느 정도 깊이로 찔러야 한다고 지도해야 할지를 열심히 공부한 그였다. 비록 연습은 하지 못했지만, 연구만은 열심히 한 그였다.

“이론이야 폐하께서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게 진짜 가능한가가 문제지요.”

한숨을 내쉬며 마법사가 말했다.

“만약 그분이 그대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아주 무서운 가정을 그가 하고 말았다. 순간 그것을 상상하기라도 한 것인지 날이 선 긴장감이 방 안을 감돌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셋은 한목숨이었다. 라일라가 살면 다 같이 살 것이고, 라일라가 죽으면 다 같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맙시다. 우리 함께 힘을 합쳐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황실 의원이 어떻게든 사기를 높여 보려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궁인이 소리쳤다.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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