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6화
떨떠름하게 따라나서긴 했지만, 그런 어색함은 놀라울 정도로 금방 사그라졌다.
엘은 다프네가 좋아하는 ‘요정의 주방’이라는 식당으로 안내하여, 그녀가 잊은 시간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었다.
“잠깐만, 공작님과 엘이 친구였다고?”
“응, 그래서 지난 휴가에는 내가 클롯모어로 갔었어. 다프네와 내가 두 번째 데이트를 한 것도 그때였어. 엄청 재밌었어.”
“전혀 몰랐어.”
그녀는 조금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걱정하지 마, 나에 대해서 다프네가 모르는 건 그것 외에도 잔뜩 있거든.”
그는 ‘이거 먹어 봐’라며 후식 케이크가 든 접시를 다프네의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서 다프네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느냐고 묻느냐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엘.”
다프네는 작은 케이크용 포크를 든 채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하는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왠지 다프네가 줄곧 생각해 오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았으므로.
“다프네는 나를 가장 잘 알아주는 좋은 친구야. 비록…….”
그는 살짝 턱을 괸 채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프네의 전부를 알지 못하고, 네가 나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안 그래?”
“그야, 그렇긴 한데.”
다프네는 시선을 내려 뾰족한 포크로 케이크의 표면을 살살 긁어 하얀 선을 만들었다.
“많은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무언가를 결정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왜 결정하지 못하는 거야?”
“그야…… 모르잖아.”
푹.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가 포크가 케이크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프네는 여전히 리암과의 관계에서 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지난 생에 그녀가 애슐리의 부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했다.
“과거도 모르면서 함부로 원하는 것을 갖는 건…… 너무 뻔뻔한 것 같아서.”
“…….”
“그래서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떠오르는 것은 없고, 괜히…….”
마음만 더 깊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그 감정에 온전히 몰입할 수도 없는데.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가 없어서, 다프네는 그냥 입술만 깨물고 말았다.
“그래도.”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던 엘이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다프네는 언제나 지금을 살잖아. 지금 느껴지는 대로 살면 되지.”
“그러다가 혹시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그리고 만약 거기에서 내가 정말 몹쓸…….”
다프네의 걱정이 길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엘은 딱 부러지는 말투로 그녀의 이야기를 끊어 냈다.
“내가 봤을 때 다프네는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규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
“그렇게 해서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실수하지 않으며, 누구의 기분도 거스르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 난…….”
다프네는 부정하려고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고 말았다.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대단히 화를 내기라도 하는 듯이.”
그건 묘하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양어깨를 움찔거렸다.
“누군가 화낸다면 맞서 싸워, 다프네.”
“…….”
그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서 평소처럼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무서울 게 뭐 있어. 이 땅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평생 다프네의 편인걸?”
“……그건.”
혹시 리암을 이야기하는 걸까.
다프네가 조심스레 추측하는 답을 건네려고 할 때, 엘은 타이밍 좋게 다프네의 입으로 케이크 조각을 쏙 밀어 넣으며 답했다.
“비밀이야.”
“움?”
생각보다 조각이 커서 우물거리며 묻자, 그는 또 잘린 케이크 조각을 입가로 내밀며 똑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평생 비밀이라니까, 쿡쿡.”
대체 뭐가 비밀인데? 라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벌렸다가는 또 케이크가 입 안에 들어올까 봐, 다프네는 그저 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 * *
엘은 마차를 빌려서 다프네를 공작가의 타운하우스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이를 거절했다.
지금은 조금 걷고 싶었다.
“오늘은 날씨가 꽤 싸늘한데. 곧 가을비도 올 것 같고.”
엘이 걱정했지만, 다프네는 귀를 덮은 모자 끝을 꾹 눌러쓰며 웃었다.
“따듯한 모자를 썼으니까 괜찮아. 비는 밤이나 되어야 올 거고.”
“그럼 같이 걸을…… 아, 아니다.”
엘은 잠시 시간을 확인하더니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
“바쁜가 봐?”
“응, 아무래도 가문을 이어받은 후로는 늘 이렇다니까. 그래도 다프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는 주소 하나가 적힌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여기로 심부름꾼을 보내. 아침이든 밤이든 상관없어. 꼭 달려갈게.”
“고마워.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고맙긴, 다프네가 내게 준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걸.”
“내가 해 준…… 것? 그게 뭔데?”
