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라일라…….”
달리는 말 위에서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수도로부터 남서쪽에 위치한 루웰린 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곳에 남작인지 자작인지, 어쨌든 거의 버려진 귀족의 낡은 별장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웬 임산부 하나가 얼마 전부터 그곳에 혼자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자가 전해 준 소식에 비오스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길로 바로 말을 몰아서 루웰린으로 출발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재규어로 단번에 달려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말을 선택한 비오스트였다.
밤낮으로 말을 타고 달려온 병사는 가엾게도 길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다시 출발해야 했고, 수리나 나머지의 수행원들도 서둘러서 비오스트의 뒤를 따랐다.
“저쪽입니다!”
갈림길에서 비오스트가 잠시 주춤거리자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뒤를 돌자 그가 오른쪽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고, 비오스트는 그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달렸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길도 잘 모르면서 비오스트는 선두에 서서 달렸고, 갈림길에서 그가 주저하는 사이 뒤쪽의 사람들이 겨우 그를 따라잡는 모양새였다.
그만큼 비오스트는 조급했다.
“젠장!”
갑자기 후드득거리며 비가 쏟아지자 비오스트의 입에서는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땅이 진흙탕이 된다면 속도가 더욱 늦어질 것이 뻔했다.
“이랴!”
비오스트는 더욱 말을 재촉했다.
“빌어먹을!”
얼마나 비를 뚫고 달렸을까?
급한 비오스트를 비웃기라도 하듯, 또 갈림길이 나왔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앞은 갈림길. 게다가 뒤를 돌자 얼마나 앞서 달린 것인지 수행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워워!”
결국, 어쩔 수 없이 비오스트는 말을 멈춰 세웠다.
“전하!”
수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비가 오니 멈추었다가 가자는 멍청한 소리를 하면 당장 저 새끼의 입을 찢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으며 비오스트는 뒤를 돌았다.
“잠시만요, 전하!”
오냐. 잘 걸렸다. 네가 네 명을 재촉하는구나.
비오스트는 눈을 번뜩이며 제 곁으로 다가오는 수리를 쳐다보았다.
“말이 쓰러졌습니다.”
“말이?”
“네.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던 병사의 말이 쓰러졌습니다. 아무래도 쉬지 못하고 계속 달린 데다가 비까지 오고 있어서 더 버티지 못한 모양입니다.”
뒤쪽을 쳐다보자 일행들이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잡이 없이는 힘듭니다. 비가 와서 시야도 어두운 데다가 그가 이쪽 지방 출신이라 지도에는 없는 지름길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너, 내려.”
“네?”
“그가 꼭 필요하다며. 나불거리는 시종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니 네 말을 그에게 주고, 넌 걸어서 와.”
“어딘지 알아서 걸어서 갑니까?”
“루웰린이라며!”
비오스트는 수리와 대거리를 하는 이 시간도 아까워서 버럭 짜증을 냈다.
“아, 알겠습니다. 뒤는 어찌됐든 수행원 하나를 낙오시키고 그의 말을 태우도록 하죠. 하지만 본인 말이 아니라 지금보다 속도는 더디 날지도 모릅니다.”
“닥치고 빨리 출발이나 해.”
비오스트는 더 말대꾸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른쪽, 왼쪽?”
비오스트는 길잡이 역의 병사가 말을 바꿔 타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네?”
“저 앞. 어느 쪽이냐고.”
“오, 오른쪽입니다.”
“이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오스트는 이미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랴!”
비오스트는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 속도를 내고 있는 말을 더욱 재촉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제 성에 찰 만큼 말이 빨리 달릴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랴! 이랴!”
라일라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녀를 품에 안기 전까지 비오스트는 멈출 수가 없었다.
* * *
뜨거운 김이 비오스트의 어깨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의 실신 직전인 그의 말은 마당 한쪽에 매여 그제야 겨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차가운 비가 말의 몸을 때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하아…….”
비오스트는 제 앞에 있는 저택을 보며 허연 숨을 내뱉었다.
라일라를 처음 본 날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때도 자신은 이렇게 흠뻑 젖어 있었고, 운명과 같은 향에 이끌려서 숲을 헤매다 라일라를 발견했었다.
