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해가 뜨려는 모양이었다.
희뿌연 새벽의 빛이 천천히 세상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아?”
작고 낡은 오두막 앞에서 르미에르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칠흑 같은 밤을 방패 삼아 재규어로 변신해서 라일라를 등에 업은 채, 밤새도록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그였다. 지난밤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로 르미에르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가 정말로 이 오두막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싶은 것인지를.
“네. 후회하지 않아요.”
밤새 빠르게 달리는 르미에르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누군가 쫓아와 잡히는 것은 아닐지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채 밤을 꼴딱 새운 라일라 역시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하지만 대답하는 라일라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전 이 아이를 낳을 거예요.”
라일라의 확고한 대답을 들은 르미에르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알았다는 대답 대신 르미에르는 언제나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던 열쇠 하나를 꺼내 오두막에 걸어 놓은 자물쇠를 열고, 문을 열었다.
청소한 지가 꽤 되어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지만,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이 제법 갖춰져 있는 오두막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어. 해가 뜨면 사람을 시켜 청소해 주도록 할게.”
르미에르는 먼지가 쌓인 의자를 빼서 아무렇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낡고, 오래된 오두막이었다. 안에 있는 가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서진 것 없이 잘 관리하긴 했지만, 낡고 오래된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물론 라일라가 살았던 발렌시아의 오두막보다는 좋았다. 거기는 거의 쓰다 버리려는 것의 집합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공인 르미에르의 소유라고 하기에는 그 격이 맞지 않았다.
“여긴 대공님의 소유인가요?”
“내 소유는 아니야. 하지만 온라이언 황실 소유도 아니야. 그들은 모르는 곳이지.”
“하지만 열쇠를 대공님께서 가지고 계셨잖아요?”
“이 오두막은 주인이 없이 방치된 곳이야. 나는 가끔 생각나면 와서 둘러보고, 차를 한잔 마시고, 그러고 돌아가지.”
르미에르는 라일라의 질문에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장의 문을 열자 이가 빠졌긴 하지만 제법 쓸 만한 티팟이 보였다. 그것과 함께 짝이 맞지 않는 컵 두 개를 꺼내고, 옆에 놓인 차통도 꺼냈다. 르미에르가 즐겨 먹는 홍차를 직접 가져다 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일, 주로 라일라에 관한 일들로 바빠서 오두막을 꽤 오래 찾지 못했었다. 홍차는 이미 향이 날아가 버린 지 오래된 것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밤을 새운 두 사람에게는 맛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테니.
“원래 주인은 누구였는데요?”
물을 끓일 준비를 하던 르미에르는 라일라의 질문에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불을 피우고, 물을 올렸다. 그것들을 준비하며 르미에르는 아주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플로라.”
뒤를 돌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닮은 라일라를 보며 르미에르는 천천히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여긴 플로라가 황궁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곳이야.”
“플로라라면…….”
“그래. 비오스트의 친모이지.”
그의 말에 라일라는 새삼스럽게 다시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비오스트를 낳아 준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살아갈 곳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플로라는…….”
르미에르에게 플로라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이름을 부르면 어딘가에 플로라가 살아 있는 것만 같은 마음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플로라’라고 부르면 그녀가 웃으며 다가올 것만 같아서 심장이 아려왔다.
분명, 그녀가 죽어 있는 모습을 직접 본 르미에르인데도 자꾸만 그렇게 착각하게 되었다.
“플로라는 아름다웠어.”
티팟 안에 홍차를 넣으며 르미에르는 말했다.
“상냥했고, 착했지. 그리고 미소가 예뻤어.”
어느새 물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르미에르는 주전자를 꺼내 잠시 티팟 옆에 두었다.
“라일라.”
물이 약간 식기를 기다리며, 르미에르는 라일라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질문했다.
“지금쯤이면 비오스트가 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넌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르미에르의 말에 라일라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분은 어떠셨어요?”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플로라 말이야?”
