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3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튼 님.”
정중한 환영의 말과 함께 집사 던컨이 문을 열어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다프네는 공작의 약혼녀로서 ‘반겨 주어서 고맙습니다.’라는 예의 바른 말로 답하며 차에서 내려야 했다.
“……조상님을 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앨러스테어의 운전에 얼마나 대단한 부가 기능이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음, 역시 그랬습니까? 엔진 소리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는 웃으며 차 안으로 장갑을 끼운 손을 내밀었다. 다프네는 그 따듯한 손길에 의지하여 겨우 두려운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말씀하세요.”
“정규 과정을 이수한 운전사에게 확인을 받은 후에 운전대를 잡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건 정말 위험한 물건이라고요. 사고라도 난 후에는 늦어요.”
“좋은 생각입니다. 이로써 서튼 님이 공작 부인이 되는 날에 첫 번째로 추진할 일이 생겼군요.”
그가 주름진 입술로 다정히 웃으며 건네는 이야기에 다프네는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굳은 표정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공작 부인이라니.
그 묵직한 호칭을 들을 때면 어쩔 수 없는 부담감이 몰려왔다.
그 자리는 정말로 많은 영향력과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중간 계층 출신일 뿐인 다프네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고 해서, 공작의 약혼녀 자리에서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그건 다프네의 이기심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리암 슬로언의 옆에 서는 것이 자신이었으면 하는…….
“서튼 님.”
던컨의 목소리에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리디아 슬로언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아, 혼자 갈 수…….”
다프네가 고집스러운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던컨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며 굳이 다시 ‘모시겠습니다.’라며 강조해 왔다.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빼앗지 말아 달라는 뜻일 것이다.
다프네는 별수 없이 그를 앞세우고서 ‘정문 현관’을 통하여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한때는 그녀가 쓸고 닦았던 웅장한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누군가의 꼼꼼한 손길로 관리가 되는지, 하루만 게으름을 피워도 더러워지는 모서리마저도 깔끔하게 반짝거렸다.
“응접실에는 브리가 함께 있을 겁니다.”
앞서가던 집사가 넌지시 건넨 말에 다프네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감사합니다.”
“아뇨, 그녀가 먼저 그렇게 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브리는 제 친구니까요.”
마침 응접실 앞에 도착했기 때문에, 집사는 몸을 돌려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다프네를 대신하여 문을 노크해 주려고 했다.
“아.”
그 순간에 무언가가 떠오른 다프네가 짧은 탄성을 내었고, 그의 손도 함께 멈칫거렸다.
“왜 그러시죠?”
“예전에…… 왜 절 대신해서 노크해 주셨나 해서요. 그러니까.”
다프네가 사용인 계단에서 리암의 고백을 들은 다음 날.
그의 방 앞에서 주저하는 다프네를 대신하여, 집사 던컨이 노크를 해 주었다.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지만요.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럽게 말했네요.”
다프네가 얼른 웃으며 이야기를 넘기려는 것을, 집사는 차분한 투로 답을 건네주었다.
“기억합니다.”
“…….”
“제 무례였지요.”
“아뇨, 전혀!”
다프네는 목소리를 높이려다 얼른 소리를 죽였다. 응접실 너머에 그녀를 기다리는 리디아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것이다.
“오히려 감사드리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했느냐고요?”
다프네는 살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름대로 두 분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아…….”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저 하나뿐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서튼 님.”
그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문을 부드럽게 노크했다. 안에서 리디아의 냉철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살짝 문이 열릴 때 던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당당하게 자리에 오르세요. 우리들의 응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이 증명하는 겁니다.”
“절 왜……?”
다프네는 다소 자신이 없는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힘없는 중간 계급의 인간에 불과했다. 그것도 기억 일부는 잃어버린 불편함까지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굳건한 지지를 해 준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면목이 없기도 했다.
어렵게 꺼낸 물음에도 던컨은 답이 없었다. 그저 평소의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만 지을 뿐.
게다가 마침 문이 다 열렸기 때문에, 던컨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다프네는 그의 올곧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대체 던컨이 그녀의 어떤 점을 좋게 생각했는지 고민했다.
“들어오지 않으시고 뭘 하시는 겁니까?”
