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79화 (79/88)

79.

“자, 어떻습니까?”

“뭐가요?”

수리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반해, 세실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 그래도 황제가 정신 나간 계획을 발표해서 바쁜 참이었다.

라일라가 돌아오자, 유모인 세실은 바빠졌다. 그간 하지 못했던 라일라의 상태를 체크하고, 적절한 조처해야 했다.

거기다 비오스트가 말한 정신 나간 계획이 과연 가능 여부를 떠나, 만삭이 된 라일라와 태어날 아기를 위한 준비도 서둘러야 했다. 그야말로 세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리는 그렇게 바쁜 세실을 굳이 불러낸 것이었다. 세실의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지금 시간에 차라리 태어날 아기님의 기저귀가 충분한지 세어 보거나, 아기방이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아니라면 산모에게 좋은 마사지 법이나, 회복을 돕는 음식을 더 알아보든지.

어쨌든 수리를 만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세실에게는 있었다.

“이전에 한 아가씨를 불행하게 만든 자신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하셨지요?”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 아가씨는 이제 더는 불행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신도 이제는 행복을 추구해도 되는 때가 된 것이죠.”

완벽한 논리였다. 수리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

하지만 세실은 그다지 그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대답 대신 가만히 수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리는 그런 세실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물론 자기어필을 위해서 거울을 보며 연습해 둔 미소였다.

“아직 위험한 일이 남아 있지 않나요? 당장 내일 계획이 잘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데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행복하시죠.”

“그런 단시간의 문제가 아닐 텐데요.”

“단시간들이 모여서 긴 인생이 되는 거죠.”

“……그렇군요.”

수리가 제 말에 수긍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지못해 자신이 수긍한 척을 하며 세실이 대답했다.

“시종님께서 이렇게 제게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님 말씀대로 앞으로는 제 행복을 좀 추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수리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제 생각과는 다르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은 이제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지 않을 테니, 행복한 교제를 응낙한다는 것이었다.

‘아! 내가 정식으로 교제 신청을 하지 않아서로군.’

수리는 쓸데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세실 양.”

그는 방긋 웃으며 세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저와…….”

“거절하겠습니다.”

“…….”

“…….”

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니 시작하자마자 세실은 단칼에 거절했고,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대충 짐작은 가네요. 그래서 미리 거절한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요?”

“제 입으로 이야기를 하고, 거절을 해 드려야 하나요?”

“……아니요.”

서로가 짐작하는 바가 정확했기에 확인 사살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제가 세실 양보다 어려서인가요?”

“적어도 제가 세실 양이라고 불릴 만큼 나이가 적지는 않지요.”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여성이 여섯 살이나 많은 것은 작은 문제는 아니지요. 그리고 시종님께서는 귀족이시고, 저는 평민이고요. 앞으로도 저는 태어나는 황자님의 유모이겠지만, 시종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보필하는 높은 위치에 서실 분이지 않습니까?”

“네. 심지어 저는 거기다가 돈도 많답니다.”

“…….”

세실이 거론하지 않은 자신의 장점까지 스스로 말하는 수리를 보며 세실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거절을 당하는 건 수리면서 그가 더 당당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더더욱 시종님께 더 어울리는 분을 찾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귀족이고, 어리고, 예쁜, ……돈도 많으신 분으로요.”

거기까지 말하고 세실은 뒤를 돌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제가 찬 것인데 이상하게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제길!”

세실의 뒤통수로 수리의 화가 섞인 큰 소리가 들렸다.

“제 취향이 그런 걸 어쩌란 말입니까?”

수리가 버럭 내지른 소리가 세실의 뒤통수에 꽂혔다.

“저는 평민에, 늙고, 돈도 없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자가 좋단 말입니다!”

세실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 맞는 말이었지만, 묘하게 기분 나쁜 말들이었다.

“이것 보세요, 시종님!”

결국, 세실은 한마디 하기 위해서 뒤를 돌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한 남자였다.

