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44화 (44/88)

44.

“너, 너는…….”

검은 짐승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맞지? 그때 그 아이지?”

라일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짐승이 마녀사냥의 날에 보았던 그 짐승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말했다.

주둥이에는 피를 묻힌 채, 고양잇과 특유의 세로로 찢어진 눈이 라일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전에 사람을 해친 것을 분명 보았지만,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라일라에게는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저 짐승이 자신을 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오두막에서도. 지금도.

“여기는 어떻게 온…… 읏!”

라일라는 떨리는 손을 짐승을 향해서 뻗다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손을 움츠렸다. 그러자 짐승의 금안이 일순 흔들리는 것이 라일라의 눈에도 보였다.

“아, 아파!”

칼에 손을 꿰뚫렸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으며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녀의 안색을 새파랗게 질리게 만든 것은 손이 아니라 또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배, 배가……!”

피 묻은 손이 라일라의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힘을 줘서인지 손의 상처에서는 더욱 많은 피가 흘러나와 드레스를 적셨다.

“아, 아가야…….”

라일라는 가는 철사가 배를 조여 오는 것 같은 고통에 더 이상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자 보이는 것은 검은 짐승 한 마리뿐이었다.

지금 라일라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쓰러지지 않게 제 손을 잡아 주고, 의사를 부르는 소리를 치고, 지금의 상태를 자신에게 말해 줄.

저 짐승이 영물이라면 제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눈빛으로 알아차려 주길 바라며 라일라는 간절함을 담아 그것을 바라보았다.

“읏!”

또 한 번 배 속이 조이듯이 아파졌다. 어느덧 고통으로 라일라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고통에 잠식된 다리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스르륵 힘이 풀려 버렸고, 라일라는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라일라의 팔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허공을 휘저어 보지만, 붙잡을 것이 없었다.

“아앗…….”

속절없이 라일라가 바닥으로 쓰려지려는 찰나였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짐승이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라일라의 쪽으로 움직였다.

‘아……!’

그리고 라일라의 눈에 비친 것은, 그 짐승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짐승의 탈을 벗고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두툼한 뒷발이 바닥에 닿은 순간, 그것은 기다란 사람의 다리가 되었다. 허공에 떠 있던 앞발은 어느새 쑤욱 길어지고 손가락이 돋아나 사람의 팔이 되었다.

온몸에 돋아나 있던 검은 털은 어느덧 옷을 갖춰 입은 사람이 되었고, 둥그렇고도 날카롭던 얼굴은 이목구비를 또렷이 갖춘 사람이 되었다.

라일라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비, 비오스트…….”

그의 이름을 부르며 라일라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려는 순간, 비오스트가 미끄러지듯이 몸을 날려 라일라의 몸을 낚아챘다. 라일라의 몸은 차가운 바닥에 부딪히는 대신 비오스트의 품으로 안겼다.

“라일라.”

제가 본 것이 거짓이 아님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피 흘리는 라일라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대신해서 그녀의 배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괜찮아.”

다정한 속삭임 속에는 초조함이 있었다.

“괜찮아질 거야.”

자신을 다독이는 목소리 속에 불안감이 배어 나왔다.

다정한 속삭임과 따스한 손, 그리고 아늑한 품속에서, 라일라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두 생명체가 아니었다.

라일라의 구원자는 오직, 한 명이었다.

* *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기였다.

“아기!”

라일라는 손을 더듬어 제 배를 만졌다. 잠옷 너머의 배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라일라는 정신없이 잠옷을 걷어 올리고, 제 배를 다시 더듬었다.

이제 조금 부풀어 오른 배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일라, 괜찮아요.”

침착한 목소리가 라일라의 손을 붙들었다.

“아, 아기는? 아기는 괜찮아? 배가, 배가 아팠어. 배가 엄청 아팠다고. 아기가 아파서 그런 건지도 몰라!”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목소리로 라일라는 비오스트의 손에 매달려 물었다.

“아기는 괜찮아요. 당신이 놀라서 그런 것뿐이라고 황실 의원이 말해 주고 갔어요.”

“정말? 그게 다야? 아기는 괜찮은 거야?”

“그래요.”

“하아…….”

몇 번이나 거듭 묻고, 또 몇 번이나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라일라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손을 배에서 떼어 내도 버티던 아까와는 달리 순순히 제 손을 치웠다.

“손은 아프지 않아요?”

