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53화 (53/88)

53.

비오스트의 눈에 보인 것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라일라였다.

“라일라!”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라일라는 한 손은 테이블에 올라와 머리를 받치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자신의 배를 누르고 있었다.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팔과 어깨를 잡고 아주 조심스럽게 숙인 그녀의 몸을 위로 젖혔다.

그러자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일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감긴 눈은 아픔에 잠식당해 영원히 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는 붉은 기라곤 없었고, 피부와의 경계가 어딘지도 모를 만큼이었다.

“라일라…….”

벌써 세 번째의 부름이었다. 비오스트는 오직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분명 듣기는 했었다.

온라이언의 아이를 가진 임산부에게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비오스트는 이미 교육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생명력을 빼앗는 행위가 그저 곱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세실을 통해서 라일라가 거의 이삼일에 한 번씩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제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은 무언가 달랐다. 라일라의 찌푸린 표정을 보는 순간 손이 떨려 왔다. 입안도 바싹 말라 왔다. 그리고 얼어붙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뭘 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이름만을 불렀다.

“라일라…….”

아픔을 삭이느라 제 이름을 듣지도 못하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비, 비오……스트?”

잠시 아픔이 잦아든 것인지, 그게 아니면 네 번째 만에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라일라가 가늘게 눈을 뜨고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고통 속에서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가 라일라의 옆에 와 있었고, 정말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달콤하게 속삭였던 그 목소리가 라일라의 이름을 부른 것이 맞았다. 다정하게 안아 주었던 그 손이 라일라의 팔을 붙잡고 있는 것이 맞았다.

“놔!”

그래서 라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 손을 뿌리쳤다.

“라일라!”

너무 갑자기 일어나서일까? 그게 아니면 비오스트의 손을 너무 세게 뿌리쳐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고통이 채 가시지 않아서일까?

비오스트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난 라일라가 순간 휘청거렸다. 비오스트는 놀라며 그런 라일라를 붙들었다.

“나한테 손대지 마!”

하지만 라일라는 다시 새된 소리를 지르며 비오스트의 손을 뿌리쳤고, 결국 제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라일라.”

“꺼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비오스트를 보며 라일라는 다시 소리쳤다. 주저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어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고 있는 라일라였지만, 목소리만은 앙칼졌다.

마치 오두막에서 처음 만난 그날처럼.

“침대로 가는 게 좋겠어. 부축해 줄게.”

비오스트는 더이상 라일라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비오스트도, 라일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오스트의 반말을 듣는 순간, 라일라의 어깨가 멈칫하며 굳고야 말았다. 그녀에게는 또다시 자신이 보았던 비오스트의 모습은 전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신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파리한 안색을 하고, 머리카락은 땀에 절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라일라는 단호했다.

“날 그냥 내버려 둬. 이제 다 끝났잖아. 날 위하는 척하는 연극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

“연극이 아니야.”

“연극이 아니면? 정말 내 걱정이라도 한다는 거야?”

라일라의 말에 비오스트는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라일라를 걱정하고 있다고?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라일라가 무사히 아이를 낳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거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쩌면 황제가 말한 그 열네 살짜리 유목민 소녀를 찾아가서 라일라에게 했던 짓을 다시 반복해야 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비오스트는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라일라를 걱정하는 걸 수도 있었다.

“당신이 그따위 짓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낳을 거야. 나도 그걸 바라니까.”

그래. 라일라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죽음을 바란다고. 그러니 아이를 낳아 주겠다고.

그러니 라일라가 도망갈 걱정을 한다거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버틴다거나 할 걱정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건 비오스트가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

“그래. 알아.”

하지만 왜인지 자신은 그저 기다리고 있지 못하고 라일라를 찾아왔다. 깊은 밤 자는 얼굴을 보러 왔었고,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 발이 여기로 자신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의 신음에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라일라의 고통에 찬 표정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또…….

“그러니까 꺼져.”

