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78화
다프네는 두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리암은 얼떨결에 그대로 이끌려가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당하고 말았다.
“헉……!”
“다 했으니, 이제 가시면 됩니다.”
다프네가 빤히 바라보며 건넨 말에, 그는 조심스레 제 이마를 문질렀다. 그새 열이 올랐는지 이미가 뜨거웠다.
“……다프네.”
“예.”
“난…… 그대가 원한다면 왕위도 물려받을 수 있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을 것 같아.”
진심이었다.
딱 이런 식으로 엘리엇을 조련하기만 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다프네는 그게 무슨 썩은 무도 하지 않을 소리냐며, 리암을 타박할 뿐이었다.
이제 역장이 그들을 빤히 바라보며 탑승을 재촉했기에, 리암은 서둘러 기차에 올랐다.
편안한 일등석 자리에 앉자 창문 너머에서 손을 흔드는 다프네가 보였다.
그는 턱을 괸 채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왠지 깊은 한숨이 섞인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 *
한 해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슐리와 함께 사는 집, 다프네는 애슐리가 던져 놓고 간 출장 가방을 열었다.
사흘간의 짧은 출장 기간에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그의 옷에서는 쉰 냄새가 지독할 만큼 진동했다.
오물이 썩어 가는 냄새 같아, 라며 다프네는 옷을 비눗물에 넣고 벅벅 문질러 세탁했다.
세탁을 마치고 나면 독한 약품 탓에 손가락이 간지러워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대로 세탁해 놓지 않으면 언제 또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쉰내 나는 로브를 벅벅 문지르며 빨래할 때.
멀리에서 한 해의 마지막과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잠시 일을 멈추고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은 새해를 기념하는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프네는 최근 신문에서 읽은 칼럼의 내용이 떠올랐다. 행복한 새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나, 미루어 온 일을 실행한다. 어려운 일일수록 좋다.
둘, 해묵은 관계를 정리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내년으로 가져가지 않도록 한다.
셋, 만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편지로 안부를 전하여, 언젠가 만날 날을 기약하자.
모두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다른 세상으로만 보였다.
다프네는 그냥 다시 고개를 숙였다.
쉰내 나는 빨래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 *
“…….”
다프네는 갑자기 눈이 떠졌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꾼 탓에, 다프네는 한 가지 공포로 심장이 죄어들었다.
혹시, 다시 돌아왔을까.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의 방이었다. 아직도 벽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코트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왜 그런…….”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주방 등불에 의지하여 외롭게 신문이나 읽던 시간의 어디가 그리워서…….
어쨌든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이런 꿈을 꾸다니, 몸이 허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고기를 먹어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구마 의식이 먼저였다. 다프네는 구전되는 효과적인 주문을 외워 보았다.
“사라져라, 이 악마야!”
왠지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어른들의 지혜는 멋졌다.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서, 긴 머리를 높이 묶어 올렸다.
딱히 꿈에서 본 칼럼 때문은 아니지만, 오늘이야말로 미루어 온 일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코트 앞에서 양손을 허리 위로 올린 채로 샐쭉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로 깨끗하게 세탁하고 손질할 거예요.”
일단 이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고기, 고기를 먹어야지.
몹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도록, 배 속에 남의 살을 가득 채워 두는 신성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 * *
“오랜만에 보는군요. 그 코트 말입니다.”
고깃덩이를 정복하고, 아버지의 코트를 손질하고 있을 때 집사 던컨이 다가와 조용히 이야기를 걸었다.
“집사님.”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두 손을 뻗었다. 물론 그는 기꺼이 젊은이에게 제 이마를 내주었고, 그녀의 이마에도 진실한 축복의 키스를 해 주었다.
“오늘에 어울리는 용기를 냈군요, 다프네.”
던컨이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봐 주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왠지 놀랍고 부끄러웠다.
“……헤헤.”
사실, 지금까지 몇 번인가 세탁하려다가 이 옷 어딘가에 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줄곧 실패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한 것과 별개로, 아버지의 손길을 스스로 지운다는 행위가 용납되지 않았다.
“왠지 이대로 두면 아버지께서 입기를 거부하실 것 같아서요.”
“리처드 서튼은 청결한 멋을 아는 신사니까요.”
집사의 정확한 이야기에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아버지께서 언제든지 입으실 수 있는 상태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그리움을 고집하는 것보다는요.”
“그가 기뻐할 겁니다. 분명히.”
“그러길 바라요.”
“그럼 저녁 파티에서 다시 봅시다.”
