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수리.”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온 비오스트는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리를 찾았다.
“알아보라고 시킨 건 어떻게 되었지?”
“방법은 찾고 있으나…….”
빠르게 걷고 있는 비오스트의 뒤를 따르며 수리는 살짝 말꼬리를 흐렸다.
비오스트가 수리에게 명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라일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리는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방법이 있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겠지요. 온라이언 제국의 역사와 함께 그랬다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일입니다.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여인들이 희생되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멍청한 내 조상 탓을 하라고 네게 그 일을 맡긴 게 아니야. 저 늙은이가 눈치채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돼.”
“역시 폐하께서 알아차리신 겁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는 눈치챈 모양이야.”
“그럼 큰일 아닙니까?”
“아직은 아니야.”
비오스트는 황제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머리속으로 복기하며 그가 어디까지 알아차린 것일까 가늠했다. 어쩌면 자신이 라일라를 살리려 하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라일라를 마음에 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했겠지.
아주 어쩌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힘을 가진 다음에 비오스트가 온라이언의 핏줄을 끝장내려고 했다는 것도 알아차렸을까?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지금 비오스트가 하는 일이 그것과 대척점에 있었으니 말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라일라가 죽는다는 명제를 뒤집으면, 라일라가 죽지 않으면 아기는 태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비오스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마법사를 다시 불러들여. 시간을 좀 더 끌어야겠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시간이 더 늦어집니다.”
“알아.”
“잠시만요, 그럼 계획은 뭐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더는 참을 수 없던 듯, 수리는 비오스트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그는 지금까지 미래의 온라이언 제국 황제의 오른팔을 자청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때에 막대한 재물을 비오스트에게 약속받았었다. 그의 충심이 모두 미래의 재물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또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비오스트가 하는 행동은 그 미래와는 완전히 멀어지는 일이었다.
“처음의 계획은 변함없어.”
“하지만 아이가 없으면 황제의 자리가…….”
“계획은 변하기 마련이야.”
단 한마디의 말로 비오스트는 수리의 입을 닫게 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수리를 무시한 채, 비오스트는 그를 지나쳤다.
수리의 생각에 변한 것은 계획이 아니라, 그였다.
“전하!”
수리는 다급하게 비오스트를 따라잡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래 봤자 황제의 눈을 정말로 피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이 그렇게 시켰다.
“제게는 계획을 일러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제가 기민하게 대처하지요.”
비오스트는 걸음을 멈추고 제게 계획을 말해 달라는 시종을 쳐다보았다.
그는 한 번도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모두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자신의 계획은 오로지 자신만이 완전하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세실에게 말한 것은 한 여자를 맡길 것이고, 그 여자가 온라이언의 아이를 가지게 만들 것이며,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세실이 보살펴야 한다는 것까지였다.
수리에게는 조금 더 말해 주었다. 그 아이를 이용해 자신은 황좌에 오를 것이며, 완벽한 권력을 위해서 상황이 될 지금의 황제는 해치울 것이라는 계획까지는 말해 주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자신이 이룰 수 있게 돕는다면, 수리에게 그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재물을 하사할 것이라고까지도.
하지만 그 이후의 계획은 오로지 비오스트 혼자만의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낳은 아이를 죽이고, 자신 또한 자살해서 온라이언의 핏줄을 끊을 것이라는 건 그만의 은밀한 계획이었다.
“계획이라…….”
하지만 지금의 계획을 묻는다면 비오스트는 할 말이 없었다.
대외적인 계획이든, 그만의 은밀한 계획이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정확한 계획이 그에게도 없었으니까.
계획은 변하기 마련이었지만, 어떻게 변한 것인지는 비오스트 자신도 잘 몰랐다.
목표가 변한 것만은 확실했다. 지금 그의 목표는 라일라를 살리는 것이었다.
그 슬픈 눈동자를 영원히 어둠 속에 가둬 두고 싶지 않았다. 나지막한 얕은 숨이 끊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오랜 시간 계획했던 일이 진창에 처박히더라도, 그 여자를 살리고 싶었다.
