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아직, 이었다.
그래. 분명히 아직이었다.
라일라는 ‘아직은’ 살아 있었다.
“라일라…….”
흰색의 레이스 양산이 먼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으로 툭, 던져졌다. 그러고 나서 금색 머릿결이 허공에서 너울졌다.
그다음은 가녀린 몸이었다. 깃털로 쌓은 성에 심술 맞은 겨울바람이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라일라의 몸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모든 것이 비오스트의 눈에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보였다. 어쩌면 시간이 천천히 흘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비오스트가 너무나 빠르게 움직여서일 수도 있었다.
라일라의 가녀린 팔이 더는 양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늘어졌을 때, 비오스트의 발은 이미 라일라를 향해서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늦은 뒤였다.
아무리 그가 빠르게 달려도 둘의 사이는 너무 멀었다. 그가 라일라의 곁에 도착했을 때, 라일라의 몸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뒤였다.
“라일라…….”
비오스트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작고 가녀린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비어져 나왔다. 자신이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도 잊은 듯, 비오스트는 자연스럽게 라일라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비오스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불안한 예감이 그의 머릿속에 엄습했다.
손을 대면 바스러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몸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이 닿아도 라일라의 몸이 그대로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오스트는 조심스럽게 라일라의 몸을 안아 올렸다.
작았다. 너무도 작았다.
그리고 너무도 가벼웠다.
비 오는 날 오두막에서 처음 보았던 깡말랐던 소녀는 더욱 바싹 말랐고, 마치 쪼그라든 것처럼 더욱 작아져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서 났던 미치도록 유혹적이고 관능적이던 향 또한 희미해져 거의 맡을 수가 없었다.
숲속에 피어 있던 작은 꽃은 이제 시들었고, 제 향기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꽃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비오스트였다.
“사람을 불러라. 의원이든, 신관이든, 마법사든. 아니, 전부 다 불러!”
비오스트는 뒤늦게 달려온 세실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소리쳤다. 누구라도 좋았다. 이 감은 눈을 뜰 수 있게만 해 준다면.
“아…….”
누군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깨달은 듯, 라일라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 눈을 뜬 순간 잠시 잊었던 고통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와 저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라일라?”
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도 라일라의 눈에는 보였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비오스트의 모습이.
그는……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좋아했던, 마치 보석같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금색의 눈동자에는 애틋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또…… 착각하는 거겠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라일라는 그리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입으로 똑똑히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이 아파한다고 해도 이렇게 애틋한 표정을 할 리가 없었다. 그냥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 제가 그의 표정을 잘못 읽은 것이라고 라일라는 치부했다.
“라일라.”
이번에는 비오스트의 손이 라일라의 손을 쥐었다. 작은 손을 쥔 커다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왜 아픈지도 모르고, 왜 슬픈지도 모르겠는데, 비오스트는 그저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파란 눈을 마주하자, 비오스트는 더욱 그랬다.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파란 눈과 눈을 마주치자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파졌다.
“비오스트.”
작은 입술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오자 비오스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먹먹함 역시 대체 왜,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비오스트는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그가 알 수 있는 하나는 라일라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매몰차게 제 손을 뿌리치고, 꺼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비오스트는 다행스러워서 라일라의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아이의 이름은 당신이 붙여 줬으면 좋겠어.”
라일라가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었다. 무엇이든 거절만 하던 라일라가, 혹은 못이기는 척 겨우 받아들이던 라일라가 처음으로 비오스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오스트는 알았다. 지금 라일라가 하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라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은 이유가 제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유언을 남기려고 그러는 것임을.
“그만…….”
제 손안에 있는 작은 손을 꼭 쥐며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말을 막으려 했다.
라일라가 지금 하는 말을 다 듣고 나면 정말로 끝일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라일라는 눈을 감아 버린 뒤,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비오스트는 그게 무서웠다.
제 아비가 커다란 짐승으로 변신해 앞발로 제 목을 짓누르고, 사흘 안에 자신과 똑같이 변신하지 못한다면 머리부터 오독오독 씹어 삼켜 주겠다고 했을 때도 지금처럼 무섭지는 않았었다.
제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제 혈통에 대해 비난하며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을 때, 온라이언의 힘을 온전히 계승한 자의 압도적인 힘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 때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었다.
지금 비오스트가 느끼는 감정은 그가 인생을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제 품 안에 있는 이 작고 가녀린 여자가 지금 내뱉는 숨이 마지막 숨일까 싶어 비오스트는 무서웠고, 두려웠고, 겁이 났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우리 아기에게 당신이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붙여 줘. 그리고 자주 불러 줘.”
몇 번이나 아이의 이름을 자신이 붙여 줄까 생각을 했던 라일라였다. 태어날 아이에게 자신도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 이유는 자신은 그 아이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전에 자신은 죽을 테니까.
아이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못하고, 라일라는 죽을 테니까.
“라일라. 그만해, 그만!”
“이 아이는 사랑받으면서 자랐으면 좋겠어.”
비오스트의 간청에도 라일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비오스트도, 라일라도 알고 있었다.
라일라가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력을 그러모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을.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착각이라도 좋았어.”
마지막이기에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라일라,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준다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어. 착각이었지만, 그래도 그 비슷한 느낌이겠지? 당신이 내가 착각할 만큼 연기를 잘했으니까?”
“라일라…….”
“그리고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만 이야기해. 그만!”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오스트는 비명과 같은 고함을 터트리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가엾은 여자는, 그저 사랑받는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 것도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모두에게 배척당해 사랑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여자는, 제 목숨을 앗아 갈 남자를 사랑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이야기인가?
그리고 얼마나 가엾고 슬픈 이야기인가?
“다행이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서…….”
깜부기불처럼 라일라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깜박였다.
“안 돼, 라일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비오스트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라일라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라일라가 왜 죽어 가고 있는지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만이 비오스트의 머릿속에 꽉 차 버려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바보같이,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
그의 바보 같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라일라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라일라! 라일라!”
작은 몸을 안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비오스트의 격정적인 부름에도 고운 금색 속눈썹은 들어 올려질 줄을 몰랐다.
“누구 없느냐!”
황태자궁의 정원에서 비오스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불러라! 의사를 불러! 당장 신관을 불러와!”
거의 악을 쓰듯 비오스트가 소리쳤다. 세실이 이미 사람을 부르러 간 것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조급함과 두려움이 비오스트의 뇌를 지배하는 것처럼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눈을 떠, 라일라. 제발 눈을 떠.”
제 손에 쥔 작은 손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다 대고, 비오스트는 주문이라도 외듯이 간절함을 담아서 속삭였다.
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