그와 인사를 나눈 후, 다프네는 다시 자리에 앉아 벌어진 솔기를 바느질했다.
아버지의 옷을 세탁하는 날에는 왠지 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주는 힘 덕분인지 왠지 지금은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아야!”
……그러다가 바늘에 쿡 찔리고 만 순간에는 도무지 웃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 * *
“넌 바보야?”
앨러스테어의 지적에 다프네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키가 부쩍 자라 버린 열네 살 소년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교양 있는 말투를 사용하세요, 앨러스테어.”
정말 두려운 것은 다프네의 손에 약을 발라 주는 리디아 슬로언이었다. 그녀는 주인이 없는 저택이 걱정된다며 얼마 전부터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서튼은 바늘에 찔린 손을 입 안에 덥석 물고 있었다고요.”
그건 사실이었다. 다프네는 습관적으로 바늘에 찔린 손가락을 입에 물었고, 피 맛이 나는 손을 쪽쪽 빨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리디아 모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그건…… 저희 가문의 민간요법입니다.”
다프네는 최소한의 품위를 위하여 일단 변명을 해 보기는 했는데, 딱히 효과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 좋았다.
“제가 기억하는 서튼은 그보다는 훨씬 품위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만 해도…….”
다프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 보면 다프네가 아버지의 위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미안합니다.”
“네?”
그런데 느닷없이 돌아온 리디아의 사과에 다프네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존심 강한 리디아 슬로언이 제게 사과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리처드 서튼의 이야기는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다프네가 들고 있던 것이 아버지의 코트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알아봐 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가 가장 즐겨 입었던 옷이 아닙니까.”
“맞아요. 솔기가 조금 터져서 손질하고 있었는데…….”
“도와드릴까요.”
리디아가 선뜻 건넨 말에 놀란 것은 다프네뿐이 아니었다. 앨러스테어는 아예 다프네의 앞으로 다가와 소중한 코트를 빼앗듯이 가져가 버렸다.
“어머니께 바느질을 맡기면 안 돼!”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하며 고개를 기울일 때.
“앨러스테어!”
놀라울 정도로 얼굴이 붉어진 리디아가 제 아들을 나무라며 소리를 질렀다.
다프네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천하의 리디아 슬로언도 어설픈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귀족의 교양이라 불리는 바느질이 서툴다니.
“……귀여운 면이 있으시네요, 리디아 님.”
“가, 감히 서튼이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요!”
리디아는 여전히 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어째 다프네는 그녀가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아버지의 옷을 끝까지 수선할 수 있겠어요.”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디아는 여전히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에는 새해 키스를 주고받았다.
물론 다프네는 아버지의 옷을 지켜 준 앨러스테어와도 새해 축복을 나누었다.
“아, 맞다.”
무언가 떠오른 다프네는 그에게서 아버지의 옷을 받아 들며 한 가지 질문을 건넸다.
“커빙턴 아가씨에게도 새해 인사를 하셨나요?”
그러자 정말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앨러스테어가 새빨개진 얼굴로 잔뜩 화를 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새해 인사를 하긴 한 것 같았다.
화를 내면서도 입술 끝이 자꾸만 웃는 모양으로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 * *
저녁 시간에는 사용인 홀에서 즐거운 저녁 연회가 있었다. 다프네와 친한 하녀인 브리가 휴가로 자리를 비워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해 동안 함께 수고한 동료들과 함께 피아노를 치고, 어설픈 사교댄스를 추고, 카드놀이를 하고, 커다란 케이크를 나누어 먹어 치울 때는 너무나도 즐거웠다.
즐거운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새해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에는 모두가 동그랗게 얼싸안고 ‘와’ 하는 큰 소리를 질러 댔다.
목이 쉬도록, 열정적으로!
집사는 리암이 미리 허락했다는 좋은 술을 가져와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새해 파티가 원래 이렇게 즐거운 거야?’
신이 난 다프네는 새벽까지 웃고 떠드는 시간을 즐기고 나서야 겨우겨우 제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도 흥분한 마음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아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좋았어.’
모두와 키스와 포옹을 나누면서 따듯한 말을 나누는 순간에는, 미래에 대한 굉장한 기대와 희망이 점차 자라나는 기분이 들었다.
‘사무엘도 동료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그리고…… 공작님도.’
아니, 그는 어쩌면 혼자 책상 위에 앉아서 일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외롭지 않으실…… 아, 정말! 내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다프네는 쓸데없는 걱정을 털어 냈다.
어쨌든 그의 곁에는 아셔가 있고 충실한 지역 유지들이 있으니, 누구보다도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괜히 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