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사과 반쪽, 방울토마토 두 개, 빵 한 조각, 물 두 잔.”
비오스트는 조용히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어 내렸다. 몇 개 읽을 단어도 없이 단출했다.
“세실.”
종이를 내리고, 이것을 가져온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세실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비오스트의 눈에도 보였다.
“내 생각에는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따위 결과물을 내게 가져올 리가 없다고 생각해. 사람이, 그것도 임산부가 하루에 고작 이 정도만 먹고 살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으니까.”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개 같은 사과는 집어치워. 그따위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
사과의 말마저 가로막힌 세실은 그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마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비오스트의 눈빛을 받아 낼 수는 없었으니.
“아무래도 네가 요즘 하는 일에 집중을 못 하는 모양인데, 어때? 눈알을 하나 파 줄까?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일하려나? 그게 아니면 귀를 하나 잘라 줘? 그러면 정신 차리겠어?”
“아닙니다.”
“아니긴. 골라 봐. 그간의 정을 봐서 네 머리를 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죄송합니…….”
“사과는 집어치우라고 했는데, 그따위 말을 또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입이 찢어지고 싶은가 보지?”
“…….”
다시 세실의 입이 딱 닫혔다. 그래도 비오스트가 살벌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저기, 전하.”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고 제가 방금 말했던 것 중에 하나를 실천에 옮길 것 같은 비오스트의 기세에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고 있던 수리였다.
“원래 임산부라는 것이 입덧도 하고 그러다 보니 음식을 좀 잘 못 먹을 수도 있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오호, 그래? 내 시종이 임신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몰랐군. 네가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세실의 목을 치고 네가 유모를 해도 상관없겠는데?”
비오스트는 수리를 쳐다보며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말리려고 했던 수리의 말은 오히려 더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고작 임산부 좀 잘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인데, 그거 하나 못 하는 무능한 인간을 보고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지?”
“그냥 임산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특수한 임산부입니다.”
“그래. 특수한 임산부라서 나 역시 특수한 유모를 붙였어. 대대손손 그 특수한 임무를 맡아서 하는 유모를 말이야. 그런데 그 유모가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잘라 버려야지. 제 직무에서 자르든, 목을 자르든.”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라일라가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는 데서 시작한 비오스트의 화가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여기서 비오스트를 말리지 못한다면, 세실은 정말 큰일이 날 게 뻔했다.
“전하.”
수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비오스트를 불렀다. 금색의 눈 안에 활활 타오르는 화를 숨기지 못하는.
“충언으로 말씀드립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사리 판단이 흐려지셨습니다.”
“뭐?”
갑작스러운 수리의 하극상에 비오스트는 기가 막혔다. 제 시종이 저 유모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감히 제게 대들 정도인 줄은 몰랐었다.
언제나 능청스럽게 상황을 빠져나가는 것이 그의 특기였지, 이렇게 앞에서 뻗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다간 자기 목이 달아나리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시종이었다. 목숨이 두 개가 아니고서야 수리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 물론 라일라 님은 소중하신 분입니다. 전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지요. 하지만 라일라 님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무슨 헛소리지?”
“체중이 좀 줄었긴 하나, 이상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의 라일라 님은 살이 찐 상태입니다. 지금 조금 식사가 힘드시긴 하나,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 그래? 하루에 이 정도만 먹어도 충분하다는 건가? 말라비틀어지고 있어도 말이지?”
“충분한 영양은 아니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돌아가실 분 아닙니까?”
“지금…… 뭐라고 했지?”
매서웠던 비오스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기세 좋게 제 이야기를 펼치고 있던 수리마저 움찔해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떡 삼킬 정도였다.
“저, 전하께서 하시던 말씀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요. 혹시 일이 어그러지면 사지를 결박해서 침대에 묶어 두고 수면제를 먹여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재워 두면 된다고까지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
“정 안되면, 억지로 입을 벌리고 유동식을 밀어 넣는 방법도 있고, 신관을 불러와 기력을 불어넣는 방법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전하시라면 방법을 구했을 것이지, 유모를 닦달하고 계시지 않을 겁니다.”
