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60화 (60/88)

60.

탁.

비오스트의 검지가 책상을 두드렸다. 책상에 부딪힌 손톱을 통해 진동이 올라왔다.

탁.

소리가 날 때마다 어른거리는 촛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탁.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삶.

탁.

그것이 그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비오스트의 눈이 방금까지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책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도 몰랐다. 그것은 낱장의 종이들을 투박한 솜씨로 엮어 놓은 것이었다.

힐끗.

비오스트의 시선이 이번에는 옆을 향했다. 그것은 확실한 책이었다. 펼쳐진 책장에는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의학용어들이 즐비해 있었다.

탁.

결정은 끝났다.

* * *

라일라는 창문 너머로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은 새끼손톱처럼 작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게다가 날도 흐린 것인지 하늘에는 별도 몇 개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보세요?”

곁으로 다가온 세실이 라일라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걸 보는 거야.”

라일라의 대답을 세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밤에는 제법 바람이 차요. 잘못하면 감기 걸리시겠어요.”

세실은 조용히 창문은 닫았다. 유리창 너머로도 어둠은 선연하게 보였지만, 라일라는 바깥을 쳐다보던 시선을 순순히 거두어들였다.

“차를 한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면 데운 우유가 좋으실까요?”

“됐어. 필요 없어.”

늦은 밤이지만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한 라일라를 위한 세실의 배려였지만,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잘 거야. 나가 봐.”

볼록 나온 배를 습관처럼 쓰다듬으며 라일라는 침대로 향했다.

비오스트가 무슨 생각으로 저에게 신관이니, 마법사니 하는 사람들을 보내는 건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그들 덕에 라일라의 요즘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손발이 찬 것은 해결이 되지 않았지만, 먹는 것도 제법 먹을 수 있었고, 가벼운 산책도 가능했으며, 아이에게 동화책도 읽어 줄 수 있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세실은 라일라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혀 주고,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 주고, 방을 밝혀 주고 있던 촛불마저 입김을 불어 꺼 주었다. 마지막으로 문까지 닫고 나가자 라일라는 깜깜한 어둠 속에 혼자 있게 되었다.

“아가야.”

아니, 아주 혼자는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아 멍하니 눈을 뜨고 모로 누워 허공만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 자신의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뭔가 이상한 밤이었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라일라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가야.”

불안한 마음에 라일라는 괜히 아이만 찾았다. 마치 아직 이름도 없는 작은 생명체가 자신을 지켜 줄 거라고 믿는 것처럼.

사실은 바로 그 아이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라일라는 그랬다. 이 아이가 자신의 모든 것이고, 자신이 태어난 이유인 것 같았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숲속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죽을 때도 혼자였을 것이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고, 죽음에도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오스트를 만났다.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

라일라는 하나의 생명을 남기고 죽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별은 희미하게 반짝이듯이.

딸깍.

잠 못 이루고 있던 라일라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라일라가 잘못 들은 것임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밤의 냄새를 실은 바람이 창밖에서 불어왔다.

라일라는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창문을 쳐다보았다. 아까 세실이 닫았던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바람에 열렸나?’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바람은 그렇게 세지 않았다. 창문이 덜컹거리지도 않았다.

라일라의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창문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누, 누구……!!”

라일라가 소리치려는 순간, 번개같이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커다란 손이 라일라의 입을 틀어막자, 나오려던 목소리는 도로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

억센 손이 라일라의 얼굴을 짓누르자 저절로 그녀의 작은 머리가 베개에 파묻혔다. 벗어나려 버둥거리자 라일라의 머리카락이 마구 엉클어지며 흐트러졌다.

“조용히 해!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네가 얌전히 따라온다면 말이야.”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라일라에게 속삭였다.

‘아가야!’

라일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제 배를 감쌌다.

이 남자가 누군지,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아기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 이야기, 알겠어?”

라일라는 눈을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복면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라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일어나.”

