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해가 뜨려는 모양이었다.
희뿌연 새벽의 빛이 천천히 세상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
비오스트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라일라의 방에 서서.
처음에는 당황했다.
당연히 자고 있어야 할 라일라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욕실의 문을 열어 보고, 옷장의 문도 열어 보았지만, 라일라는 없었다.
당장 세실을 깨우고, 황태자궁에 있는 모든 인원을 깨웠다. 그리고 모든 방과 공간을 샅샅이 뒤졌지만, 라일라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찾은 것은 라일라의 침대 밑에서 꽁꽁 묶여 있는 기절한 사내였다. 비오스트는 당장 욕조에 그를 처박고, 차가운 물을 그의 얼굴에 틀어 깨웠다.
깨어난 그는 자신이 묶여 있음에 놀랐고, 떨어지는 차가운 물에 놀랐고, 자신을 죽일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황태자를 보고는 경악했다.
그리고 황태자의 칼에 열여덟 번째 찔렸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고 자비로운 죽음을 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을 고문하고 있는 이 남자의 표정에서 그런 자비는 없을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황태자의 눈에서 불같은 분노를 보았고, 얼음과 같이 차가운 냉철함을 보았다. 교묘하게 주요 혈관을 피해 죽지는 않고 고통만 주도록 그의 몸에 단도를 박아 넣는 황태자의 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며, 봐줄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
자신이 기절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전혀 몰랐다. 그저 분명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자신을 덮친 기억만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최후만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실패하고, 황태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실이 되었다.
“치워.”
피투성이의 단검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비오스트의 말에 창백한 얼굴로 고문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가 단검보다 더 피투성이인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남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오히려 그 오랜 시간을 버틴 것이 용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그가 빌어도 황태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라일라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똑같은 것을 물었을 뿐이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저자가 라일라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는 것을.
다만, 아무도 비오스트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를 말릴 수 없었을 뿐이었다. 비오스트 본인조차도 말이다.
“여깄습니다.”
비오스트가 욕실에서 나오자 수리는 들고 있던 수건을 얼른 그에게 건넸다. 비오스트가 슥슥 제 손을 닦자 흰 수건은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수리.”
“네, 전하.”
“라일라는 찾았나?”
“죄송합니다, 전하.”
사과의 말을 전하는 수리의 얼굴로 피 묻은 수건이 던져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수리의 콧잔등을 때렸다.
“세실은?”
“저, 전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비오스트가 세실을 찾자, 수리는 말을 더듬었다.
라일라가 없어졌다. 이곳에서 라일라를 돌보고 있던 사람은 세실이었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 또한 세실이었으며, 라일라가 자신의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고 보고한 사람 역시도 세실이었다.
비오스트가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세실은?”
수리가 대답하지 않자, 비오스트는 다시 물었다.
“전하, 황태자궁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조차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유모인 세실 님이 대처를…….”
짝- 소리가 커다랗게 들리며 수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짝’소리 보다는 ‘퍽’소리가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비오스트가 수리의 뺨에 날린 따귀는 그랬다.
커다란 손이 엄청난 힘으로 수리의 뺨과 귀를 한꺼번에 후려쳤다. 게다가 그것을 맞은 수리의 고개가 그대로 돌아가며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뺨을 친 것이었는데, 오히려 수리는 그것에 감사해야 했다. 주먹으로 맞았으면 자신은 분명 쓰러졌을 것이고,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더는 세실을 위해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었을 테니까.
“전하, 일단은 라일라 님을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순식간에 시뻘게진 뺨을 하고 수리는 말했다.
“당연히 찾아야지.”
그를 노려보는 비오스트의 표정은 그저 무시무시하다고만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아니면 네 목은 물론이고, 네가 좋아하는 그년의 목도 달아날 테니까.”
비오스트의 말에 수리의 입안이 바싹 말라 왔다. 그 말이 공연한 협박이 아님을 수리는 잘 알고 있었다.
“라일라를 찾아라.”
비오스트의 눈이 번뜩였다. 찾아내지 못한다면 커다란 피바람이 불 것 같은 눈이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야 한다.”
“네, 전하.”
수리의 대답과 눈짓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몰랐으니 그들이 서두르는 것은 당연했다.
다시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을 비오스트는 둘러보았다.
