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여보! 나 왔어!”
오늘은 땅이 얼었다는 핑계를 대며 집에서 쉬겠다고 말한 남편에게 자신이 왔다는 인사를 하고는, 소피는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에휴~”
바구니에서 라일라가 다 먹지 못한 빵과 요리를 꺼내며 소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애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던 라일라가 못내 신경이 쓰여서였다.
라일라가 성녀가 아닌 이상 애 아버지 없이 임신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애 아버지는 있었다.
다만, 차라리 없는 게 나은 남자인 게 분명했다.
“어, 그래.”
안쪽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빵을 또 남겼더라고. 우리 막내도 그 아가씨보다는 잘 먹을 거야.”
“그래? 그런데 소피.”
“정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너무 가엾지 뭐야? 곧 아이가 태어날 텐데 몸은 빼빼 말랐고, 거기다가 말은 하지 않지만 어디 아픈 곳도 있는 모양이더라고. 아침에 가면 간밤에 꼬박 앓은 모양으로 있을 때도 있고,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이 벗어져있을 때도 있더라고.”
대충 바구니에서 먹을 것을 다 빼 놓은 소피는 아침에 자신이 구워 놓고 간 호박파이가 덩그러니 빈 접시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자기 부인이나 엄마가 먹을 것은 한 조각도 남겨 두지 않고 말이다.
“누군지 몰라도 애 아빠가 어지간히 망나니인가 봐. 오늘 아이 아빠에 관해서 물어봤는데,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니까?”
빵은 아침에 구운 흰 빵과 라일라의 집에서 되가져온 보리빵으로 될 것 같은데, 다른 건 뭘 해야 할까?
소피는 점심 메뉴를 고민하며 빈 바구니를 한쪽에 놓아두었다.
“소피?”
집 안쪽에서 남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말해.”
“이리 좀 와 봐.”
“왜?”
“어…… 당신이 이리로 좀 와 봐야 할 것 같은데?”
“왜? 무슨 일 있어?”
소피가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자, 그곳에는 어색한 미소의 남편이 낯선 사람과 함께 있었다.
“어머, 손님이 계셨네?”
소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손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누가 봐도 귀족이었다. 남편의 옆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도 그랬지만, 남편의 앞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가 특히 그랬다.
옷차림도, 풍기는 분위기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눈빛까지도 모든 것이 남자가 지체 높은 귀족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좀 초췌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니 사실은 꽤 많이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남자의 아우라를 감출 수 없었다.
“조금 전의 그 여자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지.”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소피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 이름이 뭐지?”
그렇게 묻는 남자의 입술과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 * *
소피가 돌아가고 나서 라일라는 무엇을 하든 집중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한 번 떠올라 버린 얼굴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비오스트…….”
아주 오랜만에 그 이름이 라일라의 입술 위에 얹어졌다. 내뱉어진 이름에 반응하듯, 라일라의 손이 살짝 떨렸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순식간에 수많은 비오스트들이 라일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냥한 비오스트, 다정한 비오스트, 차가운 비오스트, 냉정한 비오스트.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라일라는 알 수 없었다.
“그만해. 다 필요 없어.”
라일라는 고개를 흔들며 제 머릿속에 있는 흑발 금안의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고 싶지도, 알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소피의 말처럼 이제 아이가 나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라일라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한두 주쯤. 아주 늦게 나온다고 해도 삼사 주쯤 뒤에는 플로랜스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끝이 날 터였다.
라일라의 목숨도, 비오스트에 관한 생각도, 이 숨바꼭질도 전부.
“이런, 물이 다 식겠어.”
라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를 집어 들고 티팟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플로라가 쓰던 티팟은 라일라도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라일라는 바느질감을 다시 집어 들었다. 좀 비뚤배뚤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아이가 입을 수는 있을 것 같은 옷의 형태가 나오고 있었다.
“좀 크게 할 걸 그랬나? 비오스트를 닮았으면 아기가 클 수도 있을 것 같……”
한 번 언급을 해 버려서일까? 잊었던 이름이 아주 쉽게 또 튀어나와 버렸다.
라일라는 더는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도록 입술을 꼭 깨물며 차를 따랐다. 따뜻한 찻잔을 들고 라일라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어?”
