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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꽃-58화 (58/88)

58.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황제의 부름에 비오스트가 그의 집무실을 찾아가자마자 비오스트의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팔짱을 낀 자세로 그는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폐하?”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의뭉스러운 비오스트의 태도에 그제야 황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녕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네가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제가 요즘 이런저런 짓을 좀 여럿 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이를테면, 블레어 백작가의 일이라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역시 네놈 짓이었군.”

비오스트가 블레어 백작가의 이야기를 꺼내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 일은 내가 자중하라고 말했을 텐데 기어코 네놈이 일을 저질렀군.”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그놈들이 제 성질을 건드리지 뭡니까?”

“그렇다고 백작가를 그 모양으로 만들어?”

“제가 뭐 한 일이 있겠습니까? 배 몇 척 좀 몰수하고, 적당히 독 좀 타 주고, 사기꾼 몇몇 좀 보냈을 뿐인 것을요.”

“블레어 백작 부인이 외국인 놈에게 푹 빠져서 남편을 암살하려 한 것은 왜 빼놓지?”

“제가 사기꾼 몇 놈을 보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비오스트는 빙긋이 웃으며 블레어 백작 부인이 바람이 난 일 또한 자신이 꾸민 일임을 자백했다. 황제는 철없는 아들을 나무라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블레어 백작가에 일어난 일은 그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비오스트가 말한 그저 배 몇 척 몰수라는 것은 마약 밀매라는 누명을 씌워 무역업을 주 업으로 삼고 있는 블레어 백작가의 배를 전부 몰수한 것이었다.

게다가 적당한 독이라는 것이 그가 암살한 블레어 백작가의 다음 후계자였던 둘째였다. 블레어 백작의 자식은 아들 둘 뿐이었고, 이제 아무도 없었다.

백작 부인은 황제가 말했듯 외국의 어느 기사와 정분이 나서 남편을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당당히 이혼을 청구했고, 자신이 가지고 온 지참금을 챙겨 친정으로 가 버린 뒤였다.

예전의 블레어 백작이었다면 당연히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만, 제 앞가림을 하기 급급한 처지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줄을 대어 몰수당한 배를 찾아 주겠다고 접근한 사기꾼에게 영지를 털어먹고, 성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접근한 사기꾼에게는 성을 날려 먹었다. 성안을 채우고 있던 고가의 가구들마저도 사기꾼이 가격을 후려쳐서 헐값에 넘기고 말았다.

비오스트가 수리에게 장담했던 ‘멸문’까지는 아직 아니었지만, ‘몰락’이라는 단어에는 매우 근접해 있는 블레어 백작가였다.

“그 정도 본보기는 보여 줘야 감히 다시는 황족에게 기어오르지 않겠지요.”

“마치 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황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구나.”

“같은 게 아니라, 그게 사실입니다.”

비오스트는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고, 황제는 그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이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도 저들이 감히 태어날 황손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한 번도 보고한 적 없었고, 황제 또한 그 일을 언급한 적이 없었지만, 비오스트는 블레어 백작가에서 라일라에게 사람을 보내 아이를 해하려고 한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황제 역시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았다. 황궁의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제가 왜 참아야 하겠습니까? 감히 황가의 권위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날 황손을 죽이려고 든 자입니다. 오히려 참아 주는 것이 온라이언 혈통에 대한 모독이며 황가에 대한 수치입니다.”

비오스트는 지금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듯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제야 황제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저것이 진심인지, 눈속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비오스트가 제 앞에서 온라이언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은 썩 나쁘지 않았다.

겉으로는 황위를 탐내고, 권력을 탐하며,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것처럼 굴었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비오스트가 진심으로 그런 욕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뭔가 숨겨진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그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제 아들 녀석이 뭔가를 위해서 발톱을 숨기고 있다는 것만 확신할 뿐이었다.

‘뭐, 상관없지.’

황제는 비오스트의 꿍꿍이 따위는 무심히 넘겼다. 제 아들 녀석의 꿈이나, 희망 따위는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 것에는 한 번도 관심을 쏟은 적이 없었다.

처음 가문의 비밀을 알려 주었을 때, 두려움에 덜덜 떨며 저항하던 그 멍청한 것이 이렇게 장성한 것만으로도 대견스러웠다. 만약 비오스트가 계속 그렇게 벌벌 떨고만 있었다면, 그는 다시 제국을 뒤져 냄새나는 여자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제국뿐일까? 온 대륙을 샅샅이 뒤져야 했을 것이다. 태어났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여자를 찾아서.

