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61화 (61/88)

61.

라일라의 반응을 본 르미에르는 한쪽 가슴이 아파 왔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했다.

“라일라.”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거나, 뒤를 돌아 도망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방금 자신이 무력화시킨 남자도 그랬겠지만, 자신 역시 황태자궁에 숨어들어 온 처지였다. 첫 번째는 이 남자를 저지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라일라에게 할 말이 있어서였다.

지금 라일라가 소리를 쳐서 사람을 부른다면, 그는 자신의 두 번째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거기다가 오늘,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다.

“여긴 왜 온 거죠?”

라일라는 자신을 구해 준 짐승이 아니, 사람이 르미에르라는 것을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르미에르는 라일라에게 진실을 알려 준 은인임과 동시에 그녀의 행복을 깨트린 사람이었다.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라일라는 겁부터 덜컥 났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또 뭔가 있는 걸까? 더 악독한 진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라일라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네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어서.”

르미에르의 눈에 라일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잔뜩 긴장해 있는 그녀를 보며, 도서관의 그날과 비슷하다고 르미에르는 생각했다.

희미한 달빛만이 조명의 전부인 어둠 속에서 라일라는 르미에르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온라이언의 혈통으로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르미에르에게는 그녀가 똑똑히 잘 보였다.

긴장한 듯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두려운 듯 떨리는 입술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는 것도 모두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너무나 잘 보여서, 르미에르는 다시 한번 가슴이 아팠다.

결단코 자신은 라일라에게 상처 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라일라의 목숨을, 라일라의 인생을, 라일라의 삶을 구해 주고 싶었다.

과거 르미에르가 구하지 못했던 가여운 여인을 대신해서.

“이자는 황제가 보낸 사람이야.”

바닥에 쓰러진 채 기절해 있는 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르미에르는 말했다.

“황제요?”

“그래.”

뜻밖의 이름에 라일라가 되묻자, 르미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황제가 자신의 형이자, 비오스트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말해 주지 않아도 라일라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왜 자신을 납치하려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지난번에 자신을 해치려고 한 자는 비오스트가 황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에서 보낸 자라고 들었다. 그리고 그자가 왜 자신과 아기를 노렸는지는 충분히 이해했었다.

하지만 황제가 왜 자신을 노리는 건지 라일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라일라가 가진 아기는 자신의 손자인데 왜 해치려고 하는 건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분이 왜 저 사람을 보낸 거죠? 그분도 비오스트를 싫어하나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부모가 꼭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라일라였다.

“아니. 그분은 오히려 끔찍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정확하게는 자신의 혈통과 그것을 이어받을 후계자에게 굉장히 집착하는 편이지.”

“그런데 왜 저 사람을 저한테 보낸 거죠?”

“지키려고.”

“지키려고요?”

이야기는 더욱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적어도 라일라에게는 그랬다.

“누구로부터요?”

“비오스트.”

이제 이야기는 미궁을 넘어 혼란의 폭풍이 되어 라일라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자, 잠깐만요.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이해가 안 가네요.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비오스트가 절 해치려고 하고, 황제가 절 지키려고 한다는 건가요?”

“내가 헷갈리게 말했나 보군. 비오스트가 해치려고 하고, 황제가 지키려고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라일라.”

라일라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던 르미에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그를 따라서 라일라도 자신의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둥그런 곡선을 그리고 있는 제 배를.

“그래. 그 아이야.”

르미에르의 말을 들은 라일라가 퍼뜩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일라는 아직도 혼란스러웠고, 그의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저자를 시켜서 널 데려가려고 했어. 그리고 자신만 아는 궁의 어딘가에 가둬 두려고 했지. 그게 어디인지까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왜 그렇게 하는데요?”

“아까도 말했듯, 황제는 자기 혈통에 집착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그 아이를 무사히 낳는 것을 원하고 있어. 방금 네가 말했듯이 그 아이는 자기 손자니까 말이야.”

“날 가만히 내버려 둬도 난 아이를 낳을 거예요. 저런 사람을 보내지 않아도 말이에요.”

“그건 아까 말했듯이, 비오스트가 그 아기를 해치려고 하니까 황제가 널 빼돌리려고 한 거야. 자기 눈으로 널 감시하려고.”

