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45화 (45/88)

45.

상처로 인해 열이 오를 수도 있으니 지켜봐야 한다고 의원은 이야기했지만, 라일라는 쌔근쌔근 잘도 잤다.

감은 눈은 아기 같았고, 작은 숨을 내뱉는 입술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와도 같았다.

아니, 같은 것이 아니었다. 라일라는 아무것도 몰랐다.

“바보 같은 여자.”

라일라의 옆에 누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비오스트는 중얼거렸다.

“멍청한 것.”

툭 하고 내뱉은 말은 분명 라일라를 향한 것이었지만, 라일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자고 있을 뿐이었다.

푸석푸석하던 머릿결은 세실의 손길이 닿아 어느새 매끈하고 탐스럽게 변해있었다.

머릿결만이 아니었다. 거칠었던 피부도 보드라워져 있었고, 처음에는 뼈가 툭툭 튀어나와 있었던 라일라의 마른 몸도 이제는 조금 살이 올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채 자라지 못한 키는 이제 와 어찌할 수 없었고, 아직은 여전히 마른 체형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두막의 그 예민하고 히스테릭했던 첫 만남을 생각해 보자면 라일라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바보 같은 여자. 훌륭하고 훌륭하신 황태자가 왜 널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응? 완벽한 남자가 왜 너같이 말라비틀어진 여자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의심해 봤어야 하는 것 아니야?”

무방비한 얼굴로 자는 라일라를 향해서 비오스트는 중얼거렸다.

“왜, 어째서, 넌 이토록 무조건적인 거지? 내 말이라면 다 믿고, 나라면 모두 훌륭하고, 내가 지독하고 추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왜 의심하지 않느냔 말이야. 왜 내가 너의 완벽한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

원망 아닌 원망이었고, 책망 아닌 책망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비오스트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라일라를 이렇게 만든 것 역시도 자신이었다.

함정을 설치하고, 교묘하게 유인해 놓고, 마침내 사냥감이 날카로운 덫에 걸려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꼴이라니.

그것이야말로 바보 같고,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비오스트는 듣지도 못하는 라일라를 향해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비오스트는 가만히 라일라의 몸 쪽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며 그녀가 숨을 쉬고 있음을 알렸다.

“이 안에 있는 거지?”

공허한 질문이 방안에 표표히 흘렀다.

“너와 내 피가 섞인, 저주받은 생명이.”

비오스트는 조용히 제 머리를 끌어다가 라일라의 배 위에 얹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라일라의 숨과 피부 결을 타고 흐르는 라일라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너의 생명을 앗아 가고, 나를 파멸시킬 작은 괴물.”

* * *

아침에 눈을 뜬 라일라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아픔이었다.

“아파…….”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일라는 이미 텅 비어 버린 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살짝 구겨진 시트와 가운데가 파인 베개가 어젯밤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옆에 있었던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방 안을 두둥실 떠돌아다니고 있는 비오스트의 체취도.

“흐음~”

라일라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숨을 들이쉬었다. 코 안 가득히 비오스트의 냄새가 채워졌다.

예전에는 자신에게서 나는 악취가 너무 심해 다른 냄새는 거의 맡지 못했던 라일라였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악취가 사라지면서 다른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음식에서는 그 냄새를 맡으면 배가 고파지는 냄새가 났다. 게다가 그 냄새를 맡으면서 음식을 먹으면 더욱 맛있었다.

꽃에서는 모양만큼이나 아름다운 냄새가 났다. 아주 가끔 이상한 냄새가 나는 꽃도 있긴 했지만, 처음 꽃향기를 맡는 라일라에게서는 그마저도 향기롭게 느껴졌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냄새를 가지고 있었고, 세실은 그게 사람 고유의 체취라고 말했다.

세실은 말린 과일 같은 냄새가 났다. 약간의 꽃향기도 함께.

세실은 웃으면서 자신이 향수를 뿌려서 그럴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향수는 고가의 제품이긴 하지만, 높은 분들을 모시는 사람들은 나쁜 냄새가 나면 안 되니까 보통 다 향수를 뿌린다고 이야기했다.

가끔 보았던 비오스트의 시종인 수리에게서는 연못의 물이끼 같은 냄새가 났고, 황태자궁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에게는 마른 장작 같은 냄새와 약간의 땀 냄새, 그리고 기름 냄새가 났다.

그리고 비오스트에게서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났다.

“흐음…….”

