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누, 누구세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비오스트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는 여자의 배는 작게 볼록했다.
“넌, 누구지?”
여자에게 묻는 비오스트의 목소리에는 허탈감이 가득 묻어 나왔다.
라일라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버님이 보내신 사람인가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아기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 해치지 말아 주세요.”
여자는 그렇게 물으며 제 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저희는 그저 사랑했을 뿐이에요.”
물어본 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묻지도 않을 것을 대답하며 여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하인과 눈이 맞아 임신해 버린 귀족 영애였다. 자신들을 갈라놓으려는 아버지의 눈을 비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이었다.
도피를 한 장소가 가문의 별장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는 비오스트가 자신들을 잡으려고 아버지가 보낸 사람인 줄 알고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잡혀 간다면, 엄한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아마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자신도, 사랑하는 남자도, 그리고 배 속의 아이도.
“무슨 비가 저렇…… 어? 이건 또…….”
뒤늦게 도착해 집 안으로 들어온 수리는 모르는 여자가 한가운데에서 펑펑 울고 있자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의 배가 볼록한 것을 보고 이내 상황을 알아차렸다.
잘못 찾은 것이었다. 이 집에 살고 있다는 임산부는 라일라가 아니었다.
“저기, 전하?”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수리는 고개를 돌려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눈빛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라일라 님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
수리의 말에도 비오스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수리는 더욱 불안해졌다.
안 그래도 미친놈처럼 굴던 비오스트인데, 거의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려 온 것이 허탕이었으니 얼마나 더 지랄해 댈지 끔찍했다.
“전하?”
제 안에 있는 용기를 끌어모아 수리는 다시 한번 비오스트를 불렀다.
천천히 뒤도는 그의 어깨를 실망감이 짓누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비척거리는 발걸음마다 흔적을 남기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비오스트의 절망인 것 같았다.
“……돌아가자.”
수리가 그를 부르고도 한참 지난 뒤에야 비오스트는 무거운 말 한 마디를 꺼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라일라는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몰랐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녀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읏!”
그렇게 생각하자, 비오스트의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전하!”
순간 비오스트가 비틀거리자 놀란 수리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이내 필요 없다는 듯이 비오스트가 그의 손을 쳐내긴 했지만 말이다.
“이대로는 돌아가기 힘듭니다. 날씨도 좋지 않은 데다가, 다들 지쳤습니다.”
“상관없어.”
“말이 지쳐서 중간에 뻗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마을에선 훈련된 말을 구하기도 힘들 겁니다. 차라리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 수도로 돌아가시지요.”
“라일라를 찾아야 해.”
“이미 찾고 있지 않습니까? 수도로 돌아간들, 어차피 소식을 기다려야 할 겁니다. 야밤에, 비에, 지친 사람과 말까지. 지금 출발한다 한들 속도를 내기 어렵습니다.”
“…….”
“오늘 밤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일찍 출발하시지요.”
비오스트는 수리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 창문 너머의 비는 이제 폭우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고, 거센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우르릉 쾅!
비오스트의 고민을 덜어 주려는 것처럼 때마침 천둥과 번개까지 쳤다.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지.”
“아마 위쪽에 침실이 있을 것 같은데, 올라가서 황태자 전하께서 쉬실 곳을 마련하도록 해라.”
“네.”
수리가 고개를 까딱여 수행원에게 말하자 두어 명이 후다닥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론 집주인의 동의는 구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황태자 전하라는 말을 들은 순간 울고 있던 여자의 눈이 놀라서 동그랗게 떠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간 큰 인간이 감히 황태자 전하께서 여기서 주무시고 가신다는데 안 된다고 한단 말인가?
“전하, 올라가시지요.”
그저 수리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비오스트만 신경 쓰면 되었다.
* * *
우르릉 쾅!
번갯불이 번뜩여 라일라의 손님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제야 라일라는 그것이 비오스트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배가 아픈 거냐?”
얼른 달려와 라일라를 걱정하는 목소리 또한, 비오스트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땀이…….”
