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황족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일라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남자의 눈치를 보며 재빨리 정자에서 달아나기 위해서 힐끗 옆을 살폈다.
분명히 화를 낼 거다. 고귀한 황궁에 감히 냄새나는 마녀가 와 있다며 호통을 치고, 당장 내쫓을지도 몰랐다.
그러기 전에 라일라가 제 발로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저 남자가 누가 자신을 데려왔는지 알아내서 비오스트에게 피해가 가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그럼 비오스트에게 사생아를 낳아 주기로 한 것은 어쩌지?’
라일라가 복잡하게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남자, 르미에르도 처음 라일라를 보며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레이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르미에르가 입을 열자 안 그래도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라일라의 어깨가 저절로 움찔했다.
“나는 르미에르 디스트리 드 온라이언 대공이네. 그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지?”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라일라는 제 생각이 맞았음을 알았다. 남자는 비오스트와 혈연관계였다.
“라일라 비올렛 드 발렌시아입니다.”
자신도 너무나 오랜만에 말해 보는 풀네임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잊어버리지는 않아서 라일라는 끝까지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발렌시아 영애였군. 우연이긴 하지만, 이렇게 마주치게 되어 반가워.”
르미에르는 반갑다는 듯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비오스트와 닮아 있어서 순식간에 라일라의 경계심은 허물어지고야 말았다.
“당신은 비오스트의……?”
대공이 뭔지 잘 몰랐던 라일라는 슬쩍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지금도 라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지, 고개라도 숙여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애의 숙부이자 황제의 동생이지.”
“아…….”
르미에르의 대답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황제의 이름은 다른 것이었던 것도 같았다. 정확히는 뭔지 모르지만.
“…….”
“…….”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애초에 인간관계가 서툰 라일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을 뿐이었고, 르미에르는 라일라에게서 풍기는 향기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할 말을 잃었다.
그 역시 라일라가 풍기는 짙은 향기를 맡고 있었다. 눈앞의 여린 소녀가 풍기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농염한 향이었다.
그리고 르미에르에게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향이기도 했다.
‘플로라…….’
르미에르의 기억 속 저편에 있던 이름이 둥실 떠올랐다. 언제나 그의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이름이었고, 애틋한 이름이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그의 마음속 한곳에 묻어 두었던 이름이 라일라를 보는 순간 되살아났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또렷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름만 떠올려도 심장이 저미듯 아파져 오는 르미에르였다.
“내가 오래간만에 황성에 들렀더니, 누군가 황태자궁에 머물고 있는지를 몰랐군. 혼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방해가 된 건가?”
“네.”
당연히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는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했던 르미에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라일라를 보며 조금 당황했다.
라일라는 라일라대로 르미에르를 보고 놀란 것은 진정이 되었고, 자신이 이제는 더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아 제법 침착하게 되었다.
다만 예법을 배우지 못했던 라일라는 그저 침착하기만 했을 뿐, 황족을 상대로 무례한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물론 제 딴에는 든든한 근거가 있었다. 자신은 달아나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는 황태자궁이었고, 황태자인 비오스트가 자신이 여기에 머물러도 된다고 허락한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비오스트를 떠올린 라일라는 든든함을 느끼며, 눈앞의 사람이 비오스트를 닮은 남자가 아니라 비오스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한 달 정도?”
르미에르의 물음에 라일라는 제가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이 이곳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오두막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죽을 뻔한 것이 까마득한 옛날 일 같은데,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그렇군. 그럼 혹시…….”
뭔가를 더 물어보려던 르미에르는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마터면 라일라에게 혹시 비오스트와 잠자리를 했느냐고, 혹은 그 애의 아이를 가졌느냐고 물을 뻔했다.
아무리 자신이 대공이고, 비오스트의 숙부라고 하더라도, 게다가 그 질문이 자신보다 라일라에게 더욱 중요한 질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물으면 안 된다는 상식이 있는 르미에르는 간신히 질문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레이디 발렌시아.”
하고 싶은 말들을 참아 내며, 르미에르는 발길을 돌렸다.
처음 보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를 이 아가씨와 대화를 할 것이 아니라 제 조카를 만나야 했다.
