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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4)화 (134/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34화

다음 날, 새벽에 눈을 뜬 리암은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제 방을 배회했다. 아직 다프네가 오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사실은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먼저 다 해 버릴까 싶었지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왠지 그런 것은 싫어할 것 같았다. 서튼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무료해진 그는 책장 위에 숨겨 두었던 열쇠를 꺼내어 그의 비밀 서랍을 열었다. 다프네의 수첩이 든 것 말이다.

그는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여기에 글을 적어야 했던 시간의 그녀를 생각했다.

“……다프네.”

그 끔찍한 남자, 애슐리 슬로언과 함께 지내며 얼마나 괴로운 일을 겪었을까.

감옥에 있던 리암은 그런 다프네에게 도움 하나 되지 못했다. 아니 되려 다프네가 서류를 찾아 준 덕분에 그가 감옥에서 빠져나왔으니…….

‘어제 내가 했던 말이 딱히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구나.’

무심결에 ‘기억이 돌아온 후에 대답해도 된다.’라고 했던 것 말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후.”

그렇게 한숨을 내쉴 때, 곧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조금 놀라서 돌아보니 거기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다프네가 서 있었다. 가지런히 빗어 내린 은발, 구김 없는 수수한 블라우스, 발목까지 내려오는 짙은 스커트.

“내가…… 일찍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했던가?”

리암은 서랍을 얼른 닫고 일어섰다.

“아뇨, 하지만 그리하실 줄 알았습니다. 누우세요, 얼굴에 저민 오이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다프네는 그가 잠을 설쳐서 푸석푸석한 꼴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도 예측하였던 모양이다.

“그대는 괜찮아?”

“저는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 어제는…….”

“어, 어제는! 빨래를 맡긴 채 가 버려서 죄송했습니다.”

리암이 어제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던 걸까. 다프네가 황급히 그의 말을 막아섰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으로 보아 조금 곤란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

리암은 조금 전에 결심한 일을 생각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을 상대로 그의 마음만 앞세워 어떻게 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깊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그렇다는 거니까.”

“…….”

“그대는 그대답게 지내면 그만이야. 사무엘의 누이로, 페이지 부인의 아기씨로, 내 서튼으로.”

리암은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성큼성큼 침대에 털썩 누웠다.

“…….”

다프네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러다가 다시 어제처럼 어색한 사건이 벌어지면 곤란하므로, 리암은 장난스레 웃으며 ‘오이는?’이라며 그녀를 재촉했다.

“아, 네.”

조금 늦게 답한 다프네는 얼른 썬 오이가 가득 담긴 유리그릇과 수건을 가져왔다.

“오이가 굴러떨어지면 곤란하니, 부디 가만히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 내 전문인 거 알잖아.”

“알긴요.”

드디어 다프네가 피식 웃었기 때문에 리암은 다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침대 밑으로 오이가 굴러떨어져서 요란을 떤 기억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런 것만 기억하는 거지?”

“그야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이제는 정말 가만히 계세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다프네는 그의 뺨 위로 오이를 툭 올렸는데, 리암이 씩 웃는 바람에 금방 데구루루 떨어지고 말았다.

리암이 가느다랗게 눈을 떠 보니, 날카로운 눈을 한 다프네가 그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귀여웠으므로, 그는 다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 * *

사실은 지난 밤에 다프네도 거의 잠을 설쳤었다.

아침 일찍 그를 찾아간 것은, 왠지 리암 역시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왠지 그를 빨리 만나고 싶었다.

‘아니지.’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씻으며, 다프네는 이 무시무시한 생각을 부정했다.

그와 일찍 만난다는 건 다프네의 업무 시간이 늘어난다는 뜻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굳이 서둘러서 그를 만나러 갈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어째 좀 헝클어져 보이는 것도 신경 쓰였다.

다프네는 한참 동안 제 머리를 빗었고, 굉장히 시간을 들여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다.

리암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왠지 근사하게 입고 싶은 날이 있는 거니까. 비록 다 비슷비슷한 옷뿐이지만 말이다.

바로 리암의 방으로 향하던 다프네는 금방 생각을 바꾸어 잠시 주방에 들렀다. 아무래도 오이를 썰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좋아하시겠지?’

아셔도 그렇고 리암도 은근히 피부에 신경 쓰는 것을 즐기는 편인 것 같았으니까.

그가 ‘역시 내 서튼이야!’라고 말해 주는 상상을 하자, 괜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빨리 가져다드려야지.’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2층까지 올라왔다. 드레스 룸에 들러 오늘 그가 입을 옷까지 챙겨 든 후, 비로소 그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는 조금 이상했다.

