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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꽃-31화 (31/88)

31.

“아니, 누추한 내가 앉기는 너무 황송한 자리인 것 같아서.”

비오스트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엘리자베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엘리자베스가 권한 의자에 앉자 그 의자도 그의 무게가 힘겹다는 듯 삐그덕 소리를 냈다.

“어머나~ 황태자가 앉았던 의자라니! 나중에 내다 팔면 꽤 값이 나가겠죠? 인기가 하늘을 찌르시는 분이니까 말이에요.”

“글쎄? 내가 앉은 의자라고 이 의자가 어딘가에 팔리는 걸 알게 되면 내 칼이 네 배를 찌르게 될 텐데?”

“…….”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는 비오스트의 협박에 엘리자베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비오스트가 시킨 일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잘은 몰라도 그가 원했던 결과를 비오스트는 얻은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래서 그가 기분이 아주 좋았고, 자신이 적당히 까불어도 받아 준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비오스트가 분명하게 말을 했고, 엘리자베스는 그가 그어 놓은 선을 넘을 생각이 절대로 없었다.

“적당히 해, 엘리자베스. 난 분명히 비밀을 엄수하라고 했어.”

“비밀 엄수. 알고 있어요. 그거랑 돈이랑 바꾸기로 했잖아요.”

엘리자베스는 은근한 눈빛으로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보면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중이라고 느낄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추파를 보내는 것은 비오스트가 아니라 그의 품속에 있을 돈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영원한 사랑인 돈!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비오스트는 자신의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엘리자베스의 눈은 비오스트를 볼 때보다 세 배, 아니 네 배 정도는 더 반짝였다.

“약속한 보수야.”

“어쩜!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가 좋더라~”

엘리자베스는 콧소리를 섞은 애교를 부리며 잽싸게 주머니를 채어 갔다. 그리고 슬쩍 몸을 돌려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들어 있었다.

“처음 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요?”

보기만 해도 몇 개인지 알 수 있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생각보다 네가 연기를 잘하더군.”

“당연하죠. 내가 땅바닥에 기기 시작할 때부터 한 게 바로 연극이라고요. 그 정도가 아니라면 라퓨라 유랑극단에서 주연 자리를 꿰찰 수 없다고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득 담아서 말했다. 그랬다. 그녀는 공작의 딸이 아니라 유랑극단의 여배우였다.

“이 돈이면 정말로 당신 비밀을 내 무덤까지 가지고 갈게요.”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발설하는 그 순간, 네가 있을 자리가 네 무덤이 될 테니까.”

“물론이에요.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그녀의 기억에는 비가 오는 날이었다. 수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잔뜩 홍보해 놓고, 막상 공연은 딱 한 번밖에 하지 못했는데,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니 당연히 무대를 설치할 수 없어서 공연은 무산이 되었다. 할 일이 없어진, 그래서 돈을 벌 수 없어서 낙담하는 그녀에게 비오스트가 찾아왔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그가 황태자라는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민 돈이 그를 믿게 했다.

사실 황태자든 아니든, 돈을 주기만 한다면야 엘리자베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돈을 받고, 그가 시키는 일을 해 줄 뿐이었다.

그게 순진한 소녀를 속이는 일이 될지라도.

“명심해 둬. 그 돈 중에서 네 연기값은 몇 푼 안 돼. 훨씬 많은 돈이 입막음을 위한 거라는 걸.”

“물론이죠.”

엘리자베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의 입구를 다시 오므려 테이블 가까운 곳에 있는 서랍장 안으로 넣었다. 그 주머니는 비오스트가 돌아갈 때까지만 거기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그녀의 은밀한 금고로 이동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전 아직 제 배역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말이죠.”

“무슨?”

“처음에는 아마도 여자 주인공에게 질투심을 유발하는 악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이해하고 연기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그 배역에 굉장히 몰입했어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말에 긍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죠, 연극이 끝나고 나서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더란 말이죠.”

슬쩍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남자 주인공이 무려 황태자 전하셨거든요. 그것도 그냥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제국에서 가장 미남에, 똑똑하기로 소문났으며, 인품 또한 훌륭하신 분으로 소문이 난 분이셨단 말이에요. 그분의 발치에 당장 몸을 던지지 않는 처녀가 더 이상할 정도였죠.”

