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도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르미에르는 자신의 손을 잡은 라일라의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마치 그대로 두면 라일라가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을 칠 것 같아서였다.
“여기 있으면 안전할 거야. 비오스트가 널 살릴 방법을 찾고 있고, 나 역시 널 도울 테니까. 시간이 좀 늦었긴 하지만, 그래도 안전한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은 찾지 않아도 돼요. 그런 건 관심 없어요.”
라일라는 또렷한 시선으로 르미에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울먹이던 라일라는 없었다.
“아까 말씀하셨죠? 황제는 날 데려가서 아이를 낳게 하려는 거라고. 그럼 비오스트는 내가 아이를 못 낳게 하려는 거죠? 그렇죠?”
그제야 라일라는 자신의 손발이 찬 이유를 알았다. 제가 컨디션이 좋은 이유를 알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배 속의 아이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신관이나 마법사가 자신의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으니까.”
“전 싫어요.”
라일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눈은 르미에르에게 고정한 채였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게 뭔데요? 이미 생긴 아이를 어떻게 낳지 않을 수 있냐고요. 방법은 하나뿐이잖아요.”
“…….”
르미에르가 선뜻 입을 열지 못하자, 라일라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다는 것을 더욱 확신했다.
그들은 아이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전 이 아이를 낳고 싶어요. 아이를 죽일 수는 없어요!”
“몇 번이나 말했잖아, 라일라. 네 몸은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아이를 낳으면 넌 죽고 말 거야.”
“상관없어요.”
라일라는 르미에르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난 한 번도, 간절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과거의 라일라는 물론 그랬었다. 숲속 오두막의 라일라는 단 한 번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매일매일, 죽음을 기도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적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한때는 라일라도 삶을 꿈꾼 적이 있었다. 비오스트의 곁에서 행복이라는 꿈을 잠시 꾸었었다.
비록 산산이 부서져 조각나 버린 꿈일지라도 라일라도 꿈은 꾸었었다.
“라일라…….”
“나 말고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 그게 나아요.”
“그럴 수는 없어.”
르미에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잡고 있던 라일라의 손마저도 뿌리쳤다.
“제발요.”
하지만 라일라는 얼른 르미에르의 손을 다시 붙들었다.
“절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널 살리는 것을 돕고 싶다는 거였어.”
“이 아이를 살리는 게, 절 살리는 거예요. 이 아이는 제 목숨과도 같아요.”
라일라는 르미에르의 손을 끌어다가 제 배에 가져다 대었다.
“여기에 생명이 있어요. 작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예요.”
르미에르는 라일라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라일라는 완강하게 그의 손을 붙들었다.
“제가 이 아이에게 생명을 줬어요. 죽일 수 없어요.”
“플로라…….”
르미에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라일라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와 무척이나 닮아 있는 사람의 것이기는 했다.
‘난 이 아이를 낳을 거야.’
그가 플로라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을 때, 플로라도 똑같이 말했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르미에르, 넌 아직 어려서 몰라. 아니, 남자라서 모를 수도 있어. 엄마는 그런 거야.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줄 수 있어. 내 생명까지도.’
그 말을 할 때의 플로라는 참으로 아름다웠었다. 르미에르가 처음 본 순간 반해 버린 그때보다도, 그를 향해서 환하게 웃어 주었을 때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다.
‘내가 그 사람과 사랑을 했다는 증거야. 난 그냥 죽는 게 아니야. 내 사랑을 남기고, 내 생명을 남기는 거야.’
아름다워서, 너무나 아름다워서, 르미에르는 그녀를 더 붙잡을 수가 없었다.
“너희는 어떻게 그렇지?”
이제 울고 있는 것은 르미에르였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어린 르미에르는 플로라의 앞에서 울었고, 다 자라 어른이 된 르미에르는 라일라의 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왜 너 자신이 아니라 아이를 택하는 거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사랑하고 지켜 주고 싶은 존재들은 제 목숨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작은 생명체를 택하는 건지, 왜 이토록 죽음에 초연한지, 그리고 왜 이렇게도 아름다운지.
