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69화 (69/88)

69.

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이 비오스트의 눈에 들어왔다.

라일라가 앉았던 의자, 라일라의 옷이 들어 있는 옷장, 라일라가 서 있던 창문, 라일라가 잠들었던 침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비오스트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자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를 뚫고 밤새 말을 재촉해서 달려갔는데, 그곳에 라일라는 없었다. 낯선 곳에서 그녀는 대체 어디 있을까를 고민하며 밤을 새웠다.

말을 달려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오스트의 머릿속을 꽉 채우는 것은 그것이었다.

너는 어디에 있을까?

너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라일라…….”

비오스트는 언제나 그렇듯 라일라의 이름의 부르며 침대로 쓰러졌다.

가만히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라일라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비오스트는 아예 베개의 코를 처박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남아 있는 향이 너무 옅어서 애가 닳았다. 사라져 가는 향기처럼 라일라도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라일라.”

어느새 비오스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너도 이랬을까?

모든 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래서 네가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너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굵은 눈물방울이 비오스트의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려 천천히 베개를 적셨다.

“라일라.”

또다시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며 비오스트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밤이 길었다.

혼자인 밤은 그렇게 길었다.

* * *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황제가 건넨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병든 그보다 앞에 있는 비오스트가 더욱 아파 보였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제 아들인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겁니까?”

퀭한 눈을 들어 비오스트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는 제 몸 걱정을 할 사람이긴 했다. 아비가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혈통을 이을 매개체가 혹여나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소멸할까 봐 걱정했다.

그에게 비오스트는 아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핏줄을 후세로 잇는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소문을 듣자 하니 그 아이가 없어진 모양이더구나.”

“…….”

“관리를 좀 잘했어야지.”

마치 기르던 개가 줄을 끊고 달아나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황제는 말했다. 그 개의 줄을 끊어 놓은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면서 말이다.

“찾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찾을 수 있겠느냐?”

“글쎄요.”

설사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던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찾아낼 것이라고도, 포기할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시간상 이미 늦지 않았느냐? 벌써 겨울이야.”

“그런데요?”

“이런, 아들아. 그 아이가 황궁에 처음 온 것이 초봄이지 않았느냐. 이미 10개월이 넘었어.”

비오스트는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이미 죽었을 게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라일라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라일라가 없어진 것을 진작 알았을 황제가, 지금껏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날짜를 헤아리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가 짐작하는 라일라의 출산일보다 빨리 비오스트가 그녀를 찾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날짜를 이제는 넘겨 버린 것이다.

“…….”

그저 황제가 혼자 추측해서 한 말이었는데도 비오스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당장 그에게 달려들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질 것이다. 지고 말 것이다.

온라이언 힘의 계승자인 황제에게 비오스트가 덤벼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거의 소드마스터에게 달려드는 기사 수습생의 꼴이었다.

“아깝게 되었어. 귀한 온라이언의 혈통을 길에 내다 버린 것이 아니냐? 몹쓸 년. 죽더라도 저 혼자 나가 죽을 것이지. 감히 귀한 온라이언의 혈통을.”

황제는 참으로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라일라의 배 속에 있던 아이였다. 라일라 따위는 무가치했다.

“하여, 내가 너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려고 한다.”

“기회라니요?”

비오스트의 말에 황제는 빙긋이 웃었다.

마치 자신은 아랫것들의 실수를 눈감아 주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으며. 아들의 잘못을 감싸 주는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것처럼.

그리고 비오스트는 그런 황제의 미소를 보며 더욱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가 저렇게 웃으며 말을 하는 것은 항상 개 같은 소리를 할 때였다.

“그 어린 유목민 계집아이를 데려오라고 시켜 놓았다. 그동안 네가 바쁜 것 같아서 미리 말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내일이면 그 아이가 도착할 것이다. 침소는 황태자궁에 차리라고 일러두었다.”

“…….”

“왜?”

황제는 비오스트가 아무 말이 없자, 채근하듯 물었다. 마치 비오스트가 왜 그러는 것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싫은 것이냐?”

살짝 고개를 숙여 황제는 비오스트의 표정을 보는 척했다.

“아니면, 수줍은 것이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황제는 씨익 웃었다.

실제로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에게 복종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대들던 아들의 실패가 기꺼웠다.

귀한 온라이언의 혈통을 타고났으면서 종종 그것을 혐오하는 것 같은 티를 숨기지 못하는 그가 자신에게 굴욕적인 말을 들어도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 짜릿했다.

자신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그사이에 어떻게든 제 핏줄을 이으려 하고 있는데, 아직 살날이 한참 남아 여유를 부리는 것 같은 아들에게 질투를 느꼈다.

차라리 저 몸을 나를 준다면 훨씬 유용하게 쓸 것인데.

차리라 저 생명이 나의 것이라면 좋으련만.