다정하게 라일라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는 손 또한, 비오스트의 것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대공님.”
그리고 그것이 괜히 서러운 라일라였다.
비오스트를 피해서 도망을 온 것이었다. 그가 아이를 해치려 하자,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순간에서 왜 비오스트가 생각이 났을까?
자신을 찾아온 그 그림자를 보고 비오스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마지막의 마지막에 항상 생각나는 사람은 왜 그일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라일라의 이마를 닦아 주는 르미에르의 손수건은 이미 반쯤 젖어 있었다.
“정말로 이제 괜찮아요.”
라일라는 겨우 눈을 뜨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밖은 이미 깜깜했다.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번쩍일 때를 제외하곤.
“전 오히려 기쁜걸요.”
라일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뭐가 기쁘다는 거지?”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요.”
라일라의 대답에 르미에르는 가슴이 아파져 왔다. 제 목숨을 갉아먹고 있는 아이가 뭐가 그리 사랑스러운 것이지 르미에르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 진통제를 가지고 왔으니, 지금 먹는 게 좋겠다.”
르미에르는 라일라의 이마의 땀을 닦아 주던 손을 멈추고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물이…….”
물을 찾으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르미에르의 옷을 라일라가 붙잡았다.
“왜?”
“전 괜찮아요.”
“지금 네 얼굴을 거울로 보고 그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군. 넌 지금 전혀 괜찮지 않아.”
“하지만…….”
라일라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르미에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주머니도 쳐다보았다.
그 표정과 눈짓에서 르미에르는 라일라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걱정하지 마. 아이에게는 아무 해가 없는 약이야. 네가 황태자궁에 있을 때 먹었던 것과 똑같은 진통제를 구했어.”
아이에게 해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라일라는 르미에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사실은 아직도 아팠다. 하지만 르미에르가 있어서 겨우 참고 있는 것이었다. 아프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가 자신을 도와주었던 것을 후회하고 철회할까 봐 두려웠다.
조금만 있으면 정말 아기가 나올 것만 같은데 이제 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여기, 물.”
라일라는 르미에르에게서 물을 받고, 진통제를 삼켰다. 약효가 돌려면 조금 더 있어야겠지만, 라일라는 자신은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살짝 웃었다.
“여기서 지낼 만은 한가?”
르미에르의 질문에 라일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군.”
르미에르도 라일라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
“저기…….”
먼저 입을 연 것은 라일라였다.
“아이의 이름을 생각해 봤어요.”
“이름?”
르미에르가 되묻자 라일라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입양을 가면 양부모가 다시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라도 불릴 이름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이름은 뭐로 하려고?”
“플로랜스요.”
“플로……랜스?”
르미에르는 그 이름이 플로라에게서 따온 것임을 단박에 눈치챘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라일라를 봐서도 그랬고, 자신이 그 이름을 부르자 이상한 감정이 샘솟는 것도 그랬다.
“이 집에선 이상하게도 혼자라는 느낌이 안 들어요. 특히 아플 때면, 꼭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라일라는 정말로 누군가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옆을 쳐다보았다. 르미에르도 자연스럽게 라일라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저 허공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빙그레 웃었다. 꼭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미소 짓는 것처럼.
“아까 아플 때도 그랬어요. 혼자가 아닌 것 같았고, 누군가 저와 아기를 지켜 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랬군.”
“제가 아기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도 될까요?”
“물론이지. 네 아이의 이름인걸. 나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어.”
르미에르는 자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마음이 따뜻한,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나면 좋겠어요.”
라일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소망했다.
“그래.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르미에르 또한 그렇게 소망했다.
“플로랜스.”
르미에르가 작게 중얼거린 이름은 마치 휘파람처럼 익숙하고 맑은 음률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된, 그리고 자주 불렀던 이름처럼.
“좋은 이름이야.”
르미에르는 다정한 눈빛으로 라일라의 배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 플로랜스가 있었다.
드디어 오늘에서야 르미에르는 플로라가 남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플로라가 남기고 간 생명이 있었고, 바로 여기에 플로라가 남기고 간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