그리고 물어야 했다. 대체 이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 * *
쏟아지는 햇살이 반백의 머리에 반사가 되어 흩어졌다. 그 탓인지 황제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눈치 빠른 궁인이 재게 발을 놀려 얼른 얇은 커튼으로 창문을 가렸다. 밝은 햇살은 은은한 빛만이 투과되어 황제의 집무실을 밝혔다.
그래도 찌푸려진 황제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 것은 햇볕이 아니었다. 황제의 앞에 앉은 남자의 탓이었다.
“블레어 백작가의 후계자가 사흘 전 암살되었다.”
“아, 그렇습니까?”
“며칠 뒤에 출항할 배를 살펴보다가 당했다고 하더구나. 경비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암살자는 찾지 못한 모양이더군.”
“실력이 뛰어난 자를 누군가 고용한 모양이군요.”
비오스트는 여유롭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쌉싸름한 홍차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문득, 어젯밤 맡았던 라일라의 향기가 비오스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향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달콤했던 신음도, 매끄럽던 피부 결도, 라일라의 안에 들어갔던 그 느낌까지 모두 떠올랐다.
비 오는 그날, 라일라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 세 번째로 그녀를 안게 되더라도 분명 비오스트는 만족할 것이 틀림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문제였다.
하루 온종일,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안에 있고 싶었다. 그 작은 입에서 나오는 신음을 온종일 듣고 싶었고, 미모사처럼 자신이 건드릴 때마다 반응하는 그 몸을 종일 더듬고 있고 싶었다.
작은 귓불을 물고, 그 하얀 목덜미를 빨고, 작은 가슴을 힘주어 모양을 망가뜨리고, 작은 유실은 온종일 잘근잘근 씹고 있고 싶었다.
“……자중하거라.”
흰 시트를 구기며 달뜬 신음을 내뱉은 어젯밤의 라일라를 생각하느라 황태자는 황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새겨듣겠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야 황제가 더는 잔소리를 하지 못할 테니까.
“황태자궁에 있는 그 아이는 확실한 것이겠지?”
비오스트의 생각대로 잔소리를 멈췄고, 주제는 다른 곳으로 뛰어넘어 갔다. 애초에 황제도 원한 일이었다.
감히 백작 가문에서 그깟 무역업이 조금 번성했다고 제 딸을 황태자비의 자리에 앉히려는 압박을 넣는 가소로운 짓을 한다고 언급한 것은 황제였다.
“네. 아버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그냥 보는 순간 알겠더군요.”
비오스트의 머릿속에 라일라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숲에서 길을 잃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길을 잃어서 오두막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숲에서 나던 희미하지만, 강렬한 향을 찾느라 길을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향기의 끄트머리를 더듬으며 숲을 헤매다 마침내 그 오두막을 찾은 것이었다.
문을 연 그 순간을 비오스트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강렬한 향기의 집합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심 가득하던 찌푸린 눈은 악마처럼 유혹적이었고, 순진하게 벌어진 입술은 당장이라도 소녀를 쓰러트리고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것이 라일라와의 첫 만남이었다.
온라이언의 황태자를 길을 잃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소녀. 그게 라일라였다.
“내 가르침을 잊지는 않았겠지?”
황제의 말을 들으며, 비오스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이죠.”
주먹과는 달리 비오스트의 미소는 느슨했고, 부드러웠다.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이냐?”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비오스트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어느새 주먹의 힘도 풀어져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쯤,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감정을 속이고 거짓된 표정을 내보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라고 해도, 황제라도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렇겠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해 왔으니.”
비오스트는 말없이 차를 한잔 마셨다. 느긋하게 음미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해 온 것이라면 몇 가지가 있었다. 고리타분한 황제의 마음가짐이라든가, 제국의 국민들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혹은 비오스트가 지켜야 하는 몇 가지의 금기사항이라든가.
“어디까지 진행한 것이냐?”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낳을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그 아이와 잤습니다. 밤새도록 그 아이의 안을 쑤셔 박았고, 그 안에 제 씨를 뿌렸죠.”
천박하기 짝이 없는 비오스트의 단어 선택에 황제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신경을 거슬리고 싶었던 비오스트는 자신의 바람대로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빙긋 웃었다.
“그거야 당연히 이미 알고 있다.”
찌푸린 인상 그대로 황제가 이야기하자, 이번에는 비오스트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