“그것도 이해가 안 가요. 비오스트가 왜 아기를 해치려고 하죠? 이 아기를 원한 건 비오스트잖아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지금의 비오스트는 그렇지 않아.”

“왜요? 대체 뭐가 변한 거죠?”

라일라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아이만이 자신의 희망이었다. 이 아이가 태어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이 라일라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아빠인 비오스트가 아이를 해치려고 한다는 말에 라일라의 마지막 소망은 또다시 산산조각이 나려 하고 있었다.

“비오스트는 널 살리고 싶어 해.”

“……네?”

“그는 지금 아기가 아니라, 널 살리고 싶어 한다고.”

르미에르의 말에 라일라는 멍하니 서서 눈만 깜박거렸다.

자신을 속인 비오스트였다. 아기를 얻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한 비오스트였다. 아기를 얻기 위해서.

그런데 지금은 자신을 살리려고 한다고? 아기를 해치면서?

“왜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게 왜 그러는 것인지 라일라는 궁금했다.

“그가 왜 날 살리려고 하는데요?”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뛰었다.

멍청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를 죽이려 한 남자에게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인지 라일라는 아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슴은 뛰었다.

한 줄기의 희망이 제멋대로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라일라도 어쩔 수 없었다.

첫사랑이었고, 마지막 사랑이었으며, 또 오직 하나뿐인 사랑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렇게 끈질길 줄은 라일라도 몰랐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나도 몰라.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다만, 내가 아는 건 최근의 비오스트는 널 살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황제가 그것을 눈치챘으며, 그래서 널 훔치기로 했다는 거야.”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는 것은 힘들었다. 둘 다 제국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하다는 황궁에 사는 인물들이니 당연했다. 사람을 심는 것도, 정보를 빼돌리는 것도 힘들었다.

다만 르미에르에게 유리했던 점은 그 둘이 서로를 경계하느라 그 외의 것에는 조금 느슨했다는 것에 있었다. 두 마리의 사자가 싸우는 틈에 약삭빠른 승냥이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비오스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거야.”

르미에르는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라일라의 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했다. 처음과는 달리 라일라는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겁먹은 초식동물이 놀라서 달아나지 않도록, 혼란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가 울음을 터트리지 않도록, 르미에르는 아주 천천히 라일라의 앞에 섰다.

“황제로부터 널 지켜 줄게.”

먼 과거에 르미에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그때의 자신은 너무 어리고, 너무 약해서 하지 못했던 말을 르미에르는 마침내 말할 수 있었다.

“널 구할 수 있게 해 줘, 라일라.”

작은 소녀가 고개를 들어 르미에르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작은 입술은 꼭 깨물고 있었다.

“널 살릴 수 있게 해 줘, 라일라.”

르미에르는 라일라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희미한 향기가 르미에르의 코끝을 스쳤다. 처음 플로라를 보았을 때처럼 관능적인 향은 아니었다. 라일라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풍부하고 화사한 향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시들어 가고 있는 꽃에서 겨우겨우 향기 비슷한 것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처연하고도 희미한 향이었다.

르미에르는 그 향을 지키고 싶었다. 시들어 가는 꽃을 살리고, 가꾸고, 그리하여 다시 꽃을 피우고, 화사한 향기를 내뿜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무참히 꺾이고, 꽃잎은 짓이겨지고, 마지막에는 말라서 바스러지는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꽃이 생생한 향기를 내뿜는 것을 보고 싶었다.

“정말 절 도와주실 건가요?”

“그래.”

“그럼 부탁이 있어요.”

“뭐든지 말해.”

르미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입을 뗀 라일라가 뒷이야기를 잇지 못하고 잠시 멈췄다. 괴로운 결심이라도 하듯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을 감자 라일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룩 흘러내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라일라는 더는 울고 있지 않았다. 흔들리던 마음도 눈물에 씻어 내린 것처럼, 그저 빛나는 의지만이 라일라의 눈빛에 가득했다.

“절, 여기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세요.”

“……뭐?”

르미에르는 지금 라일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비오스트에게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라일라가 르미에르의 손을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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