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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7)화 (137/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7화

다프네는 가까운 나무 아래로 얼른 뛰어 들어갔다. 가지 사이로 내려오는 굵은 빗방울이 이따금 그녀의 머리로 툭툭 떨어졌지만, 그냥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엘이 했던 이야기가 맞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시내를 지나올 때 우산을 살 것을 그랬다.

‘조금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아프도록 땅을 때려 대는 강한 비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프네는 여태 달리느라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무에 조금 더 붙어 섰다.

고급 주택가에는 오늘따라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이렇게 싸늘해지는 시기에 굳이 수도에 머무는 부자는 드물었다. 이럴 때는 따듯한 지역에 지어 둔 별장에서 보내기를 선호하니까.

“……?”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한 주택이 다프네의 눈에 띄었다.

상앗빛 외벽에 끝이 뾰족한 푸른 지붕을 얹은 것으로, 정원에서 시작된 풍성한 덩굴이 주택 벽을 타고 2층까지 감싸고 있었다.

‘아, 여름에는 꽃이 피면 정말 예뻤는데.’

순간 자신도 모르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꽤 놀라운 것이다.

어째…… 그녀가 저 주택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지나가면서 유심히 봤을지도 모르지.’

다프네는 이 기묘한 익숙함을 대단치 않게 여기며 떨쳐 내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 자꾸만 그곳으로 시선이 가고 말았다.

주택의 주인은 추위를 피해 먼 곳으로 떠났는지, 창문마다 커튼이 내려와 있었다. 아마 지금은 최소한의 사용인만 남아서 관리를 맡고 있을 것이다.

‘우산을 빌리러 가 볼까?’

주택의 품격은 곧 주인의 품격이기도 했다. 그리고 품격 있는 주인을 모시는 사용인이라면 곤란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아량을 갖추었을 터다.

잠시 비가 잦아들자 다프네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로 주택으로 뛰어들었다.

주택 뒤편에 도착하니, 작은 텃밭과 창고가 보였다. 비가 오는 탓인지 사람은 없었다.

다프네는 얼른 지붕 아래로 들어가 치맛자락을 털어 내고는 뒷문을 노크했다.

고맙게도 바로 문이 열리긴 했는데.

“……?”

안에서 나온 사람은 다프네가 기대한 집사나 가정부가 아니었다. 우비를 입고 사다리를 어깨에 걸친 일꾼으로, 수리를 위해 출장을 나온 듯했다.

그는 문을 열자 홀딱 젖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 당황스러웠는지, 놀란 눈으로 다프네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외투에 달린 공작가의 배지를 발견하고는 씩 미소를 지었다.

“아, 슬로언 공작님이 보내신 모양이죠?”

“네?”

다프네는 갑자기 리암이 언급된 것에 놀라워했으나, 일꾼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어쨌든 말씀하신 지붕과 창문 수리가 끝났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 마쳐서 다행이지 뭡니까. 그럼 청구서는 평소처럼 보내 두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비의 후드를 눌러쓰며 비가 내리는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다프네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열린 문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공간에는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례…… 합니다.”

다프네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목소리를 높여 그리 말하곤 조심스레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안 계세요?”

문을 닫으며 재차 외쳐 보았지만, 마중을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사용하지 않는 주택인 듯싶었다.

‘게다가 공작님은 왜 여기를 수리하신 거지?’

떠오른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금방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에 리암이 수도에 새로운 주택을 매입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린든 남작의 집에서는 소중한 추억이 있다면서. 대체 그 추억이 무엇인지는 절대로 말해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엇이었을까?

그 궁금증이 밀려올 때는 자연스럽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주택을 둘러보면 리암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순간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리암의 선물을 보자,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처럼 말이다.

문을 열자 텅 비어 버린 입구 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이나 벽에 걸린 그림 하나 없었다.

남작이 죄가 확정되기 전에 주택에 있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팔아 댄 탓일 것이다.

다프네는 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현관을 천천히 빙 둘러 걷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먼지가 하나도 없어.’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나무로 된 바닥은 얼마 전에 기름을 먹였는지 예쁘게 반짝이고 있을 정도였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불러 꼼꼼히 관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정원의 덩굴도 가지런한 모양으로 손질이 되어 있었다.

