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외전 4화
“제발 내가 늦지 않았다고 말해 줘.”
다급히 애원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굳이 가림막 너머를 내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암 슬로언이었다. 그녀의 열렬한 약혼자이며, 클롯모어의 주인인 남자.
“……늦지도 이르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공작님께서는 여기에 초대받지 않으셨으니까요.”
“이 저택에서 날 불청객 취급할 자리는 없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죠.”
리디아가 얼마나 엄중한 얼굴을 하고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지 눈앞에 선했다.
“신부의 드레스 차림을 먼저 보겠다며 달려드는 것은 자신을 신사 나부랭이라고 주장하는 왈패 무리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괜찮아, 나는 아주 훌륭한 신사니까. 그래서 내가 늦은…… 아, 맙소사.”
리암은 이제야 가림막 너머에서 드레스를 들고나오는 브리를 발견했는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완전히 늦은 모양이네. 안녕, 다프네.”
그가 가림막 너머로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기 때문에, 다프네는 인사보다도 ‘가까이 오지 마세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리디아의 이야기에 깊이 생각을 하느라 여태 옷을 입지 못한 탓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블라우스를 걸쳤다.
“공작님.”
다프네가 옷을 입을 시간을 벌어 주자고 생각했는지, 리디아가 다시 그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부터 서튼 양을 가르칠 교사를 초빙할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허락하시겠죠?”
“다프네가 원한다면 그래야겠지.”
“원하고 안 원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곧 대왕비 전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흠?”
리암은 마치 그 이야기를 처음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의문을 표했다.
“그게…… 다프네의 교사와 무슨 관계가 있지?”
“있지요. 서튼 님이 전하께 좋은 인상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뛰어난 면모를 보여야 합니다. 마침 서튼 양은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것을 익혀 두었으니, 열흘간 부지런히 연습하면 그럴싸한 호칭 하나 정도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리암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다프네는 어째 이번에도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옷을 입는 손길이 다소 느려지고 말았다.
“두 가지…… 정도 이야기해 둘 것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부디 ‘내 서튼은 존재만으로 완벽해서 그런 준비는 필요치 않다.’라는 건 아니길 빕니다.”
이에 가림막 너머에 있던 다프네마저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리 리암이 다프네에게 정신이 팔렸기로서니, 한 나라의 공작이나 되는 남자가 그렇게 편향적인 시각을 가졌을 리는 없을 테니까.
“아주 잘 알고 있군.”
……그는 상당히 편향적인 모양이다.
리디아는 반발도 포기했는지 한숨을 쉬면서 두 번째 이야기에 관해 물었다.
“다프네는 다음 주에 페이지 부인을 뵈러 오린샤이어에 갈 거야. 동행하는 그대가 이를 잊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일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뿐입니다.”
“결혼식 전에 마음을 안정시켜 줄 상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정이 있었던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건 기회입니다! 전 정말로……!”
“알아, 알지. 그대가 누구보다도 다프네를 염려하고 있다는 건.”
다프네는 리디아가 단번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받아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프네의 우선순위는 그녀의 마음에 따른 일이지. 안 그래?”
“……아까운 기회를 놓치시는 겁니다. 정말로.”
“난 다프네만 놓치지 않으면 돼.”
“못 말릴 분이군요, 정말.”
“어차피 말릴 생각도 없었잖아. 그리고 자리 좀 비켜 주겠어?”
“……정말!”
리디아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곧 브리까지 데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작은 논쟁으로 시끄러웠던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다프네가 옷을 갈아입고 있던 터라 도톰한 커튼까지 모두 닫은 탓에 바깥의 소리가 거의 차단되어 버린 탓일 것이다.
곧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좁은 벽과 가림막 사이로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올곧게 빗어 내린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로 이제는 색기마저 내비치는 보라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묘한 미소를 그렸다.
스물여섯의 근사한 젊은 공작은 결혼을 앞두고 있음에도 여전히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그건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재산과 드높은 명예 그리고 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미모 때문일 터였다.
“정말로 늦었네.”
그는 다프네의 블라우스와 회색 치마를 위아래로 훑으며 아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보실 생각이었어요?”
“당연하지. 벌써 그 근거도 생각해 왔어. 그것도 다프네가 좋아할 만한 관점에서. 아, 일단 안을까?”
그는 느닷없이 두 팔을 옆으로 조금 벌렸다.
“그렇게 해 줘, 날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긴다면.”
