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32화 (32/88)

32.

“이런, 눈이 많이 부었네요.”

비오스트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하며, 목소리만큼이나 안타까운 손길로 라일라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렇게 울지 말라고 부탁을 했는데, 또 운 건가요?”

“그, 그런 것 아니야.”

비오스트의 책망 아닌 책망에 라일라는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이 아직은 어색하고 이상한 라일라였다. 동시에 마음의 어딘가가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싫지만, 싫지만은 않은 기분. 지금 라일라가 느끼는 감정은 딱 그것이었다.

“라일라.”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라일라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비오스트는 그대로 라일라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당신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일라의 눈을 바라보며 비오스트는 말했다. 지금 이 말만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봤을 때, 비오스트는 오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안쓰럽고, 안타까운 기분. 그녀를 감싸 안아 주고 싶은 느낌. 자신이 느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죄책감까지도 느껴졌다.

그래서 비오스트는 라일라가 울지 않았으면 했다.

“울지 말아요, 라일라.”

라일라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비오스트는 그녀의 부은 눈꺼풀 위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예정된 순서인 것처럼 조금 더 아래, 그녀의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이어서 코끝에도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아, 저기…….”

비오스트의 입술이 라일라의 입술에 닿기 직전, 라일라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막 닿으려던 비오스트의 입술에 라일라의 숨결이 닿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일라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감정은 단숨에 비오스트의 머릿속 어딘가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 대신 자리 잡은 것은 당연히 욕망이었다.

“말해요.”

입술의 간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자신의 몸을 좀 더 바싹 그녀에게로 붙였을 뿐이었다.

“지난번에…… 그게…… 네가 너무 돌변해서 말이야…….”

주춤주춤, 라일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아아…….”

그제야 비오스트는 살짝 고개를 뒤로 뺐다. 당장이라도 라일라를 삼킬 기세였던지라 그렇게 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대단한 인내심으로 겨우 가능했다.

“무서웠어요?”

“무, 무서웠던 건 아니야!”

겁쟁이로 여겨지기 싫었던 라일라는 황급히 비오스트의 말을 부정했다. 사실은 조금 무서웠던 것이 맞았지만.

언제나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비오스트는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돌변했었다. 키스는 거칠었고, 자신의 온몸을 깨물고 빨고, 또 빨아 당기는 행동들은 짐승과 같았다.

게다가 라일라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비오스트는 지치지도 않았다. 그는 밤새도록 라일라를 탐했다.

“그, 그냥……. 그냥 좀 살살 했으면 좋겠어서…….”

“미안해요, 라일라.”

비오스트의 손이 다정하게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그날은 내가 너무 자제가 되지 않았어요.”

마치 그날만 그랬다는 것처럼 비오스트는 말했다. 당장 지금도 라일라의 입에서 허락의 말만 떨어진다면, 자제하지 않을 참이면서.

아니,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었다. 일단 시작되면 자신이 자제하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비오스트는 허락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교묘하게 라일라를 구슬려서 그녀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당장 라일라의 입술을 덮치고, 그녀를 쾌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심산이었다.

“당신이 너무 예뻐서 그랬어요. 솔직히 지금도, 자제가 힘드네요.”

비오스트는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해서 자괴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 비오스트를 보며, 라일라는 또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이 너무 좋아서, 좋아서 자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그 말을 한 사람이 비오스트라는 사실은 더 좋았다.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라일라를 이렇게 원한 사람은 없었다.

“미안해요, 라일라. 만약 당신이 싫다면, 오늘 밤은 그냥 내 방으로 돌아가서…….”

“싫지는 않아.”

비오스트가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자, 라일라는 얼른 그의 말을 잘라 내어 버렸다.

“그냥 좀, 살살 했으면 했을 뿐이야.”

살짝 얼굴을 붉히며 라일라는 고개를 숙였다. 비오스트가 가 버리는 것은 싫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날 밤의 그 감각은 무섭긴 하지만, 기분이 좋긴 했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은 짜릿했고, 그가 만진 피부에서는 열기가 피어올랐고, 비오스트의 입술이 닿은 자리에서는 쾌감이 아프도록 라일라를 찔러 댔다.

“노력할게요.”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비오스트가 제 몸을 라일라에게 바싹 붙여 왔다. 그러자 그의 뜨거운 신체 역시 라일라의 몸에 바싹 붙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라일라는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라일라.”

라일라의 이름을 부른 입술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맞부딪혀 왔다.