“네.”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너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왜 자신이 아니라 아이를 택하느냐고요.”
“내가 그런 말까지 했던가?”
“네. 그러셨어요. 그분도 저와 같은 선택을 한 거죠?”
“그래. 플로라도 자신의 의지로 비오스트를 낳았지.”
“그분은 후회하셨던가요? 자신이 아니라 아이를 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 것 같으셨나요?”
라일라의 질문에 르미에르는 잠시 생각했다. 플로라가 후회한 적이 있던가?
“…….”
없었다.
그녀는 제가 모든 진실을 알려 주었을 때, 놀라고 충격받고 슬퍼하긴 했지만 결국 웃었다. 슬프게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자신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웃었고, 배 속의 비오스트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작고 귀여운 모자를 뜨고, 손바닥만 한 옷을 만들며 아기가 태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아이가 태어나면 숙부인 르미에르가 자기 대신 잘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했었다. 그녀의 마지막 삶은 모두 비오스트를 위한 것이었다.
플로라는 단 한 번도, 비오스트를 낳기로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플로라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
“저도 그래요.”
라일라는 저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전, 비오스트를 행복한 황태자님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귀족 도련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문득 비오스트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거센 비바람에 흠뻑 젖은 비오스트. 처음으로 들은 상냥한 말들, 다정한 미소, 배려 깊은 행동까지도.
모든 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라일라는 행복했다. 거짓이래도 라일라는 처음 받아 본 것들이었다.
“그런데 행복한 황태자님은 이상하게도 가끔 눈이 슬퍼 보였어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영혼은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이었죠.”
마치 덫에 걸린 짐승 같은 눈이라고 라일라는 생각했었다. 너무도 강하지만, 그런 강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니, 이제야 그 사람이 왜 그런 눈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아요.”
“왜 그렇지?”
“그는 정말로 슬프고, 상처를 받았으니까요. 절대 아물지 않을 상처가 있으니까요.”
라일라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비오스트의 상처를 자신이 치유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오만하게도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그가 자신에게 애정을 주어 라일라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듯, 자신도 비오스트에게 사랑으로 그의 상처를 낫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비오스트가 라일라에게 준 것은 거짓 애정이었지만, 그래도 라일라의 상처는 회복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오스트를 사랑할 수 있었고, 아기를 사랑할 수 있었다.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존재를 인정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이죠.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비오스트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러니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슬플 수밖에요.”
비오스트는 태어났을 때부터 슬픈 운명의 아이였다. 그러니 라일라가 그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일라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슬픈 운명의 아이였으니, 그의 슬픔을 알아보았고, 운명처럼 그에게 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아이가 죽게 되면, 비오스트는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아이까지 죽인 사람이 되겠죠. 더 많은 상처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난 그를 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라일라는 배를 쓰다듬었다. 사랑해서 낳을 것이지만, 이 아이 역시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나는 운명을.
그러면 이 아이 역시 비오스트같이 슬픈 눈을 가지게 될지도 몰랐다. 라일라는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공님.”
라일라는 고개를 들어 르미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잔혹한 진실을 알려 준 것이 선의였다는 것을 라일라는 알았다. 여기까지 자신을 데리고 도망쳐 준 것도 전부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르미에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라일라가 유일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제 부탁을 하나만 더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뭐지?”
“아이가 태어나면, 전 이미 이 세상에 없겠죠?”
“……그렇겠지.”
“그럼 이 아이를 거두어 평범한 집에 입양 보내 주시겠어요?”
라일라는 부드럽게 제 배를 쓰다듬었다. 아주 소중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집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아이가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으면 해요.”
그 모습을 상상하며 라일라는 살짝 미소 지었다.
태어난 아기는 아주 사랑스러울 것이다. 작은 손과 발은 앙증맞고, 앙앙 우는 목소리는 귀여울 것이다. 반짝 미소라도 지으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일 거라고, 라일라는 상상했다.
자신은 한 번도 볼 수 없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