“…….”
수리의 말에 비오스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라일라는 그저 그릇일 뿐이었다. 소중한 것을 담고 있는 그릇. 조금 금이 가도 상관없었다. 깨져도 상관없었다. 안에 담긴 것만 멀쩡하다면, 그릇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담고 있던 것이 없어지고 나면, 산산이 부서져 버릴 그릇이라면 더더욱.
수리의 말대로 원래의 자신이라면 그릇의 안위 따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릇이 위태롭다면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리의 말이 옳았다.
“……나가 봐.”
조용한 명령에 세실은 살짝 주저했고, 수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다 세실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잽싸게 세실의 손목을 잡고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이대로 나가도 정말 괜찮은 것인지를 걱정하는 표정의 세실을 보며, 수리는 더욱 세게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비오스트를 오래 모셔 온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는 지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 * *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집무실의 문을 닫자마자 세실은 조용히 수리를 다그쳤다.
“뭘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하고 태연한 말투로 수리는 말했지만, 세실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는 그도 분명히 알았다.
위험한 짓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수리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비오스트에게 맞서는 것이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다신 그러지 마세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세실은 점잖게 충고했다. 그리고는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향해서 발을 돌렸다.
“싫은데요.”
하지만 되돌아온 점잖지 못한 반발에 세실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심각한 표정의 세실과는 달리 수리는 싱긋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똑같은 일이 생긴다면, 또 나설 겁니다.”
“이것 보세요, 시종……”
“수리입니다.”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세실이 모를 리 없는 자신의 이름을 되짚어 주었다.
“이전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지 않나요? 저는 제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요.”
“저 역시 지금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유모님의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로 했습니다.”
“제 말을 들으세요. 세상에는 좋은 여자가 많습니다. 저처럼 나이 많고, 재미도 없고, 수리 님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좋은 분을 만나세요. 여섯 살이나 세상을 더 살아 본 사람의 충고입니다.”
“싫습니다.”
수리의 대답은 깔끔하고, 단호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에 세실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수리는 그런 세실을 보며 또 피식 웃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제가 지금 꼴통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수리는 그런 자신이 신기했다. 자기가 이렇게 꼴통처럼 굴 수 있다는 것이.
“세실.”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가 제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 세실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던 게 뭔지 압니까?”
“글쎄요.”
“돈입니다.”
지극히 속물적인 대답에 세실의 이맛살이 다시 찌푸려졌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옷과 좋은 집을 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권력을 가지며, 명예도 살 수 있습니다. 저같이 작위와 영지를 이어받지 못한 이름뿐인 귀족이 가장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계단이 바로 돈이지요.”
수리는 자신이 돈을 밝힌다는 것을 숨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광고하고 다녔다. 황태자의 측근이 돈을 밝힌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든 그와 연을 닿게 하려고 은밀히 뇌물을 바치도록 말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보다, 내 눈에 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이더군요.”
능글맞은 미소를 가득 띤 채, 수리는 세실의 앞으로 다가섰다. 여전히 찌푸린 미간에 수리의 손이 가볍게 닿자, 세실의 눈이 살짝 크게 떠지며 주름이 사르르 펴졌다.
예쁘다.
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짐작하셨겠지만, 그게 바로 유모님이었습니다.”
“취향이 고약하시네요.”
“그러게요. 제 취향이 이렇게 늙고, 고리타분하고, 절 무시하는 여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수리의 말에 겨우 펴져 있던 세실의 미간이 다시 꿈틀거리며 주름을 만들었다. 제가 아까 한 말과 똑같은 말이었지만, 교묘히 더욱 기분 나쁜 표현에 저절로 그리된 것이었다.
예쁘다.
수리는 인상을 쓴 세실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좋아, 세실.”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진 고백이었다.
“당신을 웃게 해 주고,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놀란 표정의 세실을 보고도 수리는 예쁘다고, 참으로 예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