조금 전의 노력하겠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젯밤의 그 거친 키스보다는 부드러웠다. 여전히 게걸스럽게 라일라의 입술을 탐하고, 혀를 옭아매고, 타액마저도 모조리 탐하긴 했지만, 아주 조금 느릿한 몸짓이기는 했다.

어젯밤보다 더 빠르게 비오스트는 라일라를 침대에 눕혔고, 어젯밤과는 달리 라일라의 옷을 곧장 벗겨 냈다. 그리고 어젯밤 자신이 남겼던 붉은 흔적들을 혀로 더듬어 나갔다.

“아…….”

축축한 비오스트의 혀가 자신의 피부를 핥아 나가자, 그 자리마다 간지러움과 열기가 피어올라 라일라의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목에서부터, 가슴으로, 그리고 배꼽까지 이어져 나가자 라일라는 어느새 어젯밤보다 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비, 비오스트…….”

허리를 뒤틀며, 라일라는 비오스트의 이름을 불렀다. 라일라의 옆구리에 있는 자신의 흔적을 꼼꼼하게 핥아 가고 있던 비오스트는 부름에 기꺼이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한껏 애타는 표정으로 라일라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더 천천히 할까요?”

라일라의 툭 튀어나온 골반에 입술을 맞추며, 비오스트가 묻자 라일라의 엉덩이가 더욱 들썩였다.

“으읏…….”

베개에 자신의 금발을 비비며 라일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라일라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비오스트는 혀로 동그랗게 라일라의 골반을 덧그렸다.

“아!”

더는 참지 못하고, 라일라는 손을 뻗어 비오스트의 팔을 붙들고 잡아당겼다. 못이기는 척 비오스트가 상체를 끌어 올려 라일라의 가슴에 제 가슴을 바싹 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와 라일라의 배도, 자신의 허벅지와 라일라의 허벅지도.

“노력은 그만해. 이제 됐어.”

마침내 라일라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졌고, 비오스트는 싱긋 웃었다.

“그래요, 라일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요.”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밤에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피곤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햇볕이 따뜻해서인지, 라일라는 정원 산책 중에 나른함을 느꼈다.

“잠시 앉을래.”

정원 한가운데의 정자를 보며, 라일라를 그쪽으로 향했다.

“그럼 조금 이르긴 하지만 차를 준비해 올까요?”

뒤를 따르던 세실이 라일라에게 물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정원에서 차와 간식을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라일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 먹는 맛있는 음식은 다 좋아하는 라일라였지만, 그중에서도 간식을 가장 좋아했다. 오두막에서는 전혀 먹어 볼 수 없었던 디저트들은 매일 다른 것을 먹어도 전부 라일라가 처음 먹어 보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달았고, 어떤 것은 새콤했고, 어떤 것은 고소했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고 나서는 그것들의 향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온전히 그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정자에 몸을 기대며 라일라는 오늘은 무슨 간식이 나올지 기대했다. 새콤한 것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귤이나 레몬으로 만들어진.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고, 따스한 햇볕은 여전히 라일라의 등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른한 기분에 라일라는 슬쩍 눈을 감았다.

여유로운 오후.

평생 자신은 느껴 보지 못할 것 같았던 시간을, 지금 라일라는 만끽하고 있었다.

이대로 잠이 들 것만 같은 때에, 라일라는 눈을 떴다. 조금 전과는 다른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라일라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

황태자궁에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라일라는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분명 비오스트가 말을 했었다. 낯선 사람에게 거부감을 가질 라일라를 위해서 황태자궁에는 최대한 사람을 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 최소한의 사람들도 라일라의 동선에 맞춰서 움직일 것이라고.

그리하여 라일라가 이 넓은 황태자궁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오직 세실과 수리, 그리고 비오스트뿐이었다.

“누구야?”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라일라는 물었다.

“…….”

남자는 대답도 없이 그저 물끄러미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눈에는 놀람과 당황이 어리어 있었고, 살짝 벌린 입술에서도 그것이 묻어 나왔다.

대답 없는 남자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라일라는 찬찬히 그를 뜯어보며 스스로 답을 찾아보려고 했다.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고, 라일라를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는 황금색이었다.

라일라가 아는 금색 눈동자는 오직 한 명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는 서로 달랐지만, 남자의 생김새는 어딘지 모르게 비오스트를 닮아 있었다.

비오스트가 열 살쯤 더 나이를 먹고, 조금 더 차분하게 되고, 또 머리를 백금발로 염색을 하게 되면 이런 분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었다.

“훗.”

라일라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퍽 즐겁다는 듯이 남자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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