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71화 (71/88)

71.

“안녕, 라일라!”

오늘도 소피는 활기차게 인사하며 라일라를 방문했다. 2~3일에 한 번씩 방문하기로 했던 소피였지만, 아무래도 만삭의 임산부인 라일라가 신경 쓰여서 거의 매일 들르곤 했다.

“안녕하세요, 소피.”

침대에 앉아 바느질하고 있던 라일라는 소피를 보며 살짝 웃었다. 바느질 도구와 보드라운 천을 구해다 준 것도 소피였다.

손재주가 썩 좋은 라일라는 아니었지만 심심풀이 삼아, 그리고 제 손으로 만든 옷을 한 벌쯤은 아기에게 입혀 주고 싶은 욕심에 라일라가 부탁한 것이었다.

“호박파이를 좀 해 왔는데, 지금 먹겠어요?”

말은 질문이었지만, 소피는 벌써 식탁에 호박파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오기 직전에 오븐에서 꺼낸 호박파이는 아직도 뜨끈뜨끈했다.

“자자, 얼른 와요.”

그녀는 잰걸음으로 주방에서 포크도 들고 와 라일라를 불렀다. 열심히 먹을 것을 해 주었지만, 도통 살이 찌지 않는 라일라 때문에 소피는 속상했다.

자고로 임산부라면 10킬로 정도는 살이 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일라의 모습은 임신 전이 어땠을지 모르는 소피의 눈에도 10킬로는 되레 빠진 모습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요.”

바느질감을 내려놓은 라일라가 식탁에 앉아 포크를 들자, 그제야 소피는 마음이 놓였다.

지난번의 버섯요리는 대실패였다. 나무하러 갔던 남편이 몸에 좋은 버섯을 따 왔기에 채소와 함께 맛있게 구워 주었는데, 접시에 놓인 버섯구이를 본 라일라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갑자기 속이 좋지 않다며 못 먹겠다고 했었다.

‘호박은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럼 내일은 호박스튜를 해 줄까?’

잘 먹고 있는 라일라를 보며 소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오늘은 산책하러 나가지 말아요. 새벽에 비가 와서 길이 얼었거든. 임산부는 넘어지면 큰일이니까.”

오늘도 가지고 온 음식 재료들을 주방으로 가져가며 소피가 말했다. 빵 바구니를 열자 어제 가지고 온 보리빵이 절반이 넘게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에그. 쯧쯧. 우리 집 다락방 쥐새끼도 이거보다는 많이 먹겠네.’

소피는 고개를 내저으며 하루가 지난 보리빵을 꺼내고, 오늘 아침에 새로 구운 흰 빵을 넣었다. 내일도 반도 넘게 남아 있다면, 그때는 잔소리를 한 번 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소피였다.

“아, 그럼 오늘은 못 나가는 건가요?”

“오후에는 괜찮을 거예요. 아직 한겨울은 아니니 녹겠지.”

곧 볕이 나고 기온이 오르면 언 길이 녹을 것이다. 진흙이 신발과 옷에 좀 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라일라는 오후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라일라는 비가 오거나 바람이 아주 세게 부는 날이 아니라면, 거의 매일 산책하러 나갔다. 가벼운 운동이 출산에 도움이 된다는 세실의 말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 라일라였다.

“이제 잎이 다 져서 산책에 볼 것이 없어서 심심하겠어.”

창밖을 내다보며 소피가 말하자, 라일라도 새삼스럽게 밖을 내다보았다. 마른 가지와 누렇게 죽은 풀들이 보였다.

겨울이 오두막 창문에 풍경화처럼 걸려 있었다.

“오히려 길 잃을 염려가 없어서 좋아요. 이제 이 주변 길을 다 알긴 하지만.”

“어휴, 부지런히도 걸었나 보네. 그래도 이 뒷산이 높진 않지만 그렇게 작은 산이 아닌데. 설마 정상까지 가 본 건 아니겠지?”

“그렇게 높이까진 가진 않았어요.”

“그래도 중간에 계곡도 있고, 낭떠러지도 있고, 산짐승도 있는, 어쨌든 있을 건 다 있는 산이니 조심해서 다녀요.”

“그럴게요.”

“아! 하지만 운동하는 건 아주 많이 잘하고 있는 거야. 몸 무겁다고 누워만 있으면 애 낳을 때 고생이야. 내가 애 낳는 그날까지도 밭을 매고 있어서 그런가, 첫째도 진통 두 시간 만에 숨풍~ 낳았지. 둘째는 그것보다 더 빨랐고.”

소피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라일라가 물어본다면, 둘째는 한 시간 만에 낳았다며 자랑할 준비를 하면서.

“그러셨군요.”

하지만 라일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이야기를 마무리해 버렸다. 덕분에 소피는 자랑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참 착한 아가씨이긴 한데, 뭔가 대화가 좀 어려웠다. 매끄럽지 않다고 해야 할지, 눈치가 좀 없다고 해야 할지, 사회성이 좀 없다고 해야 할지.