자신을 밀어내는 라일라를 보며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바라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자를 바라보는 지극히 정상적인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비오스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괜히 붉어지던 그 뺨이 없다는 것이, 힐끗힐끗 자꾸만 쳐다보던 반짝이는 눈빛이 없다는 것이, 툴툴거리면서도 자꾸만 말을 걸던 그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 비오스트는 못내 안타까웠다.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오히려 비오스트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런 마음이 들 리 없었다.

분명 라일라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희생 없이는 대의를 이룰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 역시 가지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이 사냥한 사슴에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 정도였다. 필연적인 희생에 대한.

덫에 걸린 사슴이 발버둥 치는 꼴을 보며 차분히 기다렸다가 결국 포기해 버린 사슴의 목을 베고, 가죽을 벗기고, 그 고기까지 취하는 것이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은 결코 자신이 죽인 사슴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리 없었다.

“으윽!”

비오스트가 혼란을 느끼는 사이, 라일라에게 다시 고통의 파도가 덮쳐 왔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버티지 못하자 라일라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 아아!”

배 속을 할퀴는 것 같은 고통에 라일라는 버티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라일라!”

멍하니 서 있던 비오스트가 허겁지겁 라일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날 혼자 내버려 둬!”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오스트를 보며 라일라는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본능처럼 등을 둥글게 말고, 무릎을 위로 끌어 올렸다. 그렇게 한다고 한들, 고통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지만.

또다시 거대한 통증의 파도가 밀려들자 라일라는 제 이로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피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지만, 라일라는 비릿한 피의 맛도, 상처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뼈마디가 하얗게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 몸을 옹송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생명력을 빼앗기는 고통을 참아 낼 뿐이었다.

고통은 온전히 라일라 혼자만의 것이었다.

* * *

“항상 이런 식인가?”

잠이 든 라일라를 바라보며 비오스트가 조용히 물었다. 물수건으로 라일라의 이마를 닦아 주고 있던 세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오늘도 먹은 것이 거의 없는 라일라를 위해서 자기 전에 꿀을 탄 따뜻한 우유를 준비해 온 세실이 본 것은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라일라와 그런 라일라를 바라보며 굳어 있는 비오스트였다.

어째서 연락도 없이 비오스트가 여기 와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것보다 급한 것은 라일라였다. 세실은 라일라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다가 어디에 부딪히지 않도록 옆에 있는 탁자와 의자를 치웠다.

그리고 익숙하게 방에 둔 진통제 역할을 하는 약초 우린 물을 들고와 라일라의 상체를 들어 올려 기도가 막히지 않는 자세로 그것을 그녀의 입안으로 흘려 보내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라일라는 진통제의 효과가 나는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항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오스트가 라일라를 침대로 안아다 옮겨 주어 오늘은 조금 수월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기절을 하신 것은 처음이십니다. 점점 증상이 심해지고 있으세요.”

이마를 닦은 물수건을 다시 옆에 있는 대야에 담그고, 세실은 이불을 끌어 올려 라일라를 덮어 주었다. 이제는 이불을 덮어도 라일라의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더 심해지고 있다고?”

비오스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세실은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일라를 쳐다보고 있는 비오스트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단 하나의 감정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다. 놀란 것도 같았고, 믿을 수 없다는 것도 같았고, 애틋함도 깃들어 있었으며, 라일라의 고통을 교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세실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오스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지금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라는 거였다.

“이제 5개월 차시니까요. 아기는 더욱 자랄 것이고, 그동안 고통은 더욱 심해지시겠지요.”

“그럼, 애가 태어날 때까지 이 짓이 계속 반복된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배운 바에 따르면 고통은 8개월 차까지입니다.”

“그 이후에는 고통이 없는 건가?”

비오스트의 질문에 세실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뿐이었다. 정확하게는 어떻게 하면 운명의 여자를 알아보고, 그에게 자신의 씨를 잉태시킬 수 있는지 정도만 알 뿐이었다.

그 이후에 아기가 어떻게 자라나는지,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언제 태어날 수 있는지는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관심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 뒤에는 더는 아프지 않은 거냐고.”

하지만 이제는 그것에 관해서 관심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세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채근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관심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아닙니다.”

그러니, 세실은 그에게 진실을 알려 줘야 했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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