다프네는 그를 가엾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푹 기대는 순간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리암은 순식간에 남은 거리를 좁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호흡이 막힐 정도로 빠듯하게 조여지는 느낌에 다프네는 사르르 두 눈을 감았다.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품으로 완전히 녹아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겨우 편안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평소 생활이 불편한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이렇게 안겨 있으면 그녀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긴장감이 사라지는 모양이다.
“미안해, 내가 먼저 이야기해 두었어야 했는데.”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사과에 다프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절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로 만드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갑지 않은 이야기까지 들을 필요는 없잖아.”
“나쁜 의도가 있는 이야기도 아닌데요.”
조금 전에 리암이 지적했던 대로 리디아는 나름대로 다프네를 염려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대왕비께서 온다는 좋은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기를 바랐을 테고.
“게다가 충분히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지. 그대의 삶에서 페이지 부인을 빼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리암은 다프네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은 바 있었고, 덕분에 페이지 부인이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제가 그럴듯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공작님께 도움이 될 만한…….”
자신 없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을까. 커다란 손이 다프네의 등을 느릿하게 토닥거렸다.
“그러니까, 리디아 님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따라 두 가지 정도 이야기할 것이 계속 생기네.”
“두 가지요?”
“음, 그래. 일단…….”
등을 두드리던 손길은 어느새 허리 근처로 떨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매만지고 있었다.
“날 공작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기로 했더라.”
조금은 장난기가 들어간 목소리였기 때문에 다프네는 고개만 빼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호칭이 중요한가요?”
“호칭은 어느 상황에서든 중요해. 지엄하신 전하를 어느 자리에서든 공경하면서 불러야 하듯이 말이야.”
그 지엄하신 분을 가리켜 리암이 개새끼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은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할 때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다프네는 두 팔로 그의 몸을 안고서 꽉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밀착해 있던 사이가 더욱 빠듯하게 조여져 옷 너머의 굴곡까지 전해질 듯 가까워졌다.
호칭이 틀리면 리암을 꽉 안아 주는 벌칙(?)을 몇 초간 수행한 후, 다프네는 두 팔에 힘을 풀어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간격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잘했어, 가끔은 이걸 기대하느라 그대가 틀리는 날을 고대하지.”
리암은 다프네의 이마 위로 쪽 입을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두 번째가 뭔지나 말해요, 리암.”
다프네는 이제는 더 실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그의 이름을 굳이 힘을 주어 발음했다.
“당신은 페이지 부인과의 약속을 지켜야 해.”
“하지만 그건 제게 정말로 기회라고요. 그런데도 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그야.”
리암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페이지 부인이 그대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거든.”
“…….”
“그대도 부인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일정이 정해지자마자 바로 사무엘과 기차표를 사러 갔을 정도로.”
“그야…… 그때는.”
“그대도 알지만.”
리암은 반걸음 정도 물러서며 다프네의 뺨을 감싸 쥐었다.
“왕가에서 내리는 호칭 같은 건, 몇 년 정도 불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 새로운 명예를 입은 누군가가 사교계에 나타나면 잊히기 마련이야.”
“그건 그렇지만요.”
“하지만 페이지 부인의 마음은 영원에 이를 정도로 깊지. 그런 가십 같은 호칭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야. 그러니까, 다프네.”
허리를 깊이 숙여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췄다. 더없이 진지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대가 가장 훌륭한 가치를 가진 것만 누렸으면 좋겠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페이지 부인이 ‘아기씨’라며 다프네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왕가의 인정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리암은 짧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감히 비교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왕가의 인정’에 대한 미련이나 열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어떤 명예도 페이지 부인이 주는 애정과 비교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역시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혹시…… 제가 대왕비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오히려 좋은데.”
리암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왕비께서 그대를 좋아하게 되어서 툭하면 수도로 불러 대면 나는 외로워서 비쩍 말라 버리고 말 테니까.”
“에이, 그럴 일은 없어요. 무엇보다 공작님이 외롭…… 아, 진짜.”
다프네가 호칭을 또 틀리고 말았기 때문에, 리암은 이제 끅끅 소리를 낼 정도로 웃기 시작했다.
“아 정말, 내 아가씨가 너무 귀여워서 어떻게 하지.”
이제 다프네가 그를 꼭 안아 주어야 할 때였지만, 리암은 이제 더 참을 수 없었으므로 잔뜩 힘이 들어간 다프네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고 말았다.
가볍게 닿고 떨어지는가 싶었던 키스가 깊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