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꽃-3화 (3/88)

3.

‘역시 강간범인 게 틀림없어!’

라일라는 쥐고 있던 가위를 더욱더 단단하게 틀어쥐었다.

아무리 봐도 라일라보다 훨씬 강하고 근육도 단단해 보였지만, 자신이 기습해서 목을 찌른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일라는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고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나…… 둘…… 세…….’

“정말 고마워요.”

라일라가 셋을 막 세기 직전, 남자는 방긋 웃었다.

아까와는 천양지차의 미소였다. 아주 다정다감하고 친절해 보이는, 아무런 사심이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덕분에 가위를 쥔 라일라의 손이 뻗어 나가려다 말고 움찔했다.

“덕분에 살았네요.”

남자는 그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러자 그 남자의 발걸음에 맞추기라도 하듯, 라일라가 안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는 그런 라일라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한 걸음 더 안쪽으로 들어왔고, 라일라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서로 닿지 않는 왈츠처럼.

“가까이 오지 말아요!”

신경질적으로 라일라가 외쳤다.

“아…….”

남자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것을 보며 라일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갔다.

저 남자도 말하겠지. 악취가 난다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리고 이윽고 이 냄새가 라일라에게서 난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혐오할 것이다.

귀에 박히도록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그 말들을 생각하자 라일라의 주먹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찌나 세게 힘을 주었던지 그녀의 작은 주먹에는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다.

“불을 안 켜고 계셨군요.”

“네?”

하지만 남자에게서 나온 말은 라일라가 생각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황한 라일라가 자기도 모르게 되묻자, 그는 빙긋 웃었다.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기분 나쁜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라일라에게서 나는 악취를 전혀 맡지 못한다는 듯이 말이다.

“너무 어둡지 않나요?”

여유롭게 라일라의 오두막을 둘러보는 남자의 이름은 비오스트였다.

비오스트 블랙 드 온라이언.

그것이 오늘 라일라를 찾은 불청객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라일라가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면, 대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온라이언 제국의 하나뿐인 황위 계승자인 황태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실제로 라일라에게서 나는 악취를 전혀 맡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코를 괴롭히는 것은 악취가 아니라 꽃내음이었다.

저 밖에서 미친 듯이 내리는 비바람 속에서도 바람결에 희미하게 나던 꽃내음을 쫓아 여기까지 온 그였다.

아니, 그저 꽃내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어떤 꽃이라도 이런 관능적인 향기를 내뿜는 꽃은 없었다.

가만히 잠자고 있던 본능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것 같은, 수그러들어 있는 야성을 일깨우는 것 같은, 마치 비오스트를 발정기의 짐승으로 만드는 것 같은 향이었다.

사냥터에서 갑작스러운 비를 만난 것은 불운이었다. 비를 무시하고 뒤쫓았던 은여우를 놓친 것 또한 불운이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한 것은 본능이었고, 본능의 이끌림에 따라서 여기까지 온 것은 운명이라고, 비오스트는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에 그 운명이 있었다.

작고, 깡마른,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여인의 형태로.

“불을 좀 켜는 게 어때요?”

당장이라도 이 여인을 덮칠 것 같은 본능을 억누르며, 비오스트는 말했다.

어느새 뼈가 드러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고 있던 라일라의 손은 스르륵 풀어져 힘없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밖에 비가 와서 어둡지 않나요?”

창문 너머 밖에서 번개가 쳤다.

번쩍.

오두막의 안까지 들어온 빛에 비오스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푸석푸석한 금발,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연신 자신을 의심하는 새파란 눈동자, 흉년에 찌든 사람처럼 깡마른 얼굴과 몸.

어떤 남자라도 이렇게 생긴 여자가 이상형일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남자라도 맡지 못할 향기를 자신은 맡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자의 껍데기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불을 켜야 하지 않을까요?”

슬쩍, 테이블 위의 촛대를 가리켰다. 등잔도 보이긴 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이런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귀족들이나 쓰는 초가 꽂힐 촛대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기름이 떨어져서요.”

“아하?”

초가 아니라 기름을 이야기하는 여자를 보며, 비오스트는 그저 순진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끔 그런 적이 있죠. 미리 해 두면 좋은데, 사람이 잘 그렇게 되지 않는다니까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내 앞길을 방해하는 멍청한 놈의 머리를 자르는 걸 미리 하지 않는다거나, 하라는 대로 잘 하지 않는 소국의 왕에게 반역 누명을 씌우지 않는다거나, 거치적거리는 가문의 3대를 처형시키지 않는다거나 하는.

순간 비오스트의 머릿속에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똥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그것들을 지웠다. 아니, 지워졌다.

비오스트의 뇌를 일깨우는 관능적인 향이 당장 눈앞의 것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조금 이르긴 하지만 장작을 때는 건 어때요? 나도 몸을 좀 말리고 싶고요.”

슬쩍, 여자의 팔만큼이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얹어져 있는 벽난로를 가리키자 여자는 힐끗, 그쪽을 보긴 했지만 이내 비오스트를 쳐다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뒤엉킨 의심과 혼란이 가득했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희망도.

“사례는 얼마죠?”

“아아-”

잔뜩 경계한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물었다. 더불어 약점까지.

“당신이 원하는 만큼요.”