그게 지금 비오스트의 계획이었다.
* * *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떻게 해도 손발이 차가웠다. 따뜻한 이불 속에 한참을 넣고 있어도, 계절보다 이르게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 불을 쬐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손발뿐만이 아니었다. 손과 발이 유독 차가운 것이고, 몸의 다른 곳도 차갑다는 것을 라일라는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사람 손이 계속 이렇게 차가울 리가 없잖아?”
따뜻한 차에 제 손을 대고 있던 라일라가 옆의 세실을 향해서 말했다. 벌써 며칠째 지속된 대치였다.
라일라는 묻고, 세실은 회피한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 황태자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래. 바로 저렇게.
“그러니까 비오스트가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데?”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럼 비오스트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그것도 저는 모릅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굴리는 것처럼 이야기는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실은 도무지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걸 믿지 않았다. 애초에 라일라는 이 황태자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속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손이 차가워.”
따뜻했던 찻잔이 싸늘히 식었지만, 라일라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찻물을 다시 데워 드릴게요.”
세실은 식어 버린 차 대신 다시 차를 우리기 위해서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리고 라일라는 그런 세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나 세실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침착할 리가 없었다.
평소에는 자신이 조금만 몸이 좋지 않아도 부축을 해 주고, 진통제를 줄까 묻고,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꽁꽁 싸매 주던 세실이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손발이 차고, 체온이 오를 생각을 않는데도 세실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비오스트가 시킨 거라는 거지?”
“네.”
“그럼 확실한 건, 아기한테는 아무 위험이 없겠네.”
“…….”
“이렇게 내 체온이 계속 내려가서 그냥 죽는대도, 아기는 안전한 거지? 비오스트가 시킨 것이라면.”
“라일라 님…….”
라일라의 말에 세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면 뭔데?”
“체온이 낮아진 건, 정말 저도 몰라요.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말씀을 못 드리는 거예요.”
“짐작 가는 거라도 말해 봐.”
라일라가 계속 세실을 압박하자, 그녀도 더는 버티기가 힘이 든 것인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비오스트가 라일라에게 아무 말도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실이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라일라에게 말을 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지금 라일라 님의 몸 안에는 신력과 마력이 동시에 들어가 있어요.”
“신력과 마력?”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라일라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외딴 숲속에서 글자도 모르고 살던 소녀에게 신력이니 마력이니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고위 신관들은 신의 권능을 빌려 신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보통은 상처를 치유한다거나, 몸을 회복시키는 거죠.”
라일라는 세실의 설명에 비로소 자신이 그날 이후로 몸이 가뿐한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력은 보통 사람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지금은 예외의 경우라고 할게요. 라일라 님 안의 마력은 신체의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하고 있어요.”
“시간을 느리게 한다고? 그게 가능해?”
“저도 잘은 모르지만, 실제로 느린 것은 아니라고 해요. 눈속임 같은 거라고 그 마법사는 말했어요.”
세실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신나게 떠들던 마법사의 설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아들은 것이 반쯤, 못 알아들은 것이 반쯤이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가 불어넣은 마력이 라일라의 몸을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배 속의 아이가 천천히 자라나고, 라일라의 수명이 조금 더 늘어날 수 있도록.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세실의 이야기를 들은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것만은 자신도 정말 몰랐던 세실은 고개를 가로젓는 수밖에 없었다.
“물을 데워 올게요.”
세실은 차에 부을 물을 가지러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라일라는 아직도 차가운 제 손을 마주 부비며 비오스트를 떠올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빨리 다 끝나 버렸으면 좋겠는데.”
라일라는 아주 조금은 따뜻해진 것 같은 손을 배에 얹었다.
“아가야.”
조용히 아이를 불렀다. 아무 반응도 없지만, 라일라는 미소 지었다.
“네 이름은 뭘까?”
과연 내가 그걸 알고 죽을 수 있을까?
내가 한 번이라도 네 이름을 불러 볼 수 있을까?
작은 의문들이 라일라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꼭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꼭 모든 것을 알고 죽을 필요는 없었다.
째깍, 째깍.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무심히도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