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55화 (55/88)

55.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네가 나 대신 살아가게 되겠지.”

배를 쓰다듬으며 라일라는 미소 지었다.

“네가 태어나면 난 이미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엄마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엄마도 엄마가 없었는데 괜찮았어.”

제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젖 물리기조차도 거부했던 라일라의 어머니였다. 한 번도 제 아이를 따스하게 안아 준 적 없는 엄마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항상 라일라는 생각했었다.

그러면 언젠가는 엄마가 내 이름을 불러 주고, 다정하게 나를 안아 주고, 마음속으로는 널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해 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대신 너에겐 아빠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네 아빠는 네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정말로 바라는 사람이니까, 네가 태어나면 널 사랑해 줄 거야.”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를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 준 적 없는, 라일라를 숲속 오두막에 버렸고, 마지막까지 라일라를 외면했던 아버지와는 비오스트는 다를 것이라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적어도 비오스트는 이 아이를 원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잠을 자고, 임신을 시키고,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돌봐 줄 만큼.

그러니 아이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라일라는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라일라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아……!”

배 속의 아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올 고통의 시간을 예감하며, 라일라는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아픔이라는 것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도 아마 그러할 것 같았다.

눈을 찡그린 탓에 좁아진 시야로 라일라의 산책을 방해하지 않으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세실이 얼른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세실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의 도움을 거부했던 라일라였지만, 아픔이 점점 더해지고 라일라의 몸이 쇠약해지면서 이제 그녀를 거부할 수도 없을 지경이 되자 어쩔 수 없었다.

오늘처럼 아픔이 찾아온 날이면, 짧게는 몇 분씩 길게는 몇 시간씩 라일라는 고통 속에서 끙끙 앓아야 했고, 진이 빠질 정도로 시달리다가 혼절했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이 든 다음 날 역시도 기력이 없어서 혼자서는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라일라가 아픔에 시달릴 때, 그녀를 침대로 옮겨 주고, 진통제를 먹여 주고, 땀을 닦아 주는 등 보살펴 주는 것이 세실이었다. 그다음 날 라일라를 부축해서 일으켜 주고, 먹을 만한 과일즙이나 수프를 떠먹여 주는 것 역시도 세실이었다.

그렇게도 씻겨 주는 것을 싫어했던 라일라였지만, 욕조 안에서 기절해 그대로 익사해 버릴 뻔한 뒤로는 얌전히 세실의 목욕시중도 받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렇게 죽는대도 상관없었지만, 자신이 지금 위험해지면 배 속의 아이도 함께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아, 아가야…….”

라일라는 본능처럼 배를 붙잡았다.

지금 이 고통을 주는 것이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혹여나 자신이 아플 때 아이도 아픈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고, 이 통증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기를 바랐다.

어차피 자신의 인생은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 아팠던 인생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아흑!”

유독 푸르던 나뭇잎이 새하얗게 보였다. 맑고 새파란 하늘도 순식간에 제 색을 잃고 하얗게 변해 갔다. 둥둥 떠 있던 흰 구름만이 온전히 제 색을 지키고 있었다.

‘비오……스트…….’

온통 새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라일라의 세상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 * *

비오스트는 문득, 라일라 생각이 났다.

그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비오스트는 퍽, 자주, 문득문득 라일라를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도서관에서의 라일라가 시시때때로 비오스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마치 일식처럼 절망의 그림자가 파란 눈을 조금씩 잡아먹어 버렸던, 라일라가 진실로 죽어 가던 그 모습을.

이상한 일이었다.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비오스트는 제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더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눈을 감아도, 라일라의 그 눈빛이 어둠 속에서 선연히 떠올랐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발 정도가 아니라 이미 목 끝까지 진득한 늪 속으로 몸이 가라앉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머리끝까지 이미 잠겨 버린 것인지도 몰랐고.

그 증거로 비오스트는 라일라만큼이나 음식을 먹지 못했고, 라일라만큼이나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후우…….”

간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덕분인지 눈앞이 흐릿해져서 비오스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또, 빌어먹을 또! 라일라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그녀는 비오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망도, 절망도, 슬픔도, 그 무엇도 담지 못하는 이미 죽어 버린 것 같은 텅 비어 버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

순간 라일라의 이름을 부를 뻔했지만, 비오스트는 겨우 참아 냈다. 그 대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태자 전하?”