바깥의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쓰던 라일라의 눈에 평소와는 다른 것이 보였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보였다.
라일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게 무엇인지 자세히 보려고 애썼다. 그것은 말을 탄 사람들이었다.
르미에르는 아니었다. 그는 늘 혼자 이곳을 찾았다. 혹시나 비오스트가 자신에게 미행을 붙일까 염려해서 재규어로 변신해서 여기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말을 타고 오지도 않았다.
“설마!”
찻잔을 든 라일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라일라는 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과 가까이 다가가서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싸웠다.
이긴 쪽은 후자였다.
라일라는 빈 창문틀에 찻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창문에 더욱 바싹 붙였다.
“아……!”
라일라는 고개를 뒤로 황급히 물리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 멀리서 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는 무리 중 가장 앞에서 가장 서두르고 있는 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오스트였다.
눈, 코, 입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있었지만, 라일라는 그를 알아보았다.
“어, 어, 어떻게 하지?”
파들파들 떨리는 손은 라일라의 입에서 나오는 걱정의 말을 막아 주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치던 라일라는 턱하고 의자가 제 발을 붙잡는 것을 느끼고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 있으면 안 됐다. 곧 비오스트가 도착할 테니까.
라일라는 급히 뒷문으로 나가려다가 이내 다시 앞쪽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방금 제 발을 붙잡았던 의자를 끌고 와 문고리에 단단히 받쳐 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테이블도 끌어다가 앞을 막고 싶었지만, 힘이 부족했다.
라일라는 재빨리 뒤를 돌았다. 그리고 뒷문을 열고 그대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멀리, 최대한 멀리 가야 할 것이다.
그가 붙잡을 수 없도록.
* * *
작은 오두막에 도착하자마자 비오스트는 바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여기에…….”
지금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이유는 말을 달려서만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워서도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을의 여자가 했던 말들은 전부 라일라와 꼭 들어맞았다. 임신한 여자가 혼자 있다는 것, 어느 높으신 분이 라일라를 부탁했다는 것, 곧 아이가 나올 것 같다는 것까지.
처음에 소피라는 여자는 라일라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오두막에 산다는 그 임산부에 대해서 말을 해 주면 후사하겠다는 수리의 꾐에 그녀의 남편은 흔들렸지만, 소피는 팔꿈치로 그런 남편의 가슴을 때리며 입을 다물었다.
칼을 빼 들까도 생각했었다. 지위로 위협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소피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서 했던 말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이제까지 라일라를 잘 돌봐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비오스트가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말을 하고 나서였다.
라일라와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서 데려가려고 왔다고 비오스트가 말하자 마침내 소피는 라일라의 이름과 그녀가 지금 사는 오두막의 위치를 그에게 알려 주었다.
“라일라.”
그리운 이름을 부르자 뽀얀 입김이 같이 나왔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는 동안 어느새 흰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비오스트는 오두막 가까이 다가갔다. 오두막은 어딘지 모르게 옛날 라일라가 살았던 그곳을 떠올리게 했다.
마치 라일라를 처음 보았던 그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라일라?”
비오스트는 조심스럽게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며, 그것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
하지만 안은 조용했다.
비오스트는 그대로 살며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긴 것인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앞뒤로 문을 흔들자 무언가에 걸린 듯 문은 흔들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라일라!”
조급해진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며 더욱 거세게 문을 흔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고, 대답은 없었다.
“제길!”
더는 기다릴 수 없음에 비오스트는 문을 놓았다. 대신 뒤로 물러났다가 그대로 달려가며 있는 힘껏 제 몸을 문에 부딪혔다.
오래된 오두막의 문은 비오스트의 힘을 버티지 못했고, 경칩이 부서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있는 힘껏 몸을 부딪쳤던 비오스트 역시 문과 함께 안으로 쓰러졌다.
“폐하!”
뒤늦게 달려온 수리와 수행원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비오스트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을 쳐다볼 뿐이었다.
오두막은 텅 비어 있었다. 라일라는 여기에 없었다.
그는 또다시 라일라를 놓쳤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비오스트의 몸 안에서 절망감이 휘몰아쳤다.
털썩.
비오스트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라일라……”
잇새로 흐르는 이름에서는 그저 무력감과 고통만이 잔뜩 묻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