라일라는 그의 체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 다시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세실이 꽂아 놓은 꽃병의 꽃냄새와 창문 바깥에서 느껴지는 아침 냄새,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비오스트의 체취가 느껴졌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솔방울의 냄새가 약간, 나무 위에서 지저귀다 라일라가 쳐다보면 포르르 날아가 버리는 산새의 냄새도 약간, 장작이 타들어 갈 때 나는 불의 냄새도 아주 조금, 그리고 라일라가 정말 좋아하는 팬케이크에 뿌리는 메이플 시럽과도 같은 달콤한 냄새도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냄새는 라일라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였다.

“좋아.”

라일라는 비오스트가 베고 누웠을 베개 위로 풀쩍 제 몸을 뉘었다. 그리고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충분히 그의 냄새를 맡았다.

라일라의 콧속을, 머릿속을 비오스트의 냄새로 가득 채우자 라일라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좋아…….”

비오스트의 체취도, 비오스트도.

* * *

“아야!”

“괜찮으십니까?”

아픔에 라일라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르자 소독을 하고 있던 황실 의원이 손을 멈추고 라일라의 기색을 살폈다.

“괜찮아.”

벌써 몇 번이나 받았던 소독인데 새삼스럽게 소리를 지른 것 같아서 무안해진 라일라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라일라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비오스트였다.

눈이 마주치자 라일라는 괜찮다는 듯이 살짝 웃었고, 비오스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눈빛과 함께.

처음에 붕대를 풀고 나서 제 상처를 보고 기절할 뻔한 라일라였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나와 말라붙은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피를 머금어서 검붉은 실이 자신의 살을 재봉질해 놓고, 두 살 껍데기가 서로 꼭 달라붙어 오그라들어 있었으니 그걸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제 실을 제거해도 되겠군요.”

“그래? 많이 나은 거야?”

“네. 하지만 겉피부만 붙은 상태이니 여전히 행동에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쪽 근육까지 온전히 붙으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꼼꼼히 상처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황실 의원은 말했다.

“알았어. 조심할게.”

라일라는 문제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는 그녀가 영 미덥지 않았다. 다친 당일에 상처가 벌어져서 다음 날 다시 생살을 꿰맬 뻔한 라일라였다.

다행히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자신이 했을 때 황태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그야말로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황실 의원인 그는 라일라가 누군지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녀의 배 속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임신 진단을 한 것도 그였다.

‘거참.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황손부터 만드시더니, 그렇게도 좋으실까?’

언제나 온화하고 넓은 아량을 보여 준 비오스트가 그렇게 누군가를 노려보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이 자그만 아가씨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라고 의원은 생각했다.

“자, 그럼 이제 실을 뽑겠습니다. 좀 아프실 수도 있습니다.”

“아, 아파?”

의원의 말에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픈 것은 싫었다. 지금도 손의 상처는 가끔 쑤시고 아파서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아프다니.

“조금 아프실 수 있고, 그리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실 겁니다.”

가위와 핀셋을 든 의원이 그렇게 말하자, 라일라는 더욱 겁이 더럭 났다. 괜히 입술이 바싹 말라서 혀를 내밀어 적셨다.

“라일라?”

라일라의 긴장된 모습을 눈치챈 비오스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줄게요.”

“괘, 괜찮아.”

“무섭잖아요.”

“무, 무섭긴 누가!”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괜히 센 척을 하며 고개를 팽 돌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고개를 돌린 쪽이 의원이 있는 쪽이었고, 제 상처를 정면으로 보게 된 라일라의 얼굴에는 더욱 핏기가 없어졌다.

자신의 상처지만, 아직도 그 징그러운 모습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보통은 붕대를 감아 놓으니 더더욱 그랬다.

“잡아요.”

손을 내미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비오스트가 먼저 라일라의 손을 잡아 버리자, 이미 잡혀 버린 손을 굳이 빼지는 않았다.

톡.

의원이 실을 자르자 흠칫하고 라일라의 어깨가 굳어졌다. 이어지는 실이 끊어지는 소리와 가위질 소리에 라일라의 어깨는 멈출 줄 모르고 움찔거렸다.

“읏!”

그리고 의원이 실을 빼낼 때, 라일라는 무언가 제 살의 안쪽을 스쳐 지나가는 느낌과 따끔함에 몸서리를 쳤다.

“괜찮아요.”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조용히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비오스트의 눈에서 점점 초점이 사라졌다. 라일라가 아픔을 참는 앓는 소리를 낼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움찔댈 때마다, 천천히 비오스트의 눈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작은 아픔도 힘겨워하는 이 작은 여자는 곧 고통에 몸부림칠 것이다.

그때도 괜찮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정함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이 가녀린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을 거라고, 다 잘될 거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비오스트는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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