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52화 (52/88)

52.

“정무가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요즘 네가 내 일을 덜어 주고 있어서 그리 바쁘지 않아. 그래서 네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 잠시 들러 보았다.”

황제는 자기 아들이 대견하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비오스트는 그가 고작 자신을 보기 위해서 집무실까지 친히 방문할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이는 잘 있고?”

“네.”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말하는 ‘그 아이’가 라일라라는 것은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결혼식이나 황태자비 책봉식은 언제 할 셈이냐?”

“식은 따로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어째서? 정식 황태자비가 아니라면 귀족들이 나중에 반발할 수도 있어. 낳은 아이의 적통성을 의심할 수도 있고.”

“지금 상태가 더욱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골귀족 출신인 데다가 이미 보셨겠지만, 그녀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리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 라일라의 상태는 나쁜 것에 가까웠지만, 일단 비오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설사, 라일라의 상태가 좋았더라도 책봉식 따위는 그의 계획에 없었지만 말이다.

라일라가 냄새가 나는 상태에서는 당연히 사람들 앞에서의 책봉식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몇 개윌 뒤에 죽을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굳이 책봉식을 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비오스트는 생각했었다.

“지금의 라일라를 보여 주면 분명 귀족들이 반대할 겁니다. 자기 딸들이 훨씬 낫다며 앞세우겠죠. 차라리 산모는 아이를 낳으면서 죽었다고 하고 친자확인서를 보여 주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제 핏줄이 아닌 황태손이 있는 것은 못마땅하겠지만 황태자비 자리가 비어 있으니, 아직 기회가 있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못한 척 그 아이를 황실의 인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긴 지금 그 아이의 행색이 꼬챙이처럼 말라서 배만 볼록한 것이 그리 썩 괜찮은 몰골은 아니더구나.”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라일라의 상태를 이야기했다. 마치 매일매일 라일라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처럼.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비오스트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얼마나, 어떻게, 어디까지 라일라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지를 생각하자 배 속에서 은근한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야 무사히 온라이언의 혈통을 낳을 수 있을지 걱정되더구나.”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체 황제는 비오스트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며 비오스트는 지금부터 할 말이 황제의 진짜 용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일라에 관한 이야기도 그저 서론일 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스페어를 하나 준비해 둘까 하는데.”

스페어라는 말에 비오스트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굳었다. 황제는 그런 비오스트의 반응이 퍽이나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북부 어디 유목민 무리 중에 냄새나는 아이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찌나 그 냄새가 지독한지 가까이에 가면 썩은 소젖의 냄새가 나고, 더러운 양 떼도 그 아이의 곁에는 가지도 않는 모양이야. 결국 마을에선 살 수 없어서 제 부모가 양과 염소 몇 마리를 사서 유목민 생활을 시작한 모양이야.”

“확실한 정보입니까?”

언제 자신이 얼굴을 굳혔냐는 듯이 비오스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했다.

“확실한지는 데려와서 보면 알겠지.”

기대어 있던 등받이에서 몸을 뗀 황제가 은밀한 재미를 공유하려는 것처럼 비오스트를 향해서 상체를 숙였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서 비오스트가 그를 쳐다보자 황제는 빙긋이 웃었다.

“열네 살짜리 계집아이라고 하더군. 설사 우리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즐거운 일이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도발이라는 것을 비오스트는 알았다. 저 핏줄에 미친 사내가 자신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린아이를 능욕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말하는 저 변태 같은 사내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욕망을 비오스트는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몸속에 그와 같은 피가 절반이나 흐른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제 목에 칼을 박아 넣고, 저 인간 같지 않은 인간에게서 물려받은 피를 뽑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겠군요.”

하지만 참아야 했다.

아직은, 그가 황제였다. 비오스트가 아니라.

“허나, 조금 더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이복형제가 생겨 제가 어린애를 죽이는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게 싫으면, 네가 취하면 될 일 아니냐?”

“연년생의 제 아들들이 황위 찬탈전을 벌이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아서요.”

비오스트가 말하는 바는 뚜렷했다. 라일라는 아이를 무사히 낳을 것이라고 황제에게 말하고 있었다.