그가 원하는 것은 성스러운 핏줄이 후대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진 강력한 힘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였고, 위대한 사명이었다.

“그럼 지금 황실 최고 의원이 황태자궁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은? 내가 듣기론 마탑에서 마법사와 신관의 사제도 황태자궁을 다녀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황가의 안위를 위함이냐?”

“물론입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비오스트는 황제의 말을 받았다.

“내가 듣기론 네가 한 처사는 아이가 빨리 나오지 못하게 막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다가 신관을 불러다 그 아이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라고 했다면서.”

대체 이 황궁에는 황제의 눈과 귀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짐작하고 있던 바였지만, 황제의 말을 듣자 비오스트는 자신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모르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신의 마음속 계획뿐이리라.

“귀한 황가의 후손을 칠삭둥이로 태어나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되레 자신의 말에 반문하는 비오스트를 황제는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면 비오스트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처럼.

“비오스트.”

“네, 폐하.”

“정말 그것뿐이냐?”

다시 한번 의중을 떠보려는 듯이 황제가 물었다.

“그 아이를 마음에 두게 된 것은 아니겠지?”

그것은 마치 속살거리는 뱀의 유혹과도 같았다. 지금 이야기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테니 다 털어놓으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비오스트를 바라보고 있는 금안은 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폐하.”

비오스트는 조용히 뱀을 바라보고, 또 불렀다.

자신의 눈도 그것과 같았다. 차갑고, 탐욕스러운, 아름다운 금색의 눈동자.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제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할 멍청이로 보이십니까?”

비오스트의 대답에 황제의 입가가 씰룩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억지로 웃음을 참아 내는 것이었다.

그래. 자신이 믿는 것은 바로 저것이었다. 비오스트의 황제를 향한 집착과 탐욕!

그래서 후계자를 낳아야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비오스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만들 테니까.

온라이언의 이름은 이어질 것이다. 자신의 육신은 썩어 없어질 테지만, 자신의 피는 후대에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영원히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 그냥 넘어가기는…… 큭, 크흠! 클럭!”

갑작스러운 기침이 황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그는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해 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비오스트가 그에게 물었다. 심지어 그의 가까이에 다가올 생각도, 부축해 줄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

“크흠! 커헉! 컥컥!”

“사람을 부를까요, 폐하?”

제 아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데도 태연스럽게 비오스트는 물었다.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숙인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는 비오스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싸늘히 그의 뒤통수에 내리꽂히는 시선에는 이대로 그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욕망마저 엿보였다.

“허어…… 헉…… 허!”

한참 만에야 고개를 일으킨 황제의 얼굴은 터질 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격렬한 기침에 단정했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와 그것을 틀어막고 있었던 손에는 붉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그대로 꼬꾸라져서 뒈져 버렸으면 얼마나 좋아.’

아직 황제의 목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비오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신관에게 치료를 받고 있어서 그 수명을 더욱 늘리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손수건을 다오.”

“네, 폐하.”

머릿속 생각과는 다르게 비오스트는 고분고분하게 이럴 때를 대비해서 황제의 집무실에 준비된 손수건을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

황제가 입가와 제 손의 붉은 피를 닦아 내는 동안 비오스트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제 3개월쯤 남았나?”

“비슷합니다.”

“비오스트.”

“네, 폐하.”

“내 명줄은 그것보다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히죽 웃는 황제의 흰 이에는 붉은 피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마치 조금 전에 무언가를 잡아먹은 것 같은 그 미소에 비오스트는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비오스트. 내 아들. 온라이언의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여.”

“하명하십시오, 폐하.”

“이 자리가 탐나느냐?”

황제의 질문에 비오스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폐하.”

그것은 진심이었다.

황제가 되어야 했다. 권력을 가져야 했다. 온라이언의 힘을 물려받아야만 했다.

그래야 이 빌어먹을 저주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테니.

“크흐흐흐흐.”

비오스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듯, 황제는 웃었다.

“네 핏줄을 데려와라, 아들아. 그러기 전에는 이 자리를 절대 물려줄 수 없다.”

번뜩이는 눈빛을 하고 황제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리고 황태자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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