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9화
온종일 그렇게나 많은 키스를 받았는데도 어째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의 키스뿐이었다.
그것도 며칠이나 전에 받았던 것 말이다.
‘……공작님이 내게 저주라도 건 게 아닐까.’
다프네는 괜히 그리 생각하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젠 정말 자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프네는 지난 밤에 그런 꿈을 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제는 꿈에서 본 연말 행동강령을 거의 행하지 않았나.
미루어 온 아버지의 코트를 말끔하게 손질했고.
다소 어려운 관계였던 리디아 슬로언과도 키스를 나눌 만큼은 마음을 터놓았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편지인데…….
“다프네, 편지가 왔군요.”
마침 아침 식사를 하러 나온 그녀에게 집사가 편지를 전해 주었다.
“급하게 보낸 것인 모양입니다.”
집사가 봉투의 붉은 테두리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통상보다 세 배의 가격을 내야 하는 긴급우편이었다.
다프네는 바로 겉면을 확인했다.
페이지 부인한테서 온 편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다프네와 사무엘을 키워 주었던 따듯하고 다정한 분 말이다.
급하게 편지를 보낸 것은 다프네에게 시간 맞춰 새해 인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기쁘네요.”
게다가 페이지 부인 덕분에 꿈에서 본 칼럼의 내용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반가운 내용이면 좋겠군요.”
집사가 어서 확인해 보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고, 다프네는 급한 손길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꽤 빽빽한 편지가 들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작고 얇은 종이 한 장과 명함뿐이었다.
편지에는 한 줄의 문장이 전부였다.
[사무엘 도련님이 화마에 휩싸이고 말았어요. 명함에 적힌 주소로 서둘러 와 주세요.]
사무엘 그리고 화마.
이 두 단어가 함께 놓인 짧은 문장에 다프네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 있었다.
클롯모어로 도착하는 열차, 다프네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무엘의 미소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킨 새빨간…….
“다프네 서튼!”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
“너 왜 그래, 진짜 미쳤어?”
앨러스테어였다. 어느새 그녀의 가슴께까지 자란 소년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팔을 뻗어 그녀의 긴장한 등을 쓸어 주었다.
“앨러스테어, 저…… 저.”
다프네가 말을 더듬을 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자 그는 침대 밑에 놓인 트렁크를 직접 꺼내어 열었다.
“편지 봤어. 대체 언제까지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할 거야?”
앨러스테어는 그녀의 손을 끌어서 옷장 앞에 강제로 세워 두었다.
“네 작은 서튼이 위독하다는 이야기잖아.”
“아.”
다프네가 다시 울음을 터트릴 듯 제 입술을 틀어막자, 앨러스테어는 두 손으로 다프네의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쥐었다.
“정신 차려! 수도로 가는 급행 기차는 30분 뒤에 있으니까 서둘러야 한다고. 그 이후에 급행을 타려면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해. 넌 뭘 탈 거야?”
다프네는 멍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답을 건넸다.
“사…… 삼십 분 후의 급행이요.”
“옳지.”
앨러스테어는 꼭 아이를 칭찬하는 것 같은 투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프네를 놓아주었다.
“어머니가 역에 연락해 자리는 확보했어. 이제 네가 30분 안에 준비를 마치고 기차를 타러 가면 되는 거야.”
“리디아 님이요? 대체 언제…….”
“너, 정말로 정신이 나갔었구나?”
앨러스테어는 턱 끝으로 옷장을 가리켰다. 어서 옷이나 가방에 넣으라는 뜻인 것 같아서, 다프네는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옷이나 트렁크 안에 쑤셔 넣었다.
“편지를 받은 이후에 네 상태가 이상해서 모두가 걱정했어. 어쩔 수 없이 내가 대표로 편지를 읽었고. 사생활 침해라고 하지 마, 걱정시킨 네가 나빠.”
가방이 그새 꽉 차자 앨러스테어는 그녀를 대신해서 가방을 꽉 닫아 주었다.
“……앨러스테어.”
“고맙다고?”
그가 가방을 건네며 물었고, 다프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영지민을 돕는 건 영주의 의무야. 그리고 나는 지금 공작님을 대신하고 있고.”
앨러스테어는 다프네의 모자와 장갑도 챙겨서 손에 들려 주었다.
“공작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이렇게 하셨을 걸 알아.”
“…….”
“수도에서도 어려움이 있으면 가장 먼저 여기로 편지를 보내는 것 잊지 말고. 알겠어? 항상 우선으로 처리할 테니까.”
앨러스테어는 다프네를 향해 다가와 잔뜩 엄포를 놓는 듯한 얼굴로 이렇게 강조했다.
“넌 클롯모어의 사람이야. 무엇이든 혼자 이겨 낼 필요 없어.”
그건 꽤 감동적인 말이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그가 건네준 모자를 쥔 채로 앨러스테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빨리 나가 봐, 차를 대기시켰으니까.”