라일라의 옷장, 라일라의 책상, 라일라의 침대가 보였다. 희미하긴 했지만 라일라의 향기마저도 아직 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없었다.
“라일라……”
작게 라일라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조금 전과 같은 날카로움이나 번뜩임은 없었다. 그저 초조함과 애틋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 * *
“아……!”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에 라일라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피곤해서인가?”
라일라는 제가 피곤해서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피곤했다.
르미에르는 라일라를 침대에서 재우기 위해서 손수 이불의 먼지를 대충 털어 주었다. 그런 일은 해 본 적이 없는 대공전하시니 당연히 그 솜씨는 서툴렀지만, 그래도 배가 부른 라일라를 배려한 르미에르의 마음 씀씀이였다.
라일라는 그 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을 열자 청소를 해 주기로 하고 돈을 받았다는 중년의 여자가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가 오두막을 청소하는 동안 라일라는 오두막 근처를 강제로 산책해야 했다. 돌아와 보니 오두막은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앞으로 3일에 한 번씩 청소와 식사를 해 주러 오겠다고 말했다.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아휴!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이미 돈을 받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걱정 마요. 이래 봬도 내가 음식 솜씨 하나는 끝내주니까! 임산부는 그저 편안~ 하게 쉬고,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 법이지.”
여자는 단호하면서도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 그리고 옷도 이야기하던데, 어디 보자.”
여자는 라일라의 몸을 훑어보더니,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 처녀 적 옷을 입으면 되겠네.”
아무리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래도 그녀의 옷이 라일라에게 맞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길이나 품이 아무래도 클 것 같았다.
“아, 내가 소싯적에는 제법 날씬했어요. 애 다섯을 낳고 나니, 이렇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아가씨도 산후조리를 잘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임신했을 때의 부기가 빠지지를 않는다니깐?”
“아, 네.”
산후조리를 할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라일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오늘은 내가 집에 있는 빵과 달걀, 과일을 좀 가지고 왔으니 이걸 먹고, 내일은 내가 맛있는 것으로 해 줄게요. 자자~ 오늘 도착했으면 피곤할 테니, 쉬어요.”
여자는 라일라를 침대로 끌어다 앉히곤 들고 온 바구니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아, 참 참! 이름이 뭐죠?”
“라일라……요.”
습관처럼 풀네임을 말하려던 라일라는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곤 그저 이름만 말했다. 이곳에서 자신은 발렌시아 영애가 아니라 그저 라일라이고 싶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나는 소피예요.”
소피는 활짝 웃는 미소만 남기고 오두막을 떠났다. 그리고 라일라는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라일라는 피곤했다.
라일라가 다시 잠을 깬 것은 저녁 어스름이 낀 늦은 시간이었지만, 낮잠만으로는 여전히 어깨가 무거웠고 피곤했다. 임산부인 라일라에겐 밤샘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불을 피워야겠어.”
라일라는 차가운 손을 마주 비비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새벽에 르미에르가 피웠던 불이 아직 살아 있었다. 장작을 집어넣어 다시 불을 살리고 라일라는 소피가 가져온 빵을 하나 들고 그 앞에 앉았다.
얼굴에 따스한 불의 기운이 느껴졌고, 손을 뻗어 불을 쬐었지만, 라일라의 손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아주 한참을 그러고 있자 겨우 차갑지 않을 정도로 체온이 올라갈 뿐이었다.
“좀 걸리겠지.”
마법 때문인지, 신력 때문인지는 세실도 모른다고 했었다. 원래 그런 것인지 부작용인지도 몰랐다. 다만, 며칠에 한 번씩 그들이 찾아왔으니 시간이 지나면 효력이 없어지리라는 것은 라일라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라일라의 몸의 시간은 이전처럼 똑바로 흐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배 속의 아이도 정상적으로 자라게 될 일이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라일라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가야. 곧 네가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라일라는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넌 어떤 아이일까? 작은 사슴 같은 아이? 아니면 작은 토끼 같은? 아, 그래. 넌 재규어라고 했지? 그럼 넌 아주 용감한 아이일 거야.”
넘실대는 불꽃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였다.
“아주 용감한 네 이름은 뭐가 좋을까?”
비오스트에게 아이의 이름을 부탁한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만날 수 없었다. 아주 영영.
그러니 라일라는 아이의 이름을 제가 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라일라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