덧붙여서 자신을 차 버린 세실에 대한 원망과 그녀에 대한 애틋함을 눈에 가득 담은.

“……!”

한마디 쏘아 주려고 했던 세실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저 표정을 보고는 아무도 한마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대체 저 남자는 언제부터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걸까?

“저는 당신이 좋습니다. 신분이나, 나이나, 뭐 그런 것 다 아무래도 좋고, 그냥 세실 양이 좋습니다.”

이제껏 그 말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수리는 토해 내듯이 고백했다.

“왜……요?”

얼떨결에 세실이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목석같은 저 얼굴은 대체 언제 웃는 걸까 궁금했다.

언제나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를 하고 지겹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몇 번을 마주쳐도 언제나 똑같은 인사에 똑같은 표정을 한 세실에게 다른 표정은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궁금해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틈만 나면 세실의 생각만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물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세실 양?”

수리의 열망이 옮아 붙은 것일까? 그게 아니면, 이제는 행복해도 좋다고 자신에게 허락한 뒤라서 그런 것일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세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수리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일단, 세실 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두세요.”

세실은 재빨리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런 얼굴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세실에게 흔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 그럼 저는 자기야가 좋…….”

“그런 것 말고요.”

마치 기회는 이때라는 듯이 수리는 제가 부르고 싶은 호칭을 얼른 입 밖으로 끄집어냈지만, 그 단어가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거절을 당하고도 뭐가 좋은지 수리는 그저 벌쭉 웃고만 있었다.

그녀가 아주 조금은 허락해 준 것이었다.

스스로를 불행의 방에 가두었던 세실이 아주 조금이라도 방문을 열어 준 것이 수리에게는 아주 큰 기쁨이었다.

* * *

“…….”

비오스트의 계획을 들은 라일라는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깜박였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던지라 비오스트는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며 채근하지 않았다.

라일라에게 충분히 받아들일 시간을 주고, 차근차근 설명할 생각이었다.

“응. 알겠어.”

하지만 이어진 라일라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뭐?”

너무도 쉽게 알았다는 대답을 라일라가 해 버리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비오스트였다.

“알겠다는 게 내가 말한 대로 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단순히 내가 한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했다는 거야?”

“둘 다.”

“둘 다?”

얼뜬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비오스트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이전처럼 내 신체 시계를 천천히 흐르게 해서 반 가사 상태처럼 만든 다음에, 네가 내 배를 갈라서 플로랜스를 꺼내고, 황실의원이 내 배를 꿰맨 다음에, 신관이 상처를 낫게 만든 다음 나를 깨운다. 맞지?”

라일라의 말대로 그녀는 비오스트가 길게 설명했던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들 미친 계획이라고 했어.”

“별로 정상적인 계획 같지는 않긴 해.”

당연했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낸다니?

지옥에서나 펼쳐질 광경이었고, 흡사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처럼 오싹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넌 비정상적인 계획에 이렇게 쉽게 동의한다는 거야? 네가 바로 당사자인데?”

마치 동의해 주는 라일라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이 비오스트는 말했다. 그 비정상적인 계획을 생각해 낸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이면서.

이론상으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이론일 뿐이라는 것 역시도 알고 있었다.

라일라를 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불러들인 마법사가 신체 작용을 느리게 할 수 있다는 것. 신력으로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세간의 속설과는 달리 라일라의 몸은 신력과 마력이 혼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더불어 인간을 뛰어넘는 감각을 지닌 비오스트가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만 라일라의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낸다는 것 역시 중요한 포인트였다.

만약, 저 중에서 한 가지라도 없었다면 이 계획은 불가능했으리라.

“다른 방법은 없는 것 아니야?”

“…….”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네가 이야기했겠지.”

당연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제 손으로 라일라의 배에 칼을 들이대야 하는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면 해야지. 그게 너와 아기와 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라일라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살짝 웃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어느새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비오스트를 바라보는 라일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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