비록 응접실 안에서 들려온 날 선 목소리에 그런 고민은 금방 미루어 두어야 했지만 말이다.
다프네는 얼른 응접실을 돌아보았다.
그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새하얀 드레스가 한 벌 걸려 있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리디아와 브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고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어깨를 드러내는 드레스는 입는 이의 몸을 따라서 우아한 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큰 장식이 없어서 언뜻 검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원단의 근사함을 재단으로 살려야 하는 ‘인건비’가 장식으로 잔뜩 달라붙은 사치스러운 것이다.
“언제까지 바라만 보실 겁니까?”
리디아가 재촉했기 때문에 다프네는 얼른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다행히 다프네의 치수는 옷을 맞출 때와 비교하여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가 2주 후에 입으면 되겠군요. 옷을 고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는 당신이라면 체형을 유지하는 수고쯤은 얼마든지 해 주겠지요.”
“물론이죠.”
다프네는 가림막 너머에서 대답했다. 브리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벗는 중이었다.
“그리고 앨러스테어가 이야기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 네.”
다프네는 브리가 조임 끈을 풀기 쉽도록 제 머리카락을 높이 붙잡은 채로 답했다.
“대왕비 전하께서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것도 예식 전부터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마법사 서튼이 왕실에 치료 약을 비밀리에 납품했던 것에 대한 보답일 테지요.”
또 조상 덕을 보는 걸까. 다프네는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대답을 건네지 못했다. 가림막 너머에서 리디아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어쨌든 지금부터 매일 그분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연구를 해 봅시다. 그럴싸한 호칭이라도 하나 받아 두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연구…… 요?”
“예. 전하를 찬송하는 시를 짓거나, 훌륭한 피아노 연주를 선보여도 좋습니다. 왕가의 문양을 딴 자수로 무언가를 선물하는 방법도 있겠군요. 제가 말한 것 중에 잘하는 것이 있나요?”
“어…… 그야 아카데미에서 전부 배우기는 했습니다. 빼어나지는 않지만.”
“다행이군요.”
리디아가 손뼉을 한번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부터라도 수도에서 교사를 불러서 단기 속성으로 교습을 받아 봅시다.”
“오늘부터요?!”
“네. 그분이 오실 때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열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서둘러야 합니다. 단 하루도 허투루 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다음 주에는 오린샤이어에 갈 계획이었는데요.”
다프네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즈음에는 드디어 드레스를 모두 벗어 낼 수 있었다.
“당신을 키워 주었다는 분을 만나러 간다고 했던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의 신분이 무엇이든 당신이 그녀를 공경하는 한, 슬로언 공작가도 그분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앨러스테어와 피오나가 초대장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앨러스테어는 슬로언 가문의 의장, 그리고 제 입으로 자랑하기에는 부끄럽지만 피오나 슬로언은 저의 귀여운 며느리…… 흠, 아니. 왕께서도 인정한 천재 마법사입니다. 혹여 페이지 부인께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마법을 사용해 줄 테지요. 그러니 초대장은 안심하고 그들에게 맡기세요.”
다프네는 그들에게 초대장을 맡긴다는 사실 이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혹시 앨러스테어가 운전해서 간다고 하지는 않나요?”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제가 그만두게 했습니다. 초대장을 전하는 일이 늦어져서야 곤란할 테니까.”
아니, 앨러스테어라면 분명 기차보다도 빨리 오린샤이어에 도착할 것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기차는 하루에 몇 대 있지도 않으니까.
어쨌든 그가 운전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끔찍한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페이지 부인과는 결혼식장에서 충분히 인사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일단 지금은 대왕비 전하를 뵙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죠.”
“전…….”
다프네는 블라우스를 손에 든 채로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대왕비 전하가 오는 일을 대비하느라, 페이지 부인과의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보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예식을 앞두었기 때문에 더 그런 감정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어떤 다프네라도 ‘우리 아기씨’라며 등을 토닥거려 줄 테니까.
“……저는요.”
“공작님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리디아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어제 아셔가 들려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비척거릴 것이 아니라 결혼식 전까지 수도에서 공을 세우든 해서, 왕가에서 칭호라도 하나 받아오겠습니다. 공작님이 저들에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리암을 위해서…… 라는 말에는 다프네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네, 알았…….”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하려고 할 때.
가림막 너머에서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