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66화 (66/88)

66.

시간을 흘렀다. 아무런 성과도, 단서도 찾지 못한 채로 말이다.

“쓸모없는 것들!”

비오스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졌다. 수리의 눈앞에 수많은 종이가 하늘하늘 춤추듯이 흩날렸다.

황태자의 집무실 책상 위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서류밖에 없었다. 오래된 장인이 만들었다는 화병은 이미 산산이 깨어진 지 오래였고, 도장과 인장이 담겨 있던 나무함은 라일라가 사라진 밤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한 경비병의 이마를 찢어 놓으며 부서졌다.

그 외의 것들도 전부 벽에 부딪히거나, 바닥에 부딪혀서 책상 위에서 사라졌다. 수리는 그것들을 굳이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지 않았고, 부서진 것들의 대체재를 굳이 새로 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다가는 언제 비오스트가 집어 던질지 몰랐고, 어차피 또 부서질 것이었으며, 굳이 새로운 물건을 들여놓았다가 거기에 자신의 이마가 찢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일라 님은 찾지 못했지만, 그날 밤 그 방에 있었던 남자가 황제 폐하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그걸 알아내서 뭐에 쓰게? 당장 폐하를 찾아가 떼라도 쓸까? 너 때문에 라일라가 없어졌다고 말이야.”

비오스트의 말에 수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 남자가 황제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변하는 것은 없었다.

라일라는 여전히 이곳에 없었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대체 어디로 숨은 것일까요?”

머리뿐만이 아니라 지금 비오스트의 모습은 이전의 단정한 황태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리의 말에 이번에는 비오스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인상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을 뿐이었다. 그의 손가락에 걸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예전처럼 관리된 결 좋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모습이 아니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 밑은 시꺼멓게 변해 있었고, 며칠째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수염이 돋아난 데다가 피부마저 거칠고 푸석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전의 그와 다른 점이라면 바로 눈이었다. 귀한 보석같이 빛나던 금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핏발이 서 있었다. 게다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의 비오스트를 누군가가 본다면, 감히 그가 미쳤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결코 제정신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어차피 그가 황제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퀭한 눈이 날카롭게 허공을 응시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이니 내가 뭘 하는지도 알았을 테지.”

사실, 그것에 대해서라면 방비하고 있던 비오스트였다. 이미 황제가 라일라를 데려가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비밀장소까지도 미리 알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라일라가 제 발로 사라질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비오스트였다. 그것이 그의 불찰이었다.

라일라가 자신을 떠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수도에 숨은 게 아니라, 이미 빠져나간 것일 수도 있지. 그래서 수도에서는 더는 못 찾는 거야.”

“온라이언 대공 전하께서 라일라 님을 데리고 간 것이라고 해도, 대체 어떻게 수도를 빠져나간 걸까요? 분명 그날 밤, 수도를 빠져나간 마차는 없었습니다. 걸어서 나간 사람 중에도 임산부는 없었고요.”

“확실해?”

“네. 뒷돈을 주고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어 수도로 나가는 문을 지켰던 경비병들의 뒷조사를 해 보았지만, 특별한 구석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변장을 잘했다고 해도 임산부의 배는 숨기기 어려웠을 터라 분명히 수도 안에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대공이라면 가능해.”

“네? 어떻게요?”

“담을 넘으면 되지.”

“담을요? 대공님은 그렇다 쳐도, 임산부인 라일라 님이 높은 수도 성벽을 오르는 것을 불가능할 텐데요?”

“그럼 업고 갔겠지.”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도 그건 힘들 겁니다. 라일라 님이 가벼운 편이긴 하나, 임산부라서 업고는 무리이죠. 그렇다고 안고 가기에는 손을 쓸 수 없어서 힘들 테고요.”

“아니. 가능할 거야.”

수리의 말대로 사람이라면 그게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가능했다. 재규어로 변신한다면 말이다.

도움닫기만 충분하다면 성벽쯤이야 한 번에 오를 수도 있었다. 라일라가 임산부라지만 잠깐 재규어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것쯤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능하다면, 르미에르도 가능했다.

비오스트는 눈을 빛내며 성큼성큼 한쪽 벽으로 다가섰다. 그곳에는 온라이언 제국의 영토를 표시해 놓은 지도가 걸려 있었다.

“세실이 마지막으로 라일라를 본 시간이 언제라고 했지?”

“밤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입니다.”

아마 황제가 보낸 자는 세실이 나가고, 라일라가 자리에 누운 뒤에도 그녀가 잠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궁의 다른 이들도 잠이 들기를 기다렸겠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라일라의 방에서 약간의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비오스트는 라일라가 10시쯤에 떠났다고 보기로 했다. 넉넉하게 시간을 잡는 것이 나았다.