“비밀이야. 그리고 좋아해, 다프네.”
그가 손을 흔들며 건넨 인사말이 왠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다프네는 그와 함께 마주 손을 흔들며 적절한 대답을 해 주었다.
“어, 응. 물론 나도 엘을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오늘따라 아주 확실하게 말해 주네?”
“어?”
“아니, 그럼 이만 갈게.”
엘은 다시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는 가까운 골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걸음마다 시계를 꺼내어 살피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급한 일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 나중에 만나자고 해도 되었을 텐데.’
다프네는 나중에 엘을 만나면 오늘의 일을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우연히 만난 다프네가 고민이 많아 보여서 급한 일이 있어도 식사를 청한 것일 테니…….
‘그럼, 나도 이제 돌아갈까.’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가량 남아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각자의 목적으로 활보하는 사람들로 넘쳐 나고 있었다.
마침 가까운 대성당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따라 걸으며 다프네는 그와 맹약을 맺던 날을 떠올렸다. 마침 당시에 걷던 길을 걷고 있었다.
「침묵은 금이지.」
「그거 제가 진짜 싫어하는 말입니다. 침묵은 침묵이고, 금은 금입니다. 그리고 저는 금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대꾸하는 그녀에게 리암은 보석상의 금목걸이를 가리키며 ‘저런 거?’라고 물어 왔었다.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그때의 보석상 앞이었는데, 오늘도 금목걸이가 전시되어 있었다. 비록 디자인은 다르지만 말이다.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더라…….’
그와 요란하게 떠들던 이야기를 헤아리고 있을 때, 그녀를 알아본 보석상 주인이 얼른 가게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서튼 씨!”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다프네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마 수행원으로서 리암에게 필요한 보석을 구매하며 안면을 트지 않았을까. 다프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오셨군요. 맙소사, 공작님께서 언젠가 사람을 보내어 물건을 찾아가겠다고 하셔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사람을 보내?
의아해하던 다프네는 재촉하는 보석상을 따라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석상은 곧 가게 금고에서 고급스러운 천에 싸인 물건을 하나 가져왔다. 어른 손 크기의 물건이 들어 있는 듯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혹시, 공작님께서 대금 지급을 하지 않으셨나요?”
“설마요!”
보석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음이 담긴 물건이 주인을 만나지 못하는데 보석상으로서 이보다 더 속상한 일이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 보석상은 그 ‘마음에 담긴 물건’을 다프네의 앞으로 쭉 밀어냈다. 어서 열어 보라는 듯.
무엇일까. 새로 주문한 보석일까?
아니, 그런 것치고는 꽤 묵직했다. 보석상이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 제법 단단한 소리가 났을 정도니.
다프네는 보드라운 천을 쥐었다.
천 안에 든 물건에 손끝이 닿았는데, 그 차가운 감각이 어쩐지 익숙했다.
그녀는 얼른 천을 당겼다.
그 순간에는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큰 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주문은 했어.」
「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이건 그냥 순수한 구애 행위야.」
그것이 그녀가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임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바로 그것 말이다.
“바로 가져가시겠어요? 조금 무거운데 지정하신 곳으로 바로 배달해 드릴까요?”
그건 몹시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가 들고 갈게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세요.”
보석상이 금괴를 다시 천으로 소중히 감싸 주었고, 다프네는 이를 작은 가방 안에 넣었다.
무게 탓에 가방이 이상한 모양으로 늘어졌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프네는 인수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부리나케 가게를 빠져나왔다.
마차가 있으면 잡아서 타고 싶었는데, 어째서인지 빈 마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결국, 다프네는 마차를 포기하고 가방을 끌어안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떠올랐어!’
비록 한 가지뿐이지만, 리암에게 이 사실을 전하면 그는 무척 기뻐할 것이다.
그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들뜬 심장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함께 울려 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는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다프네는 이제 더는 그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은 과거의 기억 속에, 그녀가 리암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가 백 가지 정도 있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아…… 좋아해, 다프네 서튼.」
그 말에 어울리는 답을 몰라 여태 고민했으나, 이제는 확실하게 답을 알았다.
비록 오랜 시간을 들인 것에 비해서 너무나도 싱거운 답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리라.
‘실은, 저도 좋아해요, 공작님.’
이렇게 말하면 그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를 상상하며 미소 지을 때…….
밤늦게 온다던 가을비가 갑자기 쏴 내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