나쁜 뜻을 가지고 그러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미묘하게 대화가 뚝뚝 끊긴다거나 뜻밖의 대답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람과 대화를 해 본 적이 별로 없는 라일라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소피는 그 사실을 몰랐으니 그저 좀 특이한 아가씨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배가 더 나온 것 같네.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얼른 나와야 할 텐데!”

소피의 말에 라일라는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 아기 이름은 정했어?”

“네.”

“정말?”

들고 있던 순무를 움켜쥐며 소피는 되물었다. 자기가 제안한 이름도 마다하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라일라가 드디어 아기 이름을 정했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플로랜스요.”

“플로랜스? 플로랜스, 플로랜스, 플로랜스.”

라일라가 알려 준 이름을 소피는 몇 번이나 불러보았다.

“좋은 이름이네!”

그리고 웃으며 좋은 이름이라고 말해 주었다. 어쩐지 순한 성격의 아이일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아주 잘 웃고, 아주 상냥한, 그런 아이.

“그럼 성은?”

“네?”

“아이 성은 뭔데요? 예쁜 이름이긴 한데, 성이랑 어울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 동네에 말이지 페넬로페라는 아이가 있어. 이름만 들으면 아주 예쁘지만, 그 아이의 성은 페퍼란 말이지. 페넬로페는 줄여서 페페라고 부르는 것 알아요? 그래서 그 아이는 어릴 때 페페페라고 놀림을 당했지.”

여기서 소피는 라일라가 페페의 별명을 듣고 웃거나, 성에 어울리는 이름이 중요하다고 맞장구를 칠 줄 알았다.

“아…….”

하지만 소피가 들은 것은 난감함이 깃든 라일라의 감탄사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라일라였다. 곧 태어날 아이에겐 발렌시아라는 성을 붙일 수도 없었고, 온라이언이라는 성을 붙일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무의미한 일이었다. 태어나는 순간 고아가 될 아이였고, 이미 르미에르에게 입양 부탁까지 해 놓았다. 그러니 입양될 집의 성을 따르게 될 테니 성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쩌면 이름조차도 무의미할지도 몰랐다. 아기는 라일라가 지어 준 ‘플로랜스’라는 이름이 아니라 아예 다른 이름으로 평생을 불릴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애 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네?”

소피는 순무를 썰며, 은근슬쩍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툭 던졌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묻는다는 듯이 말이다.

“아…….”

소피의 질문에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또 신음과 같은 짧은 감탄사와 침묵이었다.

괜한 것을 물었나 싶어서 소피가 후회하는 순간, 라일라의 입이 열렸다.

“없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라일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일라.”

길어지는 침묵에 소피는 순무를 내려놓고 앞치마에 손을 슥슥 닦으며 라일라에게 다가왔다.

그동안은 그저 못 본 척 해 왔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임신을 한 몸으로 여기에서 혼자 지내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해요. 그때 나한테 라일라를 부탁하며 돈을 주신 분도 뭔가 지체 높은 분처럼 보였고.”

아직 흙이 조금 남아 있는 손으로 소피는 라일라의 손을 꼬옥 쥐었다.

처음에는 그저 돈을 받았으니 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르미에르가 소피에게 제시한 금액은 그 액수가 제법 컸다.

꼬박 하루를 남의 밭에서 일해서 한 달간 받는 금액보다 큰 금액이었지만, 2~3일에 한 번씩 오전에 들르는 정도로 일은 끝났다. 음식 재룟값을 생각해도 매우 후한 액수였으니 그저 횡재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라일라와 계속 만나면서 점점 혼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런 시골에서 애를 낳으려는 라일라에게 마음이 쓰이는 소피였다.

“혹시 죽은 거예요? 아이 아버지가?”

“…….”

“라일라.”

소피는 다정하게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친엄마나, 친언니처럼.

“여자 혼자 아이를 낳고 산다는 것을 정말로, 정말로 힘든 일이야. 몹시 나쁜 놈만 아니라면, 그러니까 도박을 한다거나, 술버릇이 좋지 않다거나, 여자를 때리는 쓰레기가 아니라면, 애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이를 낳는 쪽이 나을 거예요.”

라일라는 꺼끌꺼끌한 흙과 따스한 온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소피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소피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거나, 도박하거나, 여자를 때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돌아간다면, 그의 곁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이를 죽이리라는 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도 상처가 될 것이라는 것도 라일라는 말할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자신들은 그런 관계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독이 되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함께 있을 수 없는 관계.

“그냥…… 없어요.”

라일라는 소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통통하고 다정한 손을 바라보며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랑 저랑 그냥 둘뿐이에요. 아이 아버지는 없어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얼굴을 애써 지워 내며 라일라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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