여전히 한 손은 라일라의 입을 틀어막은 채, 남자는 다른 한 손으로 라일라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남자의 강한 힘에 라일라는 거의 끌려 나오듯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라일라가 바닥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발을 내디뎌 비틀거리자 남자는 라일라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 내어 그녀의 몸을 받쳐 주려고 했다.

그리고 라일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일부러 비틀거려서 만든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잇!”

“윽!”

라일라는 잡히지 않은 팔을 접어, 단단하게 만든 팔꿈치로 자신을 잡은 남자의 배를 가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짧은 신음과 함께 라일라를 잡은 손을 놓쳤다.

“세실!”

라일라는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자신이 아는 한, 지금 가장 가까이에 있을 이름을 부르며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한 손으로는 제 배를 감싸고, 맨발로 찬 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그녀는 임산부였고, 부른 배로는 그렇게 빠르게 뛸 수 없었다.

“으읏!”

채 세 걸음도 지나지 않아 라일라는 남자에게 붙잡혔다. 남자는 방금 라일라에게 얻어맞은 것에 전혀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조금 전처럼 라일라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라일라를 뒤에서 잡아챘다.

“으읍!”

라일라는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가 라일라의 볼록 나온 배 아래로 자신의 팔을 두르고 그대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가벼운 라일라의 몸은 그대로 들어 올려졌고, 마른 다리는 이내 허공에 동동 떴다.

허공에 하는 발길질도, 막힌 입안에서의 비명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라일라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창문가로 향하는 남자에게 끌려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으으읏!”

대체 이 남자가 자신에게, 그리고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라일라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비오스트!!’

라일라는 간절히, 그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구해 주기를 바라며, 아이를 구해 주기를 바라며, 구원자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으억!!”

라일라가 속으로 그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검은 형체가 라일라를 덮쳤다. 아니, 그 남자를 덮쳤다.

순식간에 남자는 옆으로 쓰러졌고, 그에게 잡혀 있던 라일라 역시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몸이 부딪히는 순간, 라일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제 배를 감쌌고 몸을 비틀어 배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리고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아픔은 라일라의 어깨와 엉덩이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배가 부딪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라일라는 재빨리 바닥을 기어 방금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었던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아……. 하아…….”

그리고 제대로 쉬고 있지 못했던 숨을 몰아쉬며, 남자를 확인하려 했다. 그는 아직 쓰러진 채였다. 커다란 무언가에게 짓밟힌 채.

라일라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애썼다.

라일라의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또렷한 금색의 눈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컸고,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서 한껏 확장된 동공은 분명히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조금 전까지 자신을 납치하려던 남자를 깔아뭉개고 있는 그 형체 역시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커다란 짐승이었다.

“비오스트?”

라일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런 눈을 가진 짐승의 이름을 불렀다.

반쯤은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또 구해 준 것이기를 바라는 소망이 라일라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라일라의 구원자.

라일라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라일라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아름답고 잔혹한 구원자를 라일라는 버릴 수가 없었다.

“누, 누구야?”

하지만 어둠에 어느 정도 적응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것을 쳐다보자, 금세 그것이 비오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라일라의 눈앞에 있는 짐승은 비오스트와 같은 금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털빛은 달랐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그것은 은색, 혹은 백금색의 털을 가지고 있었다.

잔뜩 경계하는 라일라의 눈앞에서 짐승이 천천히 그 모습을 변화했다. 이전에 비오스트가 변신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털로 뒤덮인 앞발이 사람의 팔로 변하고, 네발로 걷던 짐승이 허리를 곧추세운 사람으로 변하는 광경은 그저 신기하다는 말로 끝날 장면은 아니었다.

라일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이 ‘그’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라일라.”

순식간에 사람의 형상이 되고, 주둥이가 아니라 입을 가지게 되자, 그는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그의 모습을 확인한 라일라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단어가 흘러나오다가 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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