“제가 무사히 황가의 혈통을 이어받을 아이를 낳게 되면, 황위를 계승해 준다는 약속을 지킬 준비나 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도 이미 그 준비를 하고 있지 않느냐? 네게 정무의 일부를 양도한 것이 바로 그 시발점 중에 하나다. 나야말로 얼른 뒷방 늙은이가 되고 싶은 환자야.”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얼굴은 조금의 병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발작처럼 찾아오는 기침과 각혈이 아니었다면, 비오스트 역시도 그가 병자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완전한 환자였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시간이 비오스트의 편이 되어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황제는 권력으로 신전의 도움을 받아 신력으로 병의 진행을 막았고, 그렇게 억지로 늘린 자신의 시간을 온라이언의 혈통을 잇는 일에 사용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지. 열다섯 살도 제법 괜찮은 나이이니 말이야.”

빙긋이 웃으며 마침내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오늘의 방문은 제 아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고 말하고 싶은 듯이 비오스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비오스트는 그것이 기쁘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여서 황제께 예의를 표시했다. 속으로는 그가 닿았던 제 어깨를 베어 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것은 그저 속마음일 뿐이었다.

그는 아주 예의 바르고, 훌륭한 황태자의 자세로 황제를 배웅했다.

* * *

‘흔들리지 마.’

똑바로 복도를 걸으며 비오스트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 목표를 잊지 마.’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제 인생의 목표를 다시금 되새겼다.

“죽이고, 죽는다.”

나지막하게 내뱉는 음성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자신을 낳은 부모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는 감정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대신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숙부를 죽이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역시 방해물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희생해야 하는 소녀에 대한 미안함 또한 속으로 삭여야 했다.

이 빌어먹을 죽음의 고리를 끝내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버려야만 했다.

“여긴……”

오늘 낮에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며 걷고 있던 비오스트는 익숙한 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익숙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비오스트가 보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황태자궁의 복도였고,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은 라일라가 있는 방문 앞이었다.

“여길 왜 온 거지?”

여기에 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수리에게 먼저 방으로 돌아가라고 이르곤, 황제와의 대화를 혼자서 좀 더 곱씹었었다.

그가 황태자궁에 사람은 심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끄나풀이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사람을 보내 은밀히 염탐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라일라를 얼마큼이나 엿보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자신처럼 라일라가 뭘 먹고, 얼마나 먹으며, 고통의 주기는 얼마나 되며, 언제 잠이 드는 것까지도 황제가 다 알고 있는 것인지를.

또한 그가 말한 열네 살 된 유목민 소녀의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려는 거짓말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마도 아주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비오스트가 그 소녀에 대해서 알아보리라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을 테니까.

설사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황제는 그걸 사실로 만들 수도 있었다. 유목민이라면 그리 부유하지는 않을 것이니, 돈 몇 푼을 쥐여 주면 제 딸을 푼돈에 팔아 버릴 파렴치한쯤이야 널려 있었다.

대충 몸에 소똥을 칠해서 궁에 데려온 다음, 깨끗이 씻기고 나서는 거짓 소문이었다며 눙치면 그만이었다. 아무도 황제의 잘못을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권력이었고, 그것이 황권이었으며, 그래서 바로 비오스트가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제 아비를 죽이더라도, 제 아들을 죽이더라도, 아무도 자신을 말리지 못할 힘을.

“…….”

그리고 지금 그가 서 있는 방문 너머에는 비오스트에게 마침내 그 힘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비오스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방문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문을 열겠다거나, 라일라를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라일라는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지난번에도 깊은 밤, 그녀가 잠들고 나서야 들어가 얼굴을 잠시 보았던 것이었다.

그날의 방문 역시도 충동적이었다. 식사를 잘 하지 못한다는, 살이 빠졌다는, 그리고 고통이 조금씩 더해 가고 있다는 세실의 보고서를 보고 나서 저도 모르게 온 것이었다.

‘…….’

방문을 한번 쓸어낸 비오스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자그만 신음이 비오스트의 발목을 잡았다.

막 발을 떼려던 비오스트의 발이 그대로 바닥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신음이 들려온 방문 너머를 향해서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었나?’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비오스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라면 절대 스스로를 의심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지만, 제 발이 자신도 모르게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귀 역시 의심스러웠다.

“……으읏.”

비오스트가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한 신음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앓는 소리가 뒤섞인 신음이었다.

“라일라!”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숨에 눈앞에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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