“응?”

비오스트의 말에 라일라는 그제야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붕대가 감겨 있었고, 흰 붕대에 조금씩 붉은 핏물이 들어 가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야 하는 손을 마구 움직인 탓이었다.

아플 터였다. 칼에 찔리면, 피가 나면, 누구나 아픈 법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제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며 제 손에 감긴 붕대를 쳐다보고 있던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파.”

그제야 아프다는 말에 비오스트는 할 말을 잃었다.

“괜찮아. 나을 거니까.”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계속 핏물이 배어 나오는 손을 흔들어 보이는 라일라를 보며, 비오스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보다는 아기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라일라는 웃었다.

자신의 말에 동의해 주길 바라는 듯이, 비오스트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뭐가, 대체 뭐가 다행이에요. 당신은 다쳤잖아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고 있던 비오스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너무 늦다고 생각했다. 피 묻은 황가의 문양이 수놓인 천을 움켜쥐고, 라일라가 있는 방문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이미 낯선 복면의 사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더불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도.

경비병을 부르기에는 당연히 이미 늦었었고, 계단으로 직접 올라간다고 해도 비오스트가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미 상황은 끝나 있을 것이 뻔했다.

라일라의 죽음이라는 상황이.

비오스트의 생각이 거기에까지 다다랐을 때, 그는 발은 이미 뒷발로 변하고 있었다. 그 뒷발로 인간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점프한 비오스트는 그대로 벽을 앞발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 이어 뒷발로 다시 벽을 차고 올라 가볍게 창문까지 뛰어올랐다. 보이는 것은 피를 흘리는 라일라와 재차 그녀를 해하려는 남자였다.

‘감히!’

비오스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로 남자의 목덜미를 노렸다. 커다란 송곳니가 부드러운 사람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고, 비릿한 피의 맛이 느껴지자 비오스트는 그대로 목을 옆으로 젖혔다.

‘네까짓 놈들이!’

라일라를 다치게 만든 자의 피가 튀고, 살점이 튀어 올랐다.

‘감히 누구를!!’

피를 보자 더욱 멈출 수 없었다. 차가운 분노가 들끓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라일라가 자신을 바라보기 전까지, 그녀가 쓰려지려고 하기 전까지는.

‘라일라!’

입이 아니라 아가리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쓰러지는 그녀를 앞발로는 받아 낼 수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는 저 가녀린 몸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먼저 라일라를 향해서 뛰었고, 그녀의 몸에 닿기 위해서 변해야 했다.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금방 나을 거야. 이 정도는.”

라일라는 그저 웃었다.

제 손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는 것도 모르면서, 혼절한 틈을 타서 황실 의원이 제 손바닥과 손등을 실과 바늘로 꿰맸다는 것도 모르면서, 어쩌면 신경 손상이 있어서 손을 제대로 못 쓸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라일라는 그저 아기가 괜찮다는 말에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아프게 비오스트의 가슴에 박혔다는 것 역시도, 라일라는 몰랐다.

“그것보다, 비오스트?”

자신의 손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젖혀 두며, 라일라는 자못 진지하게 비오스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당신이었던 거지?”

“…….”

“그때 오두막에 불이 나던 날에, 날 구해 준 그 검은 동물이 당신이었던 거지? 오늘 날 구해 준 것도 당신인 거고.”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변신하는 모습을 다 보여 줘 놓고 라일라가 잘못 본 것이라고, 꿈을 꾼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요. 온라이언 황실의 피를 이은 자는 신성한 재규어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어요.”

비오스트는 담담히 고백했다.

이제 그를 보는 라일라의 눈빛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다정하고 착한 남자를 연기해 왔는데, 사실은 짐승으로 변하는 데다가 그 모습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미 목격한 라일라였다.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혐오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임신을 시켰으니 그렇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비오스트는 생각했다.

“역시!”

하지만 비오스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대답을 들은 라일라는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비오스트! 나는, 정말, 당신에게 뭘 어떻게 보답해야 하지?”

“라일라?”

“넌 날 몇 번이나 구했어. 내 목숨을 구하고, 날 위험에서 구하고, 내 인생을 구했어!”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이미 물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고통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벅차올라서, 자신의 인생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해서 나오는 눈물이 라일라의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비오스트, 내 인생의 구원자. 당신이 정말…… 좋아.”

라일라의 따스한 고백이 비오스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공금)(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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