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검은 어둠 속에서 창백하게 흰 피부가 파르스름하게 빛이 났다. 비오스트가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더욱 살이 빠져서 그런지 이마와 광대, 콧잔등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배게 위로 흐트러진 금발은 처음 그녀를 봤을 때만큼이나 윤기를 잃고 뻣뻣해져 있었다. 겨우 찌웠던 살도, 좋아진 머리카락도, 전부 아이에게 양보해 버린 듯, 라일라는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으음…….”
옆에 누군가가 있는 기색이 못내 불편한 것처럼, 라일라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뒤척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 덕에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몸에서 흘러내렸다.
얇은 잠옷의 아래로 드러난 마른 팔과 도드라진 빗장뼈가 비오스트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라일라.”
작은 목소리가 라일라를 불렀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들으라고 부른 이름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듣지 못하기를 바라며 부른 것이었다.
“네가 마지막 희생자야.”
살짝 떨리는 손이 라일라의 얼굴로 향했다. 아이가 윤기를 삼켜 버린 듯 이전처럼 다시 뻣뻣하고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자 라일라의 창백한 안색이 드러났다.
잠이 든 라일라는 머리카락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대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모를 테니까.
방금 비오스트가 자신에게 사과한 것을 라일라는 알지 못하듯이.
“네 덕분에 나는 황위에 오를 것이고, 이 빌어먹을 희생의 고리를 끊어 버리겠어.”
곱게 라일라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귀 뒤로 넘겨 준 비오스트의 손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미끄러져 버린 이불이었다. 이불의 한쪽 끝을 잡고 끌어당겨 드러난 라일라의 여윈 어깨를 덮었다.
툭 튀어나온 어깨뼈와 창백한 피부를 이불로 덮자 그나마 평온하게 자는 얼굴만이 보여 안쓰러움이 덜했다. 그것조차 기만이라는 것을 비오스트도 알고 있었다.
“손에 넣은 권력으로 나는 내 아비를, 나를 낳아 버린 그를 죽일 거야. 그것을 방관했던 숙부도.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너를 죽인, 내가 낳은 그 아이를 죽일 거야.”
평온히 자신의 계획을 읊조리는 살인자와 그 앞의 피해자와의 관계는 마치 죄를 고백하는 죄인과 죄를 사해 주는 성직자와 같았다.
고백했으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듣고 있되, 듣지 못하는.
“그리고 마지막은 나야. 저주받은 혈통의 남은 사람이자, 이 저주받은 혈통을 끝낼 자.”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자신의 탄생이 한 여인의 목숨을 희생한 대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성스러운 온라이언 혈통이라고 하는 것이 고작 작은 소녀들을 속여 그 목숨을 빼앗아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운명의 고리 안에 있는 쇠사슬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비오스트는 결심했다. 자신이 이 비극을 끝내기로.
“라일라.”
꾸며낸 다정함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메마르고 차가운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제 목소리로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해.”
회색빛 속삭임이 조용히 어둠 속에 스미었다.
* * *
라일라의 입안에서 달걀은 잘게 부서지다 못해, 곱게 으깨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씹어도 도무지 그것은 삼켜지지 않았다. 마치 목구멍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라일라는 하염없이 그것을 씹고만 있었다.
맛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미 맛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라일라는 잊었다.
라일라가 그렇게 좋아하던 갓 구운 빵도, 신선한 과일과 채소도, 황실 요리사가 맛있게 만들어 준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먹어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음식 투정을 하는 어린애처럼 입안에 음식을 머금고 있던 라일라는 이래서야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질끈 감고 입에 있는 것을 꿀떡 삼켰다.
“윽!”
명치 어디선가 음식이 탁 걸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괜히 속이 미식거리며 토할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라일라의 몸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그만 먹을래.”
결국, 라일라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사가 끝났다는 말에 세실은 음식을 차려놓은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오늘 라일라가 먹은 것을 비오스트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라일라가 무언가를 하나 먹을 때마다 그것을 헤아리고 있었으니.
달걀 반 개, 딸기 하나, 양상추 조금, 홍차 두 모금.
라일라가 오늘 아침에 먹은 것은 그게 다였다. 정직하게 비오스트에게 이 목록을 전달한다면, 그는 이번에야말로 세실의 목을 자를지도 몰랐다.
“라일라 님, 너무 적게 드셨어요.”
세실은 조금은 라일라를 책망하듯이, 그리고 조금은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힐끗, 라일라는 눈동자만을 돌려 세실을 바라보았다.
