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 물어봤어요.”
라일라는 서랍에서 수건을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뒤돌아서 부엌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라일라가 건네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비오스트는 느긋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마음껏 향기를 들이마셨다.
꽃잎을 짓이긴 듯 강렬한 향이 비오스트의 콧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그의 뇌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당장 저 여자를 비오스트의 여자로 만들라고.
‘기다려.’
제 안의 본능을 점잖은 목소리로 타이르며 비오스트는 느긋하게 라일라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작고, 마른 몸이었다. 틀림없이 가슴이며 엉덩이가 비오스트의 손바닥에 가득 차지 않을 것이고, 주무른다고 해서 만족스럽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이 관능적인 향이 메꿔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라일라가 연신 힐끗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뭘 만드는 거죠?”
그녀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며, 비오스트는 물었다. 어디까지나 ‘친절하고, 상냥하게’였다.
아까 라일라가 말한, 냄새를 참고 있다는 것이 뭔지 알아내기 위한 낚시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좋은 냄새가 난다고 말하고 싶지만, 제가 냄새를 맡지 못해서 말이죠.”
“냄새를 못 맡는다고요?”
눈에 띄게 라일라의 어깨가 굳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라일라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있었다.
“네. 어릴 때 제가 말에서 떨어졌거든요. 그 이후로는 남과 같이 냄새를 맡지는 못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비오스트는 정말로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물론, 그를 떨어뜨린 말은 당장에 죽여 버렸고.
남과 같이 냄새를 못 맡는다는 것 역시 정말이었다. 지금 라일라에게서 나는 강렬한 향은 아마도 비오스트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당신이 하는 맛있는 음식을 냄새로 맞힐 수 없다는 게 유감이네요.”
이것 역시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금 비오스트의 코는 라일라의 강렬한 향으로 마비가 되어 다른 냄새는 전혀 맡지 못하고 있었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냄새나, 바깥에 내리는 비의 풋풋한 비린내 같은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참으로 새빨간 진실들이었다.
“그냥 평범한 양배추 수프예요.”
“그렇군요.”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리는 라일라에 비오스트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제 속내를 빤히 내보이는 저 얼굴을 좀 더 보면 재밌을 것 같았는데.
“아까 내가 뭘 참는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슬그머니 고양이가 도망을 갔다. 좀 더 건드려 볼까? 아니다. 지금은 말캉말캉한 제 발바닥을 혀로 핥으며 놀란 마음을 달랠 시간을 조금 주는 게 좋았다.
잠시 후에 나온 멀건 수프를 내려다보며, 비오스트는 아까 양배추 수프라고 하지 않았던가를 잠시 고민했다.
아마 제가 아는 양배추 수프와 라일라가 아는 양배추 수프는 전혀 다른 요리임이 틀림없었다.
“맛있겠네요.”
하지만 비오스트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냄새도 근사할 게 틀림없는데, 맡지 못하는 게 한스럽네요.”
웃으면서 비오스트가 던진 이야기에 라일라의 한쪽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방금 뭘 하려고 한 거지?
자신을 스스로 사람의 표정을 읽는 데 천재라고 생각하는 비오스트였지만, 방금 라일라의 표정은 읽지 못했다.
이제까지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빤히 보이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차를…… 가지고 올게요.”
비오스트가 그 표정을 다시 떠올리며 해석을 하려는 참에 라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다시 향기가 나풀거리며 비오스트의 코끝에 와서 달라붙었다.
비오스트는 눈을 감고, 그 향을 음미했다. 다시 흉포한 본능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장 저 여자를 바닥에 눕혀.’
본능이 시키는 장면을 상상하며 비오스트는 히죽 웃었다.
물론 상상만이었다. 아직은 그래야 했다.
* * *
아주 솔직히 말해서, 그 양배추 수프는 쓰레기였다.
말만 양배추 수프였지, 양배추는 얼마 들어 있지 않았다. 육수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요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도 아까운 것이었다.
지금 비오스트가 먹고 있는 훌륭한 비프스튜에 비하면 더욱더 그러했다.
정성껏 기름과 거품을 걷어 내고 만든 육수에 건더기가 듬뿍 들어갔으며, 비싼 향신료까지 첨가된, 이런 시골 영지에서 만나기 힘든 요리였다.
있는 대로 영주민들을 쥐어짜는 악독한 영주이거나, 저축이나 투자라는 개념 없이 있는 재산을 탕진하는 멍청한 귀족.
눈앞의 발렌시아 남작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비오스트는 짐작했다.
“요리가 아주 훌륭하군요, 발렌시아 남작님.”
하지만 그런 말 대신, 비오스트는 칭찬의 말을 건넸다.
“과찬이십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에게 칭찬을 들은 남작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아니면, 이전부터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비오스트 황태자가 마차에 내리고, 자신의 영지에 한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존엄하신 황태자께서 본인에게 존댓말까지 하자 그는 기절할 듯이 좋아했다.
