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배 속의 아기가 자라남에 따라 산모가 느끼는 고통 또한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8개월 정도가 지나면, 그 고통은 사람이 감당해 내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세실의 말에 비오스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가 기대했던 대답과는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비오스트가 기대했던 것은 그때가 되면 고통이 사그라든다거나, 안정기에 접어들어 더는 라일라가 아프지 않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럼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쇠약해진 인간은 감당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거나, 쇼크로 인하여 가사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라일라 님께서 가사 상태에 이르게 되면 황궁 마법사나 신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세실의 차분한 설명이 비오스트의 머리를 때렸다. 그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라일라가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죽지 않더라도 눈도 뜨지 못하는 가사 상태라면 죽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
비오스트는 세실에게서 눈을 떼고 잠이 든 라일라를 내려다보았다. 지금과 똑같은 상태이되,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잔뜩 경계심을 띠고 노려보던 파란 눈을, 힐끗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던 호기심 어린 파란 눈동자를, 애정을 담아 햇볕을 반사하는 호수같이 반짝이던 그 파란 눈을, 원망으로 얼룩진 애달픈 파란 눈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가 봐.”
“네, 전하.”
비오스트의 뒤통수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단둘이 방에 남게 되고 나서도 그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라일라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살포시 비오스트의 엉덩이가 침대에 안착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
아무 말 없이 뻗은 손이 라일라의 얼굴로 향했다. 창백하고 거칠어진 뺨에 그의 손이 닿자 이상하게도 감전이라도 된 듯 심장이 찌릿했다.
천천히 라일라의 뺨을 쓸어내리고, 손가락 하나가 메마른 입술에 닿았을 때는 더욱 심했다. 통증은 그의 심장을 쥐어짜고, 혈관을 알알이 흐르며 비오스트의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 아픔에 비오스트의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고,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에 커다란 못을 찔러 넣은 것 같았다.
차라리 누군가가 진짜 그렇게 한 것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장 날카로운 발톱을 똑같이 자신을 해친 암살자의 심장에 밀어 넣고, 그보다 더욱 단단한 송곳니를 그의 목덜미에 박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비오스트를 괴롭히는 것은 어떠한 형체도 없는 무형의 감정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가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허상이었다.
“라일라…….”
결국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은 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비오스트의 입술에서 라일라의 이름이 되어 튀어나왔다. 나풀나풀 공기 중을 떠돌던 이름이 라일라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그 이름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오직 어둠만이 알 일이었다.
* * *
르미에르의 앞에 커다란 창이 드리워졌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르미에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을 막아선 병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족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자신도 두려운지 경비병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는 르미에르가 자신을 쳐다보자 더욱 긴장했는지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무엄하다! 감히 이분이 누군지 알고!”
르미에르의 뒤에 있던 시종이 큰 소리를 내자, 경비병은 자신을 향한 압박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보며 르미에르는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듯이 시종을 향해서 한 손을 올렸다.
제 주인을 향한 무례에 화를 감추지 못하는 시종은 경비병을 더욱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얌전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누군지는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네. 르미에르 디스트리 드 온라이언 대공 전하십니다.”
르미에르는 제 시종이 물었던 것과 같은 것을 경비병에게 묻자, 그는 바로 대답했다. 과연, 그가 르미에르를 몰라봐서 한 짓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나’라는 건가?”
르미에르가 자신의 앞으로 반걸음 더 다가서며 다음 질문을 하자 병사의 목울대가 또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의 눈빛 또한 태풍 앞의 코스모스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도 몰랐다. 자신이 감히 성스러운 혈통이라고 불리는 황족의 앞길을 가로막게 될 줄.
드나드는 사람도 별로 없는 황태자궁으로 차출이 되었을 때는 솔직히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황태자의 시종에게 들었을 때도 별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알기론 황태자궁에 머무는 사람은 아직 책봉식도 치르지 않은 황태자의 연인 혹은 애첩이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아직 정식 황태자비가 아닌지라 부리는 사람도 적었고, 그녀를 만나 뵙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한직이었다. 오죽하면 일전에 인원을 한번 줄이기까지 했을까?