“흐읍-”
빗속에서 비오스트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비릿한 비 냄새 사이에서 라일라의 향을 느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 냄새가 너무 진해서일 수도 있었고, 라일라의 향이 너무 옅어져서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라일라의 향은 매우 옅어져 있었다. 마치 쇠약해진 라일라의 상태를 반영한 것처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강하고 관능적인 향은 맡을 수 없었다. 반항적이었고 경계심 어린 살아 있는 눈도 더는 없었다.
그저 가녀리고,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이 연약한 향기와 모든 것을 포기한 슬픈 파란 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라일라…….”
비오스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방금 부른 이름의 주인이 저 안에 있기를 바라며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똑똑.
그의 주먹이 나무 문을 두드리자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안은 조용했다.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반응은 없었다.
이것 또한 그날과 똑같다고 비오스트는 생각했다.
똑똑.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나, 애걸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라일라가 달아날 수도 있으니까.
자신의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라일라가 다시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다시 지옥 같은 기다림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끼이이익.
사용하지 않던 별장이라더니, 비오스트가 문을 열자 듣기 싫은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난로를 피워 둔 것인지 따뜻한 공기가 훅 비오스트를 덮쳤다. 그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발을 안으로 들였다.
“라일라?”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는 비오스트의 목소리는 빗물에 푹 담갔다가 뺀 것처럼 젖어 있었다.
* * *
“비가 오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 좋아하니, 아가야?”
라일라는 웃으면서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안다면, 네가 좋아하는 것을 넣어서 이름을 지을 수 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별이라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실이 말하기론 온라이언의 핏줄은 왜인지 몰라도 사내아이밖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뭐가 좋을까? 다니엘? 코웰? 윈커스?”
라일라는 몇 되지 않는 자신이 읽었던 동화책의 주인공 이름을 몇 개 떠올렸다. 다 상냥하고, 착한, 그리고 용감한 아이들이었으니 태어나는 아이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어때? 네 마음에 드는 이름이 있니?”
다 마음에 든다는 것인지, 혹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인지, 조용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대화는 항상 라일라 혼자 일방적이었다.
문득 한기를 느낀 라일라가 살짝 몸을 떨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좀 춥네. 오늘을 불은 좀 일찍 피워야겠어. 우리 불을 피워 놓고 네 이름을 다시 생각해 보자.”
다정하게 아이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라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로에 마른 장작을 집어넣고, 불을 올린 김에 차도 한잔 마실까 해서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아……!”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라일라는 들고 있던 차 통을 떨어뜨렸다. 마른 찻잎이 바닥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예고도 없이 통증이 찾아왔다.
“으읏!”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배를 감싼 채 라일라는 침대로 향했다. 그동안 그녀의 배는 더욱 커져 있었다.
간신히 침대까지 온 라일라는 그대로 그곳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라일라는 날짜를 셈했다.
처음 통증이 찾아오고 나서, 그다음에는 일주일 만에 다시 아파졌었다. 그다음에는 6일이었고, 그다음은 5일 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4일 만이었다. 황태자궁에 있을 때, 그러니까 비오스트가 신관과 마법사, 그리고 황실의원까지 동원하기 전에는 보통 3~4일 주기로 통증이 찾아왔었다.
그러니까 그때와 비슷한 주기가 되었다면, 아마도 이제 몸에서 마법의 기운은 거의 다 빠져나간 것일 수도 있었다.
“으윽!”
오늘따라 더욱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며 라일라는 몸을 뒤틀었다. 아니, 오늘따라가 아닐지도 몰랐다. 원래 통증은 점점 심해지지 않았던가?
그저 잠시 그 시간이 늦춰졌던 것뿐. 이것이 정상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견디지 못하는 시간이 오면, 그때는 끝이었다.
“하아…… 하아…….”
잠시 고통이 사그라들었을 때, 라일라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웠다. 눈을 너무 질끈 감아서인지, 아니면 아픔 때문에 눈물이 맺혀서인지 눈앞이 흐릿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을 해 버리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라일라의 눈에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누구……?”
혼미한 정신과 뿌연 시야 탓에 라일라의 눈에는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소피?”
아니다. 소피치고는 너무 컸다. 게다가 그 실루엣은 남자가 분명했다.
“비오……스트?”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던 이름이 불쑥 라일라의 입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