아마도 이런 시골까지는 황태자께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귀족들을 존중하여 항시 존댓말을 써 준다는 소문이 미처 전해지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교활한 상급 귀족들에 비해 순진한 하급 귀족들은 황태자가 조금 존중해 주는 척만 해도 이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듯이 충성한다는 것을 아는 비오스트의 술수라는 것 역시도 남작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훌륭한 요리사를 두는 것 또한, 그 주인의 능력 중 하나이지요. 이 요리 하나로 남작님의 뛰어난 능력을 본 것 같습니다.”
“헛! 참! 이것 참 부끄럽습니다.”
흐뭇해하는 남작을 보며 비오스트는 포도주 잔을 들었다. 피처럼 붉은 포도주였다.
찰랑이는 포도주 너머로 남작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수줍은 듯이 앉아 있는 남작의 영애도.
아리아드네라고 했던가? 탐스러운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수줍은 척을 하며 손톱만 하게 음식을 썰어서 햄스터처럼 음식을 먹고 있지만, 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눈에 탐욕이 번들거리는 것을 비오스트는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보였다. 눈빛에서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말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보였다.
‘참으로 꼭 닮은 가족이로군.’
부녀간에 똑같은 새파란 눈에 탐욕이 얼룩진 것을 보며 비오스트는 비웃었다. 물론 속으로만.
겉으로의 그는 태양보다도 따사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작의 초청에 이런 시골 영지까지 손수 내려와 주는 상냥한 황태자님이었다.
“참, 남작님. 제가 어제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곳에서 작은 오두막을 하나 발견했는데 말이지요. 혹시, 거기 누가 사는지 아시는지요?”
흐뭇해하던 남작의 얼굴이 일순간 살짝 굳어졌다. 이내 다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비오스트는 그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다음에 남작이 할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난 뒤였다.
“글쎄요? 숲에 그런 것이 있던가요?”
“네. 아주 많이 낡기는 했지만, 오두막이 하나 있더군요. 남작님 소유의 숲이 아니던가요?”
“네네, 그렇죠. 그렇습니다. 우리 가문의 숲이지요. 다만, 워낙에 넓은 숲이다 보니 제가 그 안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려워서 말이지요.”
“그렇군요. 참으로 넓은 숲이긴 했습니다. 아마 제가 북쪽의 숲에서 사냥을 시작한 것 같은데, 나올 때는 저택의 남쪽에서 나왔지 뭡니까?”
“네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연신 비오스트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남작의 이마에서 한 방울의 땀이 보였다.
“그 오두막, 분명 누가 사는 것으로 보였는데 말입니다.”
햄스터처럼 깨작거리며 음식을 먹고 있던 남작 영애는 그나마 제 아비보다 거짓말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눈에는 뭔가의 불안감이 보이는데, 비오스트와 눈이 마주치자 제법 생긋 웃는 여유를 보여 주었다. 물론 비오스트도 그녀에게 상냥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비오스트는 다시 라일라의 생각이 났다. 의심 많은 쥐새끼 같은 눈빛도.
욕설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녀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듯 움직였던 그 입술의 비밀은 아직 밝혀 내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향기.
라일라의 그 취할 듯한 향기를 생각하자 비오스트의 욕망이 갑자기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라일라를 쓰러트리고 마음대로 그 욕망을 발산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숯 굽는 노인에게 숲에서 살아도 된다고 허락을 해 준 것도 같네요.”
“아, 그래요?”
상상 속에서 막 라일라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던 비오스트는 남작의 말에 재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아쉽게도.
“네, 네. 워낙 예전이라서 잊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과연 백성을 사랑하는 남작님이십니다. 가문의 숲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흔쾌히 영주민에게 개방하신 거로군요.”
“그, 그렇습니다.”
거짓말.
비오스트는 그의 말이 새빨간 거짓인 줄 알았지만,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디 인간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 하루 이틀이던가?
“과연, 제가 황궁으로 돌아가면 아버님께 발렌시아 남작님의 영지는 아주 평화로우며, 아주 잘 다스리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별말씀을요.”
거짓말.
저도 얼굴 보기가 힘든 황제였다. 게다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기도 했다. 자신이 뭐 하러 그까짓 영양가도 진실도 없는 대화를 하자고 황제를 본단 말인가?
비오스트는 뻔뻔하게 거짓을 말하며 그저 생긋 웃었을 뿐이다.
그리고 웃는 순간, 또 남작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비오스트와 눈이 마주치자 은근히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 왔다.
라일라와 같은 금발에 파란 눈이었지만, 매끄러운 어깨선과 볼륨감 있는 가슴은 그녀와 전혀 달랐다.
윤기 나는 피부나 잘 다듬어진 손톱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비오스트는 아쉬웠다. 저기 앉아 있는 것이 라일라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저런 유혹의 눈빛을 보냈다면 당장 그녀를 취하고, 마음껏 안았을 텐데.
라일라를 생각하자, 비오스트의 허리 아래가 또다시 뻐근해져 왔다.
비오스트는 자신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날이 벌써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