왠지…… 노크하고 싶지 않았다. 참 이상하게도 말이다. 새벽 내내 리암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노크할까 아니면 다시 돌아가서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 다시 올까.

종종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쑥 다가왔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집사 던컨이었다.

“……집사님?”

그는 손가락을 입술 근처에 댄 채로, 굳게 닫힌 문을 살짝 열어 주었다. 그 후에는 별다른 말 없이 다프네의 뒤를 지나가 버렸다.

다프네는 한 뼘만큼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생각대로 리암은 깨어 있었는데, 서랍장 앞에서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이 열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깊이 집중해서.

‘뭘…… 보시는 거지?’

문이 열리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업무에 관한 것일까. 그 외에 달리 그가 집중할 것은 없을 테니까.

‘돌아갈까?’

괜히 그의 중요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물러나려는 때, 신기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

그것도 그녀를 간절하게 부르는 소리.

이를 듣자 어느새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었다.

* * *

리암의 고백 이후 벌어진 일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리암은 의사에게 혼이 났다.

다프네는 제 글씨로 기억이 가득 적힌 수첩을 돌려받았다.

사용인들은 모두 의문의 보너스를 받았다.

대신 리암은 그들의 열렬한 위로와 응원을 받을 수 있었다.

단, 아셔는 돈만 받고 응원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리암을 끌어안는 척하며, 그의 척추를 아프도록 짓누르는 악행을 저지르다가 다프네에게 혼이 났다.

브리와 다프네는 의문의 보너스로 데이트를 다녀왔는데, 즐겁게 다녀오는 두 사람을 복도 너머에서 리암이 부러운 듯 바라보는 모습이 발각되었다.

리암을 시중들고 나온 다프네가 문 앞에서 심장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몇 번인가 눈에 띄었다.

사용인들은 드디어 그들이 서로에게 호감을 품은 것이라며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암이 다프네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기 시작한 이후로 그 두근거리는 분위기는 파국에 이르렀다.

멱살만 잡지 않았지, 서로 잡아먹을 듯 싸웠다는 목격담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다프네가 건강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므로 의사와 마법사는 수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프네에게 주기적으로 진찰받으러 오라는 당부를 남긴 채로.

그 이후로는 비가 몇 번 더 내려 날씨가 더욱 서늘해졌다.

올해는 풍년일 거라는 예측과 함께 농작물이 작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자, 다프네는 드디어 리암의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냈다.

그간 리암을 운전대에서 물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집사는 물론 운전사까지도 그녀의 업적을 칭송했다.

사실 리암은 여전히 다프네가 운전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다프네가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제가 운전하는 건…… 역시 싫으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더듬거리며 ‘조, 좋아.’라고 멍청히 대답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가 좋아하는 것은 다프네의 운전이 아니라, 다프네 그 자체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리암이 운전의 자유를 빼앗긴 채로 가을이 무르익어, 어느덧 다프네가 수도로 정기 진찰을 받으러 가는 날이 되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수도행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 클롯모어 중앙역을 향했다.

“질문이 있는데요, 공작님.”

“뭐든 물어봐.”

다프네는 이동 비용을 아끼기 위해 구매한 삼등석의 옆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실까.”

리암은 직접 준비해 온 커다란 가방을 짐칸에 훌쩍 올려놓고는 얼른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턱을 괴었다.

“진찰을 받으러 가는 사람을 혼자 보내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어.”

“그 짐은 다 뭐고요?”

“별거 안 넣었어. 생활에 꼭 필요한 것뿐이지.”

“뭔데요?”

“일단 그대의 새 겨울 부츠.”

“저도 모르는 부츠는 왜 사신 겁니까?”

다프네가 따져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이었다.

“날씨가 급속도로 추워지니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장화랑 우비, 만찬에 입을 드레스랑 그리고…….”

그가 나열하는 것은 오직 다프네의 물품뿐이었다. 그녀로서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주 제 베개도 챙기지 그러셨습니까?”

“하, 대체 날 얼마나 한심한 놈으로 생각하는 거지?”

리암은 다프네의 앞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고는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챙겼지. 잠자리가 바뀌면 불편할지도 모르니까. 물론 만약을 대비해서 그대가 좋아하는 무릎 담요도 가져왔어.”

“…….”

“혹시 열차에서 추우면 꼭 말해야 해.”

“맙소사.”

마침 덜컹거리며 기차가 출발했다. 아직 자리에 앉지 못한 중년 부인이 넘어질 듯 휘청이다가 비어 있는 그들의 맞은편 자리를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왔다.

“죄송해요. 빈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어 있어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부인은 짐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곧 친근하게 이야기를 걸어왔다.

“두 분은 연인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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