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라일라는 수틀을 움켜쥔 채, 문을 벌컥 열고 온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복면을 쓰고 있는 것을 봐선 결코 좋은 의도로 이 방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재빨리 도망칠 구석이 있는지를 살핀 라일라였지만, 이 방의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인 문은 이미 저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라일라가 손에 든 것이라고는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며 수를 놓고 있던 수틀과 바늘 하나뿐이었다.
“네가 황태자의 아이를 가진 여자냐?”
검은 복면 너머의 굵은 목소리가 라일라에게 물었다.
“…….”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라일라는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수틀만 더욱 세게 움켜쥐면서.
‘세실…….’
밖으로 나간 세실이 언제 돌아오는 건지, 혹은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잘 모르긴 해도 경계가 삼엄한 황궁 안까지 침입한 자들이라면 보통내기들이 아닐 텐데.
“말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남자의 날카로운 눈이 라일라의 배를 향했다. 순간, 라일라는 그들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아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라일라의 눈이 더욱 다급하게 방 안을 훑었다.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이, 혹은 숨을 곳이, 그것도 아니라면 달아날 곳이 필요했다.
‘창문!’
파란 하늘에 무심하게 떠 있는 구름이 보이자 라일라는 그곳이 또 다른 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너무 높아서 안전한 출구는 될 수 없을지언정, 그래도 밖으로 통하긴 했다.
“잡아!”
라일라의 눈이 창문으로 향한 것을 눈치챈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양옆에 있던 남자들이 라일라를 향해서 달려왔다. 그리고 라일라 역시 그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곧장 창문으로 달렸다.
혹시 몰라 수틀을 움켜쥐고, 라일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막 라일라의 손이 창틀을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악!”
억센 손이 라일라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던 라일라의 몸은 그대로 멈춰 버렸고, 동시에 잡힌 머리카락 때문에 입에서는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몸을 버둥거려 보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다른 남자 하나가 라일라를 얌전히 만들기 위해서 한쪽 팔을 붙잡았다.
붙잡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라일라는 본능적으로 한 손에 들고 있던 수틀을 세게 남자를 향해서 휘둘렀다.
“으윽!”
어찌나 세게 내리쳤던지, 단단히 천을 고정하고 있던 수틀은 남자의 어깨에 부딪혀서 산산조각이 났고, 거꾸로임에도 불구하고 바늘은 그대로 남자의 어깨에 꽂혀 버렸다.
“이게!”
작고 왜소한 라일라가 이렇게 거세게 저항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남자는 방심했던 만큼이나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의 어깨에 꽂힌 바늘과 연결된 실을 확 잡아당기자 라일라의 손에 남아 있던 수틀 조각과 천 조각이 하릴없이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읏!”
날카롭게 깨어진 수틀 조각이 라일라의 손을 베고 지나가며, 붉은 선혈이 흰 천 조각에 흩뿌려졌다.
“이봐, 아가씨. 순순히 말을 들으면, 아가씨 목숨 정도는 살려 줄 수도 있다고.”
가치 없는 쓰레기처럼 남자가 창밖 너머로 실과 연결된 바늘과 완성되지 못한 천을 집어 던졌다.
“…….”
남자의 말에 라일라는 제 손으로 배를 가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옆에 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던 남자도,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서도.
“순순히 말을 듣지는 않을 모양이군.”
손으로 배를 감싸며 자신을 노려보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 라일라를 보며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쩍 뒤를 보며 대답을 구하자, 뒤에 있던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는 그 고갯짓의 의미를 몰랐지만, 그들은 알았다. 아이와 여자를 함께 죽이라는 뜻임을.
스르릉.
고운 소리를 내며 남자의 검이 검집에서 불려 나왔다. 그것을 본 라일라는 흠칫하며 더 뒤로 물러났다.
저 날카로운 검이 아기를 다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럭 겁이 났다. 자신이 저 검에 다친다는 생각은 두 번째였다.
두 손으로 배를 감싸며 뒤로 물러난 라일라의 뒤로 턱 하고 벽이 닿았다. 당황하며 벽을 더듬어 보았지만, 더는 물러날 곳도 도망갈 곳도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라일라는 몸을 틀었다.
“어딜!”
라일라의 생각이 빤히 보인다는 듯이, 남자는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혹여 창문으로 뛰어내릴 생각은 말라는 듯이 라일라와 창문 사이를 가로막은 남자 역시 제 동료를 따라 검을 빼 들었다.