갑작스러운 기립에 옆에 있던 수리가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다음 일정을 이행할 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음 일정도 이곳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궁중대신을 만나는 것이었지, 이동할 일은 없었다.

“황태자궁으로 가야겠다.”

“어…….”

갑작스러운 말에 수리는 더욱 당황해하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시간관념이 둔해진 것은 아니었다. 바깥은 아직 한낮이었다.

“밤에만 가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동안 항상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라일라를 찾았던 비오스트였다. 정확하게는 라일라가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세실로부터 전해 들은 수리가 비오스트에게 그 말을 전하면 라일라가 완전히 잠이 들기를 기다리며 두어 시간 뒤에 그녀를 찾아가는 비오스트였다.

그렇게 라일라가 잠들기를 기다려 그녀의 방을 찾은 비오스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자는 라일라의 얼굴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가 희끄무레한 새벽이 되면 방을 나왔다.

밤마다 본인은 자지 않고, 자는 라일라의 모습만을 쳐다보다 나오니 비오스트는 잠을 잘 시간이 없는 게 당연했다.

“황태자궁에 황태자인 내가 간다는데, 정해진 시간이라도 있어?”

“그건 아닙니다만…….”

수리는 뒷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라일라 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요.’라고.

“잠시 잘 있는지만 볼 거야.”

하지만 수리가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비오스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라일라는 더 이상 비오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를 거부했다.

라일라의 고통을 온전히 지켜보고, 또 거절을 당한 그날 이후 비오스트는 그것을 확연하게 알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자신을 속이고, 아이를 가지게 만들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빼앗을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없었다.

비오스트는 라일라에게 미움을 받아 마땅했고,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비오스트였다. 애초에 그런 것을, 라일라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겼다면 세우지 못했을 계획을 세운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일라에게 거절을 당한 것이 충격이었고, 라일라가 더는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입이 쓴 비오스트였다.

“저기, 전하.”

조심스럽게 수리가 비오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제 주제를 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네 주제를 넘는 이야기라면 그냥 닥쳐.”

집무실에서 나가려는데 자꾸만 말을 거는 수리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비오스트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수리에게 쏘아붙였다.

“네, 전하.”

평소 비오스트의 성격을 아는지라 수리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대신 그가 집무실을 나갈 수 있게 문을 열어 주었을 뿐이었다.

“말해.”

긴 복도를 오직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비오스트는 말했다. 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수리는 그게 자신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조금 전에 주제넘게 하려던 말을 하라는 뜻이라는 것 또한 알아챘다.

“자주 보시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걷던 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야말로 잠시였다. 비오스트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수리는 그것이 계속 이야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곧 죽을 사람인데, 계속 그렇게 봐 봤자…… 큭!”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앞만 보고 있던 비오스트가 갑자기 한 손을 휘둘러서 수리의 멱살을 움켜쥔 것은.

수리의 눈이 놀라서 커다랗게 떠지기도 전에 비오스트는 그대로 그의 몸을 복도의 벽으로 밀어붙였다. 퍽!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수리의 등이 벽에 부딪히고, 소리와 비례하는 아픔이 수리의 등으로 느껴졌다.

“크허억!”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비오스트는 수리의 목을 움켜쥔 그대로 벽을 따라서 그를 들어 올렸다. 거의 자신만큼이나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제 키보다 높이 들어 올리면서도 비오스트는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얼굴로 수리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네 주제를 넘는 말을 하려고 했군.”

“저, 저허헉……”

수리는 전하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려 했지만, 목이 졸린 체 발이 허공에 대롱대롱 떠올라 있는 상태에는 그게 쉽지 않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을 쉬지 못한 폐는 그대로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발 자비를 베풀기만을 바라며 손으로 제 목을 틀어쥐고 있는 비오스트의 손을 붙잡고, 발끝이 어떻게든 땅에 닳도록 발레리노처럼 까치발을 세우는 것 외에는.

“라일라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로 비오스트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짚어 주었다.

어쩌면 라일라보다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수리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이 옳다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무조건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수리는 열렬하게 그의 말에 동의했다.

“크헉! 커헉! 컥!”

수리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 마침내 수리는 바닥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급하게 들이쉰 공기가 거칠어 그는 복도에 개처럼 엎드려서 헛구역질 같은 기침을 내뱉었다.

“…….”

비오스트는 그런 수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몸을 돌려 원래 가려고 했던 황태자궁으로 걸었을 뿐이었다.

라일라는 아직,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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