“사랑하니까요.”
라일라는 손을 들어 르미에르의 눈가에 눈물을 닦아 주었다. 스치는 손은 분명 차가웠지만, 따스했다.
“이 아이가 내 안에 자리를 잡은 순간부터,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르미에르는 고개를 들어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법이죠.”
사람이란 어리석은 것이었다.
과거를 후회하고, 후회해도, 똑같은 상황이 되면 또 똑같은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 널 도와줄게.”
* * *
탁.
그게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비오스트는 책상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었다. 그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결정을 내렸다.
“…….”
비오스트는 자리에서 일어서 윗옷도 집어 들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전하, 어디 가십…….”
수리가 말을 걸었지만, 그는 본 척도 않고 그대로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성질 나쁜 황태자 전하께서 그러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수리는 그저 헐레벌떡 그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얼른 연락해서 침실……은 아니로군요.”
황태자의 침실이 있는 쪽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오스트가 몸을 틀자, 수리는 얼른 제가 했던 말을 주워 담았다.
“아! 라일라 님께 가시는 건가요?”
비오스트가 아예 문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수리는 그가 어디로 가는 건지 깨달았다. 본궁에 처박혀서 고문서만 들여다보고 있던 비오스트가 여길 나가서 갈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자신은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 고문서들을 밤낮으로 보고 있던 비오스트에게 수리는 질문했다.
“대충.”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수리는 그래도 대답해 준 것이 어디냐 싶은 생각이었다.
“다행이네요. 역시 고문서에 답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수리는 넘겼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방법을 찾았다는 데에 있었고, 그 말은 비오스트가 더는 자신에게 히스테릭하게 굴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라일라를 구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그 멍청한 대가리는 왜 달고 다니냐거나, 피곤해서 졸고 있으면 영원히 눈을 감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협박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되었다.
‘뭔지 몰라도 좋네, 좋아.’
비오스트의 뒤를 쫓으며 수리는 싱긋이 웃었다.
드디어 밤에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식사도 책을 보며 허겁지겁 먹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서 느긋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라일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빠 보이면 마탑이며 신전으로 뛰어다닐 일도 안녕이었다.
이제 편안하게 수리가 선호하는 실내에서 내근직으로 쾌적한 근무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아, 물론 성질 나쁜 상사는 그대로이겠지만.
“…….”
비오스트가 수리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그가 지금 제 생각에 갇혀 있어서였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결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확실히 실현 가능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미친 짓일 것이다. 아마도 비오스트의 계획을 누군가가 듣는다면, 분명히 그에게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이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라일라를 잃게 될 것이다. 더불어 비오스트 자신도 위험했다.
황제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비오스트를 온전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혈통에 집착하는 인간이니 곧바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사지를 절단당하고, 오직 짐승처럼 교배에 필요한 기관들만 남겨 둘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처단당할 것이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이런 위험한 짓이 아니라. 조금만 버티면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어.’
황제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폐병은 신관도 낫게 하지 못했다.
우습게도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말하고, 성스러운 신의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인간과 똑같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면…….
‘아니,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다른 목소리가 비오스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이 그렇게 수월하게 될 수 있다면, 진작에 기다렸을 것이다. 시골구석에서 라일라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녀를 임신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하지 않았으면, 황제가 했을 것이다.
그가 손수 발렌시아 남작령으로 내려가서 숲속에서 라일라를 찾아내, 자신과 똑같이 사탕발림하고, 눈속임으로 그녀를 꼬여내, 결국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고 말았을 것이다.
비오스트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무슨 짓을 꾸밀지 알 수 없었다.
‘라일라!’
게다가 라일라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비오스트는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었다.
황제의 자리가 아니라, 권력이 아니라, 힘이 아니라, 아이가 아니라, 라일라를 선택했다.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참회하며, 사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만약 라일라가 자신을 용서해 준다면, 그녀에게 고백하리라고 생각했다.
너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라일라!”
비오스트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라일라?”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그저 텅 빈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