그 외관을 보고서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새삼 리암이 정말로 이 집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것도 아마 그 ‘추억’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니 다프네는 그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여기에서 애슐리를 무너뜨릴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라도 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다프네는 현관 옆으로 이어지는 어느 방문을 열었다.

바닥부터 천장 근처로 이어진 커다란 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원이 잘 보이니 주 응접실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실내 한편에는 남작이 팔지 못한 듯한 소파가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응접실에서 나온 후, 다프네는 바로 2층 계단으로 올라가 몇 개의 방을 살폈다.

여기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실내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고, 가구는 반짝이게 관리되어 있었다. 주기적으로 환기를 시키는지 공기가 무겁지도 않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커튼과 침구만 아니라면, 주인이 비운 지 며칠 되지 않은 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딱히 떠오르는 건 없네.’

다프네는 왠지 김이 빠져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혹시 실내를 쭉 둘러보면 보석상이나 이 주택을 발견했을 때처럼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있을 거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하긴, 지금은 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기억을 되돌리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슬슬 돌아가자.’

다프네는 계단 옆에 난 창문을 통하여 바깥을 확인했다.

어느새 빗줄기는 확연하게 잦아들었다. 저 정도라면 우산을 쓰지 않고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텅 빈 현관으로 돌아온 다프네는 다시 뒷문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선 끝에 그녀가 둘러보지 않은 어떤 방이 눈에 띄었다.

조금 전에 둘러본 응접실의 맞은편에 있는 것으로, 그때는 계단으로 바로 향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다프네는 그 방을 둘러볼까 하다가 멈칫했다. 다른 방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냥…… 가자.’

리암과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는 만나기로 했으니 그다지 여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꼴로 그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적어도 그보다는 먼저 도착하고 싶었다.

“…….”

그런데 어째 자꾸 굳게 닫힌 저 장소가 신경 쓰였다.

‘살짝…… 문밖에서 들여다보기만 할까?’

아무래도 망설이느라 시간을 쓰느니 간단히 둘러만 보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다프네는 곧 가던 방향을 바꾸어 둘러보지 않은 방 앞에 섰다.

차가운 문고리를 돌려서 밀어내자, 좁은 틈 사이에서 오랜 종이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마 습한 날씨라 더 강하게 느껴졌으리라.

‘서재……?’

그리 생각하며 남은 문을 밀어 열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 높은 책장이 사방에 있었고, 모두 빽빽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다프네는 바깥에서만 둘러보기로 했던 것을 잊어버리고서, 홀린 듯이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종이 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글쎄.」

그리고 리암의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그리 말하며, 그는 살짝 시선을 돌렸었다.

그들은 숨어 있었고, 서로 몸을 밀착시키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들킬 위기를 함께 넘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여기…… 에서.”

흐릿하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가지런히 꽂힌 책등을 손으로 쓸어 냈다.

또 과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다프네 자신의 이야기였다.

「많이 힘드시면, 제게 기대셔도 됩니다.」

이에 「아니.」라며 거절하는 리암의 목소리에는 묘한 열기가 묻어났다. 아마 당시의 다프네는 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아마…… 눈치도 없이 그의 손을 쥐었던 것이리라.

그때의 감각을 떠올린 손끝이 왠지 뜨거워졌다. 어느덧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툭 떨어뜨린 후였다.

창가 앞에 도착하여 다프네는 굳게 닫힌 커튼을 살짝 밀어 열었다.

두 사람이 숨기에는 좁아 보이는 창틀을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다프네는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당장…… 손 놔.」

그가 진한 눈빛으로 경고를 건넬 때가 되어서야, 둔해 빠진 다프네라도 이에 숨겨진 노골적인 감정을 이해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지? 기억은 금방 떠오를 듯 기억나지 않았다.

“일꾼이 그대를 봤다더니.”

마침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다프네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감기 걸리겠어.”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다프네의 뺨과 머리카락을 조금 닦아 주었다.

“어서 돌아가자. 앞에 차 세워 뒀어.”

“공작님.”

다프네는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지난 기억 탓인지 어째 그의 손을 붙잡아 버리고 말았다.

그가 흠칫 놀라며 돌아볼 때, 다프네는 드디어 남은 기억이 떠올랐다.

「나랑 키스라도 하자는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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