“앨러스테어.”
“뭐? 역까지 같이 가 달라고? 하, 미치겠네. 넌 진짜 어린애야. 가만히 보면 우리 피오나랑 하는 짓이 똑같다니까.”
“저, 그런 소리는 안 했습니다.”
“…….”
딱 잘라 건넨 다프네의 답에, 어째 앨러스테어의 얼굴이 빨개졌다.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정말로…….”
“돼, 됐어.”
그는 손을 내저으며 몸을 획 돌렸다.
“휴가 기간 안에 돌아올 생각이나 해. 공작님께는 내가 보고해 둘 테니까.”
“네!”
다프네는 씩씩하게 답하고는 앨러스테어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수도에 다녀오겠습니다.”
* * *
제법 이성을 되찾았음에도 수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다프네는 내내 불안과 싸워야 했다.
혹시 사무엘이 잘못되었을까 두려웠다.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기차가 수도 중앙역에 도착했다.
다프네는 열차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려, 가방을 높이 챙겨 들고서 역 앞으로 달려갔다.
잽싸게 대여 마차를 잡아탄 후에는 챙겨 온 명함을 마부에게 내밀었다.
“여기로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마부는 명함에 적힌 ‘병원’이라는 문구 덕분에 다프네의 상황을 금방 이해해 주었다. 자신만 믿으라는 고마운 답변과 함께 복잡한 역 부근을 금방 빠져나가 주었다.
“소중한 사람이 꽤 아픈 모양이지요? 걱정이 많겠습니다.”
“네?”
문득 마부가 묻는 말에 다프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 뭐냐…… 아무래도 ‘그 병원’이니까 말입니다.”
다프네는 이제야 페이지 부인이 챙겨 준 명함을 유심히 읽어 보았다.
부끄럽지만 지금까지는 사라진 시간을 떠올리는 것에 얽매여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저 빨리 사무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
“왕립 병원…….”
그곳은 각종 희소병이나 높은 수준의 의료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세워진 곳이었다.
이전 생의 다프네와는 인연이 없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저 애슐리가 몇 번인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
“동생이 치안대원이에요. 아마 그래서일 거예요. 심하게 다친 건 아니라고…… 믿어요.”
“이런, 내가 더 걱정하게 했군요. 미안해요.”
마부는 슬쩍 뒤를 바라보며 모자를 벗었다. 다프네는 가만히 고개를 저어 그의 사죄를 받았다.
“그런데 치안대원이라면, 혹시.”
그는 말을 재촉하며, 거주 구역 한편의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된 건물 외벽이 새카맣게 타 버려, 무너질 듯한 골조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
“……!”
다프네가 굳은 얼굴로 이를 바라만 보고 있자, 마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손님의 동생이 저기에서 활약하신 거라면, 동생분은 정말 대단한 영웅이에요.”
“화마에 당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죠?”
“어른들이 아이들만 집에 두고 새해 파티를 간 모양입니다. 추운 날씨에 아이들이 직접 불을 피워 물을 데우려고 하다가 그만…….”
“…….”
다프네는 차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깨물었다. 보호자의 태만으로 일어나는 이런 안타까운 사고는 몇 번인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치안대원이 불길 속에서 아이들을 찾느라 꽤 고생했을 겁니다. 이후에 마법사들까지 동원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쯧.”
그가 혀를 차며 이야기를 멈출 때 즈음, 마차가 왕립 병원의 입구에서 멈추었다.
마부는 다프네의 무거운 가방을 내려 주며, 그녀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냥 가세요. 마차 비용은 동생분이 이미 내셨습니다.”
“아뇨. 아니에요, 제가 낼게요!”
다프네가 지갑을 꺼내려 들자, 그는 도망치듯 마차 위로 올라 출발해 버렸다.
“아…….”
사무엘의 수고를 기리며 마부가 비용을 거부할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큰 사고였기에…….
다프네는 자꾸만 나쁜 쪽으로 기우는 생각을 억지로 붙들어 균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들고서 병원 입구를 돌아보았다.
그토록 숨 가쁘게 달려왔음에도 막상 실제로 사무엘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조금 전에 보았던 끔찍한 화재 현장과 마부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지옥을…… 연약한 동생이 무사히 견딜 수 있었을까? 다프네는 도무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 병원 내부로 들어가자, 저절로 두 다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다프네는 직원에게 신분을 밝힌 후 ‘사무엘 서튼’의 병실을 물었다. 곧 그가 ‘중환자 병동’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중…… 환자 병동.’
다프네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직원이 알려 준 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병실 앞에 도착하자, 마침 복도에 나와 있던 페이지 부인과 만날 수 있었다.
“부인!”
다프네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그녀의 품에 안겼다.
꼭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부인의 몸에서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향기가 흘렀다. 폭신한 털실에 얼굴을 묻은 듯한 따듯한 냄새…….
“부인, 흑!”
곧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사무엘은요? 사무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