“요즘 체중이 많이 줄어드셨으니, 조금 더 드시는 것이 좋겠어요.”
꼭 비오스트의 책망이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점점 말라 가는 라일라가 세실은 안쓰러웠다.
이 방을 쓰게 될 소녀가 누구인지 세실은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소녀가 잘 침대를 고르고, 그녀가 덮고 잘 이부자리를 선택하고, 입을 드레스와 쓸 화장품을 고르면서도 세실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녀가 누구든 곧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정을 줘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을 먹으며 감탄하고, 그저 보통의 사람과 다름없이 대하는 것에 감동하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세실은 처음의 마음보다 조금 더 살뜰하게 라일라를 보살피게 되었다.
깡마른 몸에 조금씩 살이 붙었을 때, 퍼석한 머리카락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을 때, 자신을 더는 노려보지 않게 되었을 때, 세실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뿌듯해했다.
그리고 라일라가 자신의 품에 안겨서 펑펑 눈물을 흘렸을 때, 세실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군.”
라일라의 중얼거림에 세실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알파벳도 모르던 소녀는 이제 쉬운 동화책쯤은 혼자서 읽게 되었고, 저렇게 그럴듯한 관용구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곧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공부를 멈췄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셔야지요.”
라일라는 대답 대신 조용히 눈을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 생명을 먹는 거라며. 이런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라일라 님께서 이렇게 음식을 드시지 않는다면, 남은 생명이 더욱 짧아지실 테니까요.”
세실의 말에 라일라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굶어 죽는다면, 아이 또한 죽을 테니.
“…….”
라일라는 말없이 포크를 쥐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이니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제 앞에 있는 달걀 반 개에 포크를 꽂아 넣은 라일라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나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일라는 기계처럼 그것을 씹기 시작했다. 적당히 달걀을 으깼다는 생각이 들자, 라일라는 그대로 그것을 꿀떡 삼켰다.
“……!”
분명 부드러운 달걀이었는데, 생선뼈가 목구멍에 꽂힌 것처럼 따끔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아까 넘어간 달걀이 아직도 식도를 막고 있는 것처럼 명치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우욱!”
마치 그것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위장이 꿀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올라오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라일라는 등을 들썩이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라, 라일라 님!”
라일라의 구역질을 보고 놀란 세실이 라일라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등에 제 손을 대었다. 그러자 라일라의 안에서 더 심한 거부감이 일어나며, 배 속에서는 더욱 격렬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라일라 님!”
더는 견디지 못한 라일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자 세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채 닫지 못한 욕실의 문 사이로 세실이 본 것은 욕실 한복판에서 주저앉은 작고 작은 등이었다.
마른 등이 몇 번이나 들썩거리고,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하릴없이 흔들려도, 배를 쥐어짜는 것 같은 괴로운 헛구역질 소리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라일라 님…….”
세실이 다가가서 라일라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자, 툭툭 튀어나온 마른 척추가 만져졌다. 두드러진 그 뼈가 세실의 손끝에 닿자 그녀의 마음이 아려 왔다.
한참이나 그렇게 구역질을 하던 라일라는 마침내 제 안에 있던 것을 모두 게워 내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숨을 들썩이며 고개를 돌린 라일라는 그제야 세실이 자신의 옆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가.”
세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라일라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라일라 님, 이제 괜찮으세요?”
“나가라고.”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창백한 안색으로, 목소리를 겨우 쥐어짜서 라일라는 다시 세실에게 명령했다. 결국, 세실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세실이 욕실에서 나가고 나서야 라일라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얼마나 헛구역질을 했던지 속은 아직도 쓰라렸고, 손이 벌벌 떨려 왔다.
힘없는 팔다리를 겨우 일으켜 세워 비틀거리며 물을 틀자, 적당한 온도의 물이 흘러나왔다. 그 안으로 손을 오므려 물을 받아 입을 헹궈 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는 동안에 겨우 손의 떨림은 잦아들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 변함이 없었지만.
손등으로 입 주변을 닦아 내며 라일라가 고개를 든 순간,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하고 마른, 지금 이 자리에서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
“곧 죽을 수 있어. 평생 원했던 일이 이루어지는 거야.”
라일라는 최면이라도 걸듯,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물기 묻은 라일라의 손이 눈앞의 거울에 가서 닿았다.
“넌 슬퍼 보이지?”
거울 속 라일라의 얼굴에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