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46화 (46/88)

46.

“신분을 추정할 만한 유류품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수리의 말에 비오스트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비록 황태자궁이 황태자인 본인이 기거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고, 지금 머무는 사람이 정식으로 황태자비의 책봉도 되지 않은 시골 귀족 영애인 라일라뿐인 데다가 의도적으로 시중과 경비를 볼 인원도 줄인 터라 경비가 허술하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황궁 안이었다.

감히 황궁의 경비를 뚫고, 몰래 잠입한 실력 있는 자들이 허술하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금니에서는 독이 든 캡슐도 발견되었습니다. 만일의 경우 자살까지 고려한 것으로 보아 전문적인 암살 교육을 받은 자들인 듯합니다.”

“그 교육을 직접 한 것일까, 아니면 돈으로 산 것일까?”

비오스트는 고개를 돌려 수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질문에 수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을 물으신다면, 저는 돈으로 산 자들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게 수월하니까요. 사병이라면 대외적으로 육성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본래 수보다 부풀리게 대외적으로 말해서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더 많죠. 하지만 암살자는 다릅니다. 뒤로 은밀히 길러내야 하지요. 만약 그게 알려진다면 정적들의 경계를 받고, 비겁한 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겁니다.”

제법 논리적인 수리의 말에 비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밝히는 것이 좀 흠이기 했지만, 역시나 눈치와 생각이 빠른 시종이었다.

“그게 저들을 보낸 자들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직접 기른 자인지, 돈으로 산 자들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

반대로 수리가 질문하자 비오스트는 거의 바로 대답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누군지는 이미 짐작이 가.”

“네?”

“넌 모르겠어?”

“네.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중을 위해서 여기저기 손을 쓰신 탓에 황태자 전하를 죽이겠다고 하는 자들이 이제는 제법 되는 것 같은데요. 옆 공국의 라치네 대공, 블레어 백작, 폰셀만 후작.”

수리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 가며 비오스트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자를 꼽았다.

라치네 대공과 그 아들을 이간질하고, 새어머니와 정분이 나서 야반도주를 해 세기의 스캔들을 만든 사람이 비오스트였다. 라치네 대공으로서는 비오스트를 죽이고 싶을 것이 당연했다.

자신의 후계자를 아예 죽여 버린 블레어 백작 역시 비오스트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것이 뻔했고, 계략에 빠져 상선 다섯 척을 황태자에게 헌납하게 생긴 폰셀만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저 셋인데, 저 셋 중 누구라고 해도 저는 놀라지 않을 겁니다.”

“블레어 백작이야.”

“네?”

“왜 놀라지? 셋 중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거라며.”

비오스트는 놀라는 수리를 비웃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얼마 전에, 아니 이제 시간이 좀 지났군. 황제가 날 불러서 블레어 백작가의 후계자가 익사한 건에 대해서 말을 하며 자중하라고 하더군. 황제께서 알아차렸다면, 다른 누군가도 알아차릴 수 있겠지.”

“하지만 대체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암살자는 이미…….”

“죽었지.”

비오스트는 빙긋이 웃었다. 그때 황제는 암살자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고, 자신은 그저 실력이 뛰어난 자를 쓴 모양이라고 눙쳤었다.

하지만 사실 암살자는 목표물인 블레어 영식이 죽은 그날, 자살했다. 그저 평범한 무두장이이자, 두 딸의 아버지였던 그를 암살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고치지 못하는 폐병이 도져, 작업장에서 쓰러져 죽은 것이라고만 다들 생각했다. 또한, 과부가 된 그의 부인과 두 딸이 조용히 마을을 떠난 것은 그저 혼자 남았으니 친정으로 이사를 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은 시한부인 그가 누군가의 은밀한 사주를 받아 부두 아래에서 벌벌 떨며 기다리다가 배를 살피러 온 블레어 영식의 발목을 잡아당겨 그를 죽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그의 생명의 대가로 그의 부인이 거금을 가지고 다른 곳에서 그의 두 딸을 키워 낼 수 있었다는 것 역시.

“직접적인 증거는 없을 거야. 있다면 당장 항의를 해 왔겠지. 증거를 들이대며 신이 나서 당장 황태자를 폐위시켜야 한다며 황궁으로 쳐들어왔을 테니까.”

바로 그 점 때문에 비오스트가 블레어 백작가를 손봐 준 것이었다. 그는 비오스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현재 발터국과의 교역세를 내리기를 바라는 블레어 백작가는, 외려 세율을 더 올리려고 하는 황태자의 주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세상에 유순해진 블레어 백작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차기 블레어 백작이 될 후계자라는 놈은 감히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다느니,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황태자라니 하는 말을 지껄이고 다녔다.