그저 하루 온종일 서 있다가 시간이 되면 교대하면 되는 아주 널널한 자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 멀리에서 누군가 황태자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황제의 이복동생이자, 황족이며, 대공의 작위를 가진 르미에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의 머리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갈등의 원인은 ‘아무도’에 르미에르가 들어갈지에 관한 판단을 내려야 해서였다. 분명 황태자의 시종은 자신과 황태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황족이었다.
그것도 그냥 황족이 아니라, 황제의 이복동생이었고,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황태자의 숙부였다.
그는 갑옷 속의 등에서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서야 제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어차피 오는 사람도 없는 황태자궁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 자체가 이미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경고였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저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병사는 자신의 몸을 더욱 꼿꼿이 세우며 앞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황족의 명에 거스르는 것은 즉결처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명령을 받은 군인이었고, 그 명령 역시 황족이 내린 것이었다.
그는 그것에 거스르는 짓을 할 수 없었다. 비록 눈앞에 사람이 하늘보다 높은 황족이라고 할지라도.
“…….”
르미에르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지금 눈앞의 병사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는 그저 내려진 명령에 충실한 것뿐이었다.
‘그래. 더 조심하게 되었겠지.’
자신이 도서관에서 라일라를 접촉하고 난 이후 황태자궁의 경비가 더욱 강화된 것이리라 짐작하며 르미에르는 병사의 뒤편으로 보이는 황태자궁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라일라를 처음 보았던 그 정자가 언뜻 보이는 듯도 싶었다.
못내 마음에 걸리는 아이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었다.
자신이 진실을 말해 준 순간, 흔들리던 그 파란 눈동자가 너무도 안쓰러워서 르미에르는 가슴이 아팠었다.
비오스트에게서 상처받고, 무너지고, 그러고도 결국 그에게 원하는 바를 내어 주겠다고 말하는 라일라의 뒷모습이 너무도 가녀리고 연약해 보여서 그녀를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만약 라일라가 쓰러졌다면, 르미에르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만약 라일라가 휘청거렸다면, 그때도 르미에르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러지 않았다. 손을 대면 한 줌의 재로 바스러질 것같이 연약해 보였지만, 라일라는 버텨 냈다.
강한 여자였다. 그 옛날, 그의 첫사랑이었던 여자처럼.
“가자.”
르미에르는 황태자궁에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오리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 *
시간은 무심히 잘도 흘렀다.
한여름의 땡볕은 어느덧 한풀 꺾이고, 시원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지근한 바람이 속눈썹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황태자궁의 정원에 피어난 꽃들도 화려한 여름꽃은 지고, 수줍은 듯 가련한 가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꽃이 예쁘다.”
한낮의 강한 볕을 피하고자 양산을 손에 쥐고 산책을 하고 있던 라일라의 입에서 조용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걷던 발걸음도 멈추고 라일라는 꽃을 바라보았다.
파랗다고 말하기에는 마냥 파랗지 않고, 그렇다고 보랏빛이라고 말하기에는 또 파란, 이름 모를 꽃이 바람결에 살랑이며 라일라의 앞에서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가야, 너도 보고 있니?”
고개를 숙여 불룩해진 제 배를 보며 라일라는 말을 걸었다. 마른 손가락을 오므려 다정하게 배를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요즘의 라일라는 항상 그랬다. 예쁜 것을 보면 항상 배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었고, 예쁜 소리를 들으면 그 역시 아기에게 듣고 있느냐며 말을 걸었다.
“오늘은 날씨도 너무 좋다. 하늘도 파랗고, 구름은 새하얗거든. 나무도 오늘따라 더욱 푸르른 것 같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하고 상냥해서 그 옛날 숲속 오두막의 날 선 소녀는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른 나와서 네가 이 예쁜 세상을 보면 좋을 텐데.”
아이가 나오면 제가 죽는 것을 알면서도 라일라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다정한 속삭임에는 티끌만큼의 거짓도, 가식도 없었다.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가 얼른 나오기만을 바라는 사랑이 담뿍 담긴 말투였다.
그랬다. 라일라는 이미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