자신이 필요한 것을, 취약점을 마음껏 드러내는 고양이를 보며 비오스트는 빙긋이 웃었다.

고양이가 데굴데굴 제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시, 십 실링.”

한참 만에야 고양이의 입에서 나온 푼돈에 비오스트는 비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좋아요.”

대신, 흔쾌히 수락하며 친절한 미소를 보내 주었을 뿐이다.

너무도 흔쾌히 말해서 그런지 여자의 얼굴에는 또다시 당황이 스쳐 갔다. 참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 쉬운 여자였다.

“그럼, 이제 우리의 흥정이 끝났으니, 장작을 좀 켜 볼까요?”

“장작값은 별도예요.”

“얼마인데요?”

여자의 얼굴에서 다시 당황의 빛이 스쳐 갔다.

“오, 오 실링?”

확신 없는 목소리는 의문으로 끝났다. 비오스트는 이제 숫제 즐거워질 지경이었다.

“좋아요.”

이번에도 흔쾌히 수락하자, 여자는 더욱 당황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데, 대체 왜 당황하는 건지 비오스트는 우스웠다.

그가 그대로 테이블에 걸어가 앉으려고 하자, 여자는 다시 소리쳤다.

“기, 기다려요. 테이블 사용료…….”

“역시 지불하죠. 5실링 어때요?”

이번에는 선수를 쳐서 비오스트가 먼저 말했다. 여자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다시 원상복구가 되었다.

“돈을 먼저 보여 줘요.”

얼굴로 제 생각을 전부 드러내는 주제에 여자의 의심은 끝이 없었다.

이미 집 안에 들여보내 줘 놓고선, 인제 와서 돈이 없다거나 하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의심이 많은 건지, 순진한 건지 알 수 없는 여자의 태도에 비오스트는 그저 웃으며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낼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비오스트에게는 20실링이 없었다. 그가 가진 가장 작은 돈은 100실링짜리였다.

“우리 다시 흥정해 볼까요?”

“개소리!”

즉각적인 욕설이 깡마른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역시 강간범이지? 그래서 날 욕보이려고 냄새나는 것도 참고 이러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딱 좋을 때 돈을 가진 사람이 날 찾아올 리가 없지. 그런 행운이 나한테 올 리가 없어! 나한테 다가오기만 해 봐, 당장 네 목에다가 이 가위를 꽂아 넣어 줄 테니까! 그러면 너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가 저세상으로 가게 될걸!”

여자는 바느질용으로 보이는 끝이 그다지 날카롭지도 않은 가위를 들고 비오스트를 협박했다.

“음……. 당신이 좀 오해를 했나 보네요.”

물론, 그녀는 협박했을지 몰라도 비오스트는 협박당하지 않았다. 저런 뭉툭한 가위라니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첫째, 난 강간범이 아니고. 둘째, 난 아무것도 참고 있지 않아요. 셋째, 나는 돈을 가지고 있어요.”

비오스트는 100실링짜리를 하나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봤죠? 100실링이에요.”

보란 듯이 비오스트는 테이블 위의 돈을 가리켰다.

“나는 우리의 흥정에 좀 더 추가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비가 그치거나 잦아질 때까지 내가 이 오두막에 머물고, 이 테이블과 의자를 내가 사용하고, 당신이 장작불을 붙여 줘서 내가 옷을 말릴 수 있게끔 해 주는 거에 좀 더 서비스를 추가하고 싶네요.”

힐끗, 라일라가 테이블 위의 돈을 쳐다보았다.

“내가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음식, 그리고 차를 원해요. 그리고 내가 몸을 좀 닦을 수 있는 수건을 주면 좋겠네요. 되도록 많이. 그리고 그 대가로 이 100실링을 제시하는 거예요.”

아직도 라일라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비오스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돈을 확인하고 나서는 손에 쥔 가위가 흔들렸다. 애초부터 잘 겨누고 있지도 않았지만.

“어때요?”

비오스트는 한 번 더 물었다.

의심 가득한 눈이 테이블 위의 100실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좋아요.”

라일라는 재빠른 대답과 함께 테이블 위의 100실링을 집어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비오스트가 쳐다보자, 손톱이 짧아서 그녀는 돈을 집어 들지 못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가지런히 다듬어진 손톱이 아니라, 물어뜯어서 보기 흉하게 짧은 손톱이었다. 특히 엄지는 보는 사람마저 아파 보일 정도로 짧았다.

‘발톱을 세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발톱 빠진 고양이였군.’

“실례.”

비오스트가 돈을 집어 들어 그녀의 손 위에 올려 주자, 돈을 받은 그녀는 재빨리 물러났다.

그리고 비오스트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벽난로에 불을 붙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오스트는 자리에 앉았다.

“이름이 뭐예요?”

“그걸 알아서 뭐 하게요.”

“여기 잠시 있어야 할 텐데, 그때마다 그쪽을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라일라.”

성도 없이 그저 이름이 툭- 하고 던져져 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벽난로에 불이 붙었는지, 그쪽에서 따뜻한 기운과 빛이 흘러나왔다.

“난 비오스트예요.”

라일라와 똑같이 비오스트는 그저 이름만을 그녀에게 툭 던졌다.

물론, 계산된 행동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