저놈을 죽이고 내가 살 수 있다면!

나의 피가 후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황제는 머릿속에서 비오스트를 수십 번 죽이고 그의 피를 마시고, 그의 육체를 씹어 먹는 상상을 했다. 그리하여 제 아들의 생명력을 제가 가지는 상상을 했다.

‘아까운 일이야. 태어날 때는 다른 이의 생명을 흡수했으면서, 왜 그 이후에는 안 되느냔 말이야.’

“온라이언 황실을 잇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그 아이를 취해야겠구나.”

황제는 진심으로 제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대신 살 수 없는 현실에 통탄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네가 싫다면 강요할 수 없겠지.”

“…….”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그제야 상체를 뒤로 젖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은 편안한 그 모습에서 여유마저 느껴졌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던 것 아닙니까?”

그를 바라보는 비오스트의 얼굴에서는 황제를 향한 경외심도 아버지를 향한 존경심도 없었다. 그저 추악한 괴물을 바라보는 혐오감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당신은 이미 알았을 거야. 몰랐을 당신이 아니지.”

비오스트의 말에 황제는 계속해 보라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당신 손안의 장난감에 불과했을 거야. 그래서 나도 당신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척을 해 준 거야.”

“하지만 아들아. 이제 알지 않느냐? 너는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척을 해 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내 손바닥 안이라는 것을.”

“그래. 맞아. 나는 당신 손바닥 안이야.”

비오스트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비오스트는 그의 추악한 욕망의 찌꺼기로 태어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소유물에 불과했으며, 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 손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당신 손목을 자르기로 했어.”

“뭐?”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비오스트가 상체를 숙이며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황제와 자신의 사이에 있던 탁자를 박차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가소롭구나, 아들아.”

비오스트의 말에 황제가 당황한 것은 아주 잠시였다.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비오스트를 보면서 오히려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의 기를 내보였다.

“읏!”

분명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지만, 순간 비오스트의 손이 움찔하더니 당장이라도 황제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던 기세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비오스트는 그를 짓누르고 있는 황제의 기를 이겨 내려 이를 꽉 깨물고, 더욱 검을 꼭 쥐었다.

“훗!”

황제는 그 꼴을 보고 비오스트를 비웃었다.

손목을 자르겠다고 하더니, 자신의 기에 손도 움직이지 못하는 꼴이라니.

“아들아.”

낮은 목소리로 황제는 비오스트를 불렀다.

“감히 네가 내게 대드는 것이냐?”

사나운 눈이 비오스트를 노려보았다.

“큭!”

거대한 살기가 비오스트를 금방이라도 짓밟아 버릴 것 같은 것을 그는 겨우 견뎌 내고 있었다. 짓눌리는 압박감에 손이 떨리면서도 비오스트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도 인간의 모습으로 말이냐? 신성한 모습으로 변했다면 그나마 네게 약간의 승산이 있었을 텐데 멍청하구나, 아들아.”

“난 이제 쉬운 길을 찾지 않기로 했으니까. 가능성 있는 길을 찾으려다가 난 너무 큰 것을 잃었어.”

비오스트는 자신의 안에 있던 힘을 쥐어짜며,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살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온몸을 마치 사슬처럼 얽매고 있는 황제의 살기 속에서 힘겹게 비오스트는 검을 휘둘렀다.

그저 몸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황제는 비오스트의 검을 피해 버렸지만, 거의 속박처럼 그를 얽매고 있던 황제의 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짐승이, 되고 싶지 않아!”

“짐승이라니! 신성한 모습이다!”

황제는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모습을 직접 보여 주겠다는 듯이 빠르게 황제의 모습이 변했다. 르미에르나 비오스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랐고, 그 몸집도 순식간에 커지고 있었다.

변하는 순간순간마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는 더욱 강해졌다. 온라이언의 계승자가 가진 힘을 아낌없이 비오스트에게 보여 주고, 그를 굴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과거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비오스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올 수 없는 지하로 그는 어린 아들을 불렀다. 그리고 만약 자신과 똑같이 재규어로 변하지 못한다면 온라이언으로서는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것이니 당장 잡아먹어 버리겠다고 말했었다.

시범을 보인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집채만한 짐승이 갑자기 나타나 제 목을 억누르고,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커다란 이빨을 제 얼굴 가까이에 들이댔다. 뜨거운 입김이 어린아이의 여린 피부에 닿았다.

겁먹은 아이는 울었고, 그것이 성가셨던 짐승은 서슴없이 자신의 발톱을 아이의 살에 박아 넣었었다. 그것은 살기 위해서 비오스트 안의 어린 재규어가 자신의 본능을 발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투성이의 어린 재규어가 지하실에서 쓰러지고 나서야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인간으로 돌아갔었다.

“윽!”

그때와 똑같이 커다란 발톱이 푹- 하고 비오스트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비오스트의 손이 검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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