자신이 르미에르를 대공저에서 만난 것은 저녁 6시쯤이었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은 20시간이었고, 라일라를 어느 곳에 데려다 놓고 돌아온 것이니 편도로는 최대 약 10시간쯤 걸린 셈이었다.

‘10시간이라…….’

비오스트는 가만히 지도를 노려보았다.

10시간이면 재규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수리, 수색 반경을 넓힌다. 찾을 곳은 여기서부터, 여기. 작은 마을 중심으로 찾아봐. 임산부라 눈에 아주 잘 띌 테니 수소문해 보면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임산부인 라일라에게는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냥 임산부가 아니니 더욱 그렇다는 것을 르미에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 사람을 붙여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오스트가 자신을 의심할 것 정도는 르미에르도 알았을 테니, 대공저의 하인 중의 하나가 라일라에게 향하는 순간, 비오스트가 사람을 붙일 것을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라일라가 있는 곳 근처에서 누군가 돌봐 주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곳일 거고, 그렇다면 마을 정도는 있는 곳일 거라고 비오스트는 짐작했다.

“너무 넓지 않습니까? 혹여 수도를 잘 빠져나갔다고 하더라도 임산부인 라일라 님은 긴 여행이 힘드실 겁니다. 지금 전하께서 말씀하신 범위는 마차로 거의 3일은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찾아봐.”

비오스트는 수리에게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라일라가 사라진 지 벌써 며칠이 지났고, 지금쯤이면 그녀의 몸 안에서 작동하고 있던 마력이 사라져 갈 때가 다되었었다.

그렇다는 것은 라일라가 다시 죽어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어딘가에 라일라가 있어.”

* * *

“아!”

오랜만의 통증이었다.

라일라는 소피가 만들어 준 스튜를 데워 먹으려다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게 맞나 싶어서 잠시 눈을 깜박이며 서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라일라의 배 안을 마구 할퀴고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전과 똑같은 통증이었다.

“그래……. 아가야. 너구나.”

고통 속에서도 라일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으읏!”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고통에 라일라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삽시간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라일라의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라일라는 이마저도 반가웠다.

“그래. 아가야. 곧…… 만나게 되겠구나.”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는 것은 라일라의 몸이 다시 제 시간을 찾기 시작했고, 아기가 다시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흑!”

다시 배를 쥐어짜는 듯 같은 통증에 라일라는 비명과 같은 신음을 흘렸고, 아예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밖은 천천히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고, 라일라에게는 천천히 고통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주 긴 밤이 될 터였다.

* * *

하루하루 비오스트 미쳐 갔다.

마을을 뒤졌으나 라일라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나씩 받을 때마다 그는 미쳐 갔다.

눈 그림자는 더욱 까맣게 변했고, 움푹 패어 갔다.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외모는 꺼멓게 죽어 갔다. 흡사 고치지 못할 병을 얻은 환자나 폐인을 연상케 했다.

쾅!

“아직도 못 찾았단 말이냐!”

퀭한 안색과는 달리 힘은 아직도 넘치는지, 그가 책상을 내려치자 옆에 있던 사람이 움찔할 만큼 큰 소리가 났다.

“찾고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수리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피곤해서 죽는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님을 수리는 확실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일주일 안으로 라일라를 찾지 못하면 자신은 과로사 당할 것이 확실했다. 아니, 일주일도 길었다.

5일. 딱 5일만 더 이렇게 일을 하면 자신은 죽을 것이 확실했다. 분명 저 독한 황태자 새끼는 그것보다 더 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니, 불쌍한 자신만 먼저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수리는 그게 억울했다.

“하지만 못 찾았지.”

그래. 저 눈깔.

눈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저 눈깔이 제일 수리를 미치게 했다. 겨우겨우 잠이 들려고 해도, 미친놈 같은 눈깔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지금 잠이 쳐오냐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어디 어딜 찾은 거지?”

“말씀하신 반경에서 동쪽은 산간지방인지라 마을이 그리 많지 않아 탐색이 끝난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동쪽의 인력을 가까운 북쪽으로 합세하여 북쪽 역시 거의 끝나 가고 있습니다.”

“그럼 남과 서는?”

“그쪽은 절반 정도 진행이 되었습니다.”

“더 빠르게 진행하도록 해.”

“물론 저도 그러고 싶지만, 작은 마을 단위로 훑는지라…….”

“더 빨리라고 했어.”

“네, 전하.”

수리는 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대답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더 빨리할 수 없다고 말해서 혼이 나나, 더 빨리하지 못한다고 혼이 나나, 어차피 결말은 자신이 혼이 나는 것으로 귀결될 테니 말이다.

“전하!”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감히 무례하게 노크도 없이 황태자의 집무실 문을 연 자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헉헉거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급해 보였다.

“차, 찾은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비오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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