비오스트는 이미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뭐라고 말하든지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물론, 취향이 아주 독특해서 그런 완벽한 왕자님이 취향이 아닌 처녀도 있겠죠. 왜 있잖아요? 이상한 남자만 좋아하는 그런 여자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소녀는 그런 여자는 아닌 것 같았어요. 왜냐면, 겉으로 아닌 척하지만 다 티가 나던걸요? 제가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라고 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하더라고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엘리자베스는 잠시 말을 끊고 찻잔을 들었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마른다는 것처럼 차를 마셨지만, 실은 비오스트의 눈치를 살피려는 것이었다.

궁금했다. 이 황태자의 저의가 뭔지.

하지만 궁금함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목숨이었다. 만약에 비오스트가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 낌새가 있다면 얼른 꼬리를 감추고 살살 웃으며 배웅을 해 드릴 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바라본 비오스트의 표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외려 계속해 보라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시시한 연극을 하지 않아도 그 소녀는 언젠가는 황태자 전하의 발치에 제 몸을 내던졌을 거예요. 완전히 시간문제였죠. 그런데 왜, 굳이, 황태자님께서는 비싼 금화를 투자해서 이 미천한 유랑극단의 여배우를 사셨을까요? 제가 맡은 역할이 뭐였는지 저는 모르겠네요.”

말을 마친 엘리자베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을 내려놓는 손이 살짝 떨렸던 것도 같았다.

“딸기 케이크를 먹어 본 적이 있어?”

“네?”

비오스트의 뜬금없는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딸기 케이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지?”

비오스트의 뜬금없는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딸기……겠죠?”

조금 늦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번 비오스트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은 딸기 케이크의 백미인 맛있는 딸기를 먼저 먹고 나중에 케이크를 먹는 타입과 케이크를 먼저 먹고 맛있는 딸기를 맨 마지막에 먹는 타입이 있지. 엘리자베스, 너는 어느 쪽에 속하지?”

“저는 아마도…….”

엘리자베스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어땠는지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질문에서 황태자가 말하는 것은 정말로 딸기를 먼저 먹는지, 나중에 먹는지를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단숨에 즐거움을 만끽하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즐거움을 마지막으로 남겨 두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전자였다.

“인생은 두 번 오지 않죠. 저는 딸기를 먼저 먹겠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황태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요?”

“나도 물론 딸기를 먼저 먹지.”

그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은근히 마음이 들떴다. 황태자가 자신과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들게 했다.

“단, 나는 케이크는 버리지.”

비오스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아니, 황태자의 얼굴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맛있는 것을 먹었으면 됐지, 굳이 먹고 싶지 않은 케이크까지 먹을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리고 딸기는 빨리 먹어야겠지. 남이 누가 먼저 먹지 않도록. 새빨갛고 싱싱한 그때, 내가 먹고 싶을 때, 되도록 빨리.”

“그 소녀가 딸기였다는 건가요?”

“어찌 소녀가 딸기가 되겠어? 딸기는 딸기고, 소녀는 소녀일 뿐이지.”

싸늘한 표정의 비오스트가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차갑고, 서늘한 그 눈빛에 엘리자베스는 움찔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수십 명의 사람 앞에서 연기할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녀였다. 취객이 깨진 병을 들고 난입해도 침착하게 대응하던 엘리자베스였다.

언젠가 스토커처럼 그녀를 괴롭히던 남자를 마주했을 때는, 그의 급소를 걷어차고 밧줄로 꽁꽁 묶어서 직접 순찰대에게 넘겼던, 그런 대범한 여자가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비오스트의 눈빛은 스토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아름다운 금안은 아무런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아서 마치 생명 없는 유리알이 빛나는 것 같았다. 같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엘리자베스는 등골이 오싹해 왔다.

엘리자베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비오스트는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후드를 깊게 뒤집어쓰고 이미 갈 준비를 마친 터였다.

“그, 그 애가 불쌍하지 않으세요?”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말이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순간의 습격에 황태자는 슬쩍 몸을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진한 소녀를 속였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양심이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 것이리라.

“그 아이?”

비오스트의 머릿속으로 순간 라일라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서럽게 울던 그 라일라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기적이라고, 고맙다고 말을 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갑자기 비오스트의 입안에 쓴맛이 가득 차올랐다. 비오스트는 싸늘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엘리자베스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 따위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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