뒤에는 벽, 양옆으로는 칼을 든 남자 둘, 그리고 출입구에는 또 다른 남자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음을 절실히 느낀 라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 요량으로 라일라는 입은 열었다. 시간을 끌다 보면 세실이 와주지 않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네가 그것까지는 알 필요가 없어.”
“왜 죄 없는 아기를 해치려고 하는 거야? 아직 작은 아기일 뿐인데.”
“아비를 잘못 둔 아기지. 원망은 우리를 먼저 건드린 황태자에게 하도록.”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다는 듯이 남자는 라일라 쪽으로 한 걸음을 더 다가왔다. 자신 역시 이런 여자를, 거기다가 아이를 밴 여자를 해하는 것이 조금은 꺼려지는지 복면 위의 얼굴에서 난감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굳은 결심을 한 남자는 정확하게 라일라의 배를 노리고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안 돼!”
그야말로 본능적인 손이었다. 라일라는 아기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말라빠진 하얀 손가락 따위는 그 검을 막아 낼 수 없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마치 자신의 손을 제물로 바치고 아기를 구해 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으으윽!”
날카로운 검이 라일라의 손바닥에 그대로 꽂혔다. 살을 꿰뚫고 나온 검에서는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남자는 자신의 검이 원래 목표했던 곳에 닿지 않았음을 알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복면 속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배 속의 아이를 지키려 칼 앞에 맨손을 내민 여자의 모성애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들이 받은 명령은 황태자궁에 숨어들어 황태자의 아이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의사가 아니라 검사였고, 암살자였다. 임산부에게서 아이만을 죽이고 여자를 살려두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운이 좋으면 여자는 살아날 수도 있었다. 아주 어쩌면, 극히 낮은 확률로.
남자는 라일라의 손이 꽂힌 채로 자신의 검을 더욱 그녀의 쪽으로 찔러 넣었다. 검의 날이 이번에는 라일라의 배를 꿰뚫고, 그 안의 작은 생명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도록.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팔을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어……?”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또 참으로 이상하게도 빙그르르 시선이 돌았다. 그리고 쿵!
남자의 관자놀이가 거세게 어딘가에 부딪혔다.
뭐지? 이게 뭐지?
어리둥절한 남자의 눈앞에 무언가 시꺼먼 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그게 고양이의 앞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고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두툼했다. 고양이와 닮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큰 검은 짐승의 앞발이 느릿하게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자신의 동료의 경악스러운 목소리도 들렸다. 그다음에 보인 것은, 붉은 피였다. 아주 붉고, 아주 뜨거운 피가 어딘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 어어…….”
이상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뭐지? 무슨 일이지?
남자는 아직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피가 솟아 나오고 있는 근원지를 매만졌다. 그제야 고통이 샘솟았다.
“으, 으어…… 어억…… 으어억…….”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왜인지는 손으로 만져서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지옥에서 갓 올라온 것처럼 검은 짐승이 자신의 목을 물어뜯었다. 너덜너덜하게 뜯겨 나간 목에서는 피가 샘솟고 있었고, 뜯겨 나간 목으로는 말을 할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끄…… 끄어어…… 어…….”
“미, 미친!”
제 동료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며 또다른 복면의 사내는 그 소리밖에 할 수 없었다.
갑자기였다. 그야말로 갑자기 창문에서 저 짐승이 솟아났고, 제 동료의 목을 그대로 물어뜯었다.
뜨끈한 동료의 피가 제 얼굴을 적시고 나서야 남자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자신이 이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짐승이 제 앞에 있었다. 그리고 분명한 적의를 드러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쩌…….”
남자는 황망한 시선을 입구의 대장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쪽도 얼이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예상한 것에 이런 짐승의 출현은 없었다. 기껏해야 황실 경비대의 출동이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탈출 경로도 세워 놓았고, 만약의 경우를 위해 음독자살까지 준비해 둔 그들이었다.
하지만 맹세코, 이런 것이 튀어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느릿한 짐승의 꼬리가 춤을 추었다. 홀린 듯이 그것을 쳐다본 순간, 커다란 앞발이 자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으아……!!!”
남자의 비명은 채 끝나지 못했다. 제 동료와 똑같은 부위를 물어뜯겼기 때문이었다.
“재, 재, 재규어…….”
이제 혼자 남은 입구의 남자는 그대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온라이언 황실은 재규어가 보호한다는 것이 사실이었…….”
검은 재규어는 남자가 더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은 듯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를 덮쳤고, 그의 경악한 얼굴을 잠시 감상한 뒤, 다시는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제 방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검은 짐승과 라일라뿐이었다.
아! 라일라가 지키려 했던 아주 작은 생명까지 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