비오스트는 그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때, 반대할 것 같은 목소리는 조용히 닥치게 만들어야 했다.

“정말 블레어 백작이 맞을까요?”

“그래. 아무래도 블레어 백작이 내 생각보다 제 아들을 끔찍이 여긴 모양이야. 제 아들의 목숨값으로 내 아들을 죽이려고 든 걸 보면 말이야.”

“그게 그런 뜻입니까?”

“나보다는 라일라를 노리는 것이 더 손쉽다는 이유도 있겠지.”

비오스트는 블레어 백작의 심중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 황태자궁의 경비를 더욱 강화해야 할까요? 라일라 님의 입궁 때문에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둔 상태니, 다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인력은 충분합니다.”

“아니. 그대로 내버려 둬.”

“하지만 작전에 실패한 블레어 백작이 다시 음모를 꾸미기라도 하면…….”

“그럴 리 없어.”

비오스트는 수리의 생각이 터무니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너무도 확실하게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하는 비오스트의 말에 수리는 눈만 깜박였다.

평소의 비오스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그였다. 게다가 사고방식이 부정적이고, 사람을 믿지 않는 구석까지 있는 비오스트였다.

그런 그가 블레어 백작이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저렇게 낙관적으로 단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리.”

비오스트가 수리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없었다.

“블레어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거야.”

명망 높은 백작가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비오스트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하지만 블레어 백작가는 온라이언의 명망 높은 가문 중의 하나이고, 재력으로 말하자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없어질 가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도 싹을 자르는 정도로 끝내자고 말씀하신…….”

설득 아닌 설득의 말을 늘어놓던 수리는 날카로운 비오스트의 눈빛을 받자, 저절로 입이 딱 붙어 버렸다. 마치 목에 칼이 겨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넌 눈치가 빨라. 거기서 더 반대의 말을 지껄이면, 너부터 조져 놓을 생각이었거든.”

비오스트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라일라를 다치게 만든 블레어 백작가를 멸문시켜 버리기로.

그것이 힘들다거나, 손해가 난다거나 하는 부분은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의 비오스트는 오로지 보복과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마녀라더니 이 미친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제 수리의 안에서 두 가지가 분명해졌다.

첫 번째는 블레어 백작가가 곧 멸문을 당하리라는 것.

두 번째는 안 그래도 미친놈이었던 황태자가 이제는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다는 것.

* * *

“L…… L…… L…….”

다른 그림 찾기라도 하듯, 라일라는 책의 이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잘못 꽂힌 책을 찾아내면 보물이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좋아했다.

“앗!”

잘못 꽂힌 책을 또 찾아낸 라일라는 얼른 그 책을 뽑아냈다.

“L이 아니라 I였어.”

뿌듯한 표정으로 책을 쳐다보며, 라일라는 타박하듯 중얼거렸다.

“아!”

책의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려던 라일라는 갑작스러운 아픔에 인상을 찌푸리며 아픔의 근원을 감싸 안았다. 이제는 둥그스름하게 제법 드레스 위로 부풀어 오른 배를.

“읏……!”

배 속에서 작은 바늘로 콕콕콕콕 찍어 내는 듯한 아픔은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라일라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아가, 넌 발길질도 참 세게 한다. 게다가 좀 신경질적인 거 같아.”

썰물처럼 고통이 빠져나가고 나자 라일라는 배를 쓰다듬으며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아빠는 순한 사람이니, 이건 내 못된 성질을 닮아 그런 걸까?”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세실에게 아이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아마도 아기가 발길질하는 것 같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는 이런 아픔도 아기가 자라고 있어서라고 생각하면 그저 기특하기만 한 라일라였다.

“부탁인데 날 닮지 말고 네 아빠를 닮아 줘. 네 아빠는 아주 멋있고, 근사하고, 다정하고, 아주 착한 사람이거든.”

둥근 배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라일라는 아기에게 당부했다.

“엄마를 발로 차지 말고 기다려. 그럼 L만 끝내고 나서 동화책을 읽어 줄게. 아까 L로 시작하는 아주 예쁜 제목의 동화책을 발견했거든. 아마도 태교에 좋을 거야. 그럼 네 성질도 네 아빠를 닮아서 유순해지겠지.”

배 속의 아기에게 협상 아닌 협상을 제시하며 라일라는 아까 발견한 잘못 꽂힌 책을 집어 들고 I칸을 향해서 걸었다.

라일라가 올바른 자리에 막 책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톡톡- 하고 무언가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라일라와 눈이 마주치자 유리창 밖의 황금색 눈동자가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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