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7화
클롯모어 중앙역의 높은 유리 천장 아래로 강한 겨울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도톰한 겨울옷을 입은 승객들이 쉼 없이 제 목적지를 향해 바쁜 걸음을 내딛는 사이로 무척 눈에 띄는 ‘트렁크의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따금 이 많은 트렁크를 옮기는 은발의 여성을 흘끔거렸다.
외모가 꽤 눈에 띌 만큼 예쁘다는 것도 이 시선에 한몫했겠지만, 사람들은 무엇보다 그녀의 괴력에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승강장과 기차를 오가며 연신 짐을 옮기고 있었는데, 한 번에 3개에서 4개의 트렁크를 들어서 옮길 정도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프네 서튼.”
마침 일등석에 탄 젊은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승강장으로 빠져나왔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짐을 넣기 위해 애를 쓰던 다프네는 그가 이렇게 움직여 준 일에 조금은 감동했다.
분명히 그는 서튼과 슬로언의 우정을 떠올리고, 다프네를 도와주러 온 것이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짐을 다 옮기면, 잊지 말고 팝콘을 사 오도록 해.”
“……네?”
“팝콘 말이야. 말린 옥수수를 튀긴 스낵이지. 기차에서 먹으면 맛있어.”
“저도 팝콘이 뭔지는 압니다. 하지만 전 트렁크를 시간 내에 옮기느라 바쁜데요?”
리암은 다프네의 어깨 위로 손을 툭 얹었다.
“잘 알고 있군.”
그리고 그는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일등석 칸으로 돌아갔다.
“하, 기가 막혀서.”
다프네는 다시 트렁크를 집어 들고는 쿵쿵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우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런 썩은 무 같은 남자랑 그런 아름다운 감정을 쌓을까 보냐.
“저 성격으로 보아, 평생 친구도 없겠지.”
과거의 마법사 서튼과 그런 약속을 한 것도 분명히 슬로언의 성격이 대대로 형편없기 때문이리라. 어떻게든 후손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겠지.
다프네는 얼른 열일곱 개나 되는 트렁크를 운반하고, 역내 매점에서 팝콘도 구매했다.
이 순간에는 조금 우쭐할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제 어디에서 무엇을 사든 현금이 필요치 않다는 점이었다.
다프네는 코트 옷깃에 달아 놓은 슬로언 공작가의 배지를 당당하게 내보였다.
이건 공작과 정말로 가까운 사용인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어느 가게든 배지의 신용을 믿고 물건을 그냥 내준다.
물론 그 비용은 후에 공작저에 청구되어 아셔 마플이 인상을 쓰며 처리해 줄 것이다.
즉 이 배지 하나로 다프네는 리암의 재산을 축내면서도, 아셔의 노동력까지 사용하는 셈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복지가 아닌가!
다프네는 이 기회에 평소에는 해 보지 못했던 비장의 대사도 해 보기로 했다.
“팝콘! 트, 특대 사이즈로……!”
크으! 제일 큰 팝콘을 사다니 그야말로 사치의 정점이었다.
“1코퍼를 추가하면 핫도그도 함께 드립니다.”
“주세요!”
“핫도그에 치즈를 추가하시겠어요?”
“물론이죠! 더블로요!”
다프네는 팝콘과 탄산수 그리고 치즈 핫도그에 칩스 3종 세트까지 야무지게 구매하여 일등석으로 돌아왔다.
리암에게 서비스로 받은 작은 팝콘을 하나 건네준 후에 그녀가 탈 이등석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프네가 가득 들고 돌아온 간식을 유심히 바라보던 리암은 어째 선심을 쓰듯 제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여기에 앉아서 가. 편할 거야.”
“미쳤습니까?”
분명히 다프네의 음식을 탐내는 거겠지. 공작은 이제 스무 살이고, 그건 배고픈 트롤처럼 음식을 먹어치운다는 뜻이기도 했다.
“설마 내가 그대의 간식이 탐나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전 안 속습니다.”
다프네는 보란 듯이 치즈 핫도그를 커다랗게 베어 물었다.
저런 남자에게는 한 입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어린애 간식이나 빼앗아 먹는 사람으로 보였단 말이지?”
“결혼도 안 하신 분이 저한테 어린애라니!”
다프네는 기가 막혀서 소리쳤다.
하지만 리암은 곧 그녀의 말에 대단한 어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은 그대도 안 했잖아?”
그리고 악랄한 공작은 그 점을 곧바로 공격했다.
“그, 그렇지만! 전!”
“뭐야, 아직 어른도 되지 않았으면서 벌써 결혼을 논한 상대가 있었어?”
그가 물었고, 다프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결혼이라니, 그런 끔찍한 것을 두 번 할까 보냐. 지금도 자다가 전 남편 꿈을 꾸고는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날 정도인데.
“어쨌든 전 공작님이랑 같이 안 탑니다. 제자리로 갈…….”
다프네가 이등석으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찰나.
“기차가 출발합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역무원이 다프네를 저지하고는 친절하게도 문을 쿵 닫아 주었다.
“…….”
다프네는 거대한 팝콘 통을 끌어안은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오묘한 미소를 지은 리암이 제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는데, 그 눈빛은 분명히…….
먹이를 노리는 눈이었다.
* * *
리암은 제 나이를 증명하며, 다프네의 간식을 열심히 빼앗아 먹었다.
“그러고 보니, 아셔가 그대의 학력에 놀라던데.”
“아, 그거요.”
다프네는 칩스 다섯 개를 동시에 입에 밀어 넣은 후에야 대답을 이어 갔다.
치사한 아셔는 다프네가 공작저에서 쫓겨나지 않게 되자 ‘이제라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 오세요.’라며 그녀를 괴롭혔다.
다프네는 기꺼이 그에게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그녀의 최종 학력이 수도의 아카데미인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적지 않게 놀라는 눈치였다.
보통 부유한 귀족들은 교수를 초빙하거나 똑똑한 가신을 불러와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가진 게 작위뿐인 귀족들은 그리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왕실에서 운영하는 것이 수도의 아카데미였다.
물론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어서,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처음에는 귀족들만 치를 수 있었던 시험이지만, 나중에는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평민도 시험을 볼 수가 있었다.
입학시험에 필요한 자질을 익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거의 명목뿐인 규정이었지만 말이다.
“공부를 꽤 열심히 한 모양이지?”
“그건 전부 제 동생 덕분입니다.”
다프네는 우쭐거리며 답했다.
“제 동생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좋아했죠. 그리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제게 질문을 건네곤 했어요.”
그리고 그의 질문 난이도는 점점 상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 똑똑하지 않습니까? 학자들이 말하길 질문을 잘하는 아이는 천재라고 했습니다. 제 동생은 천재가 분명합니다.”
“게다가 잘생겼고.”
“바로 그거죠. 팝콘 좀 더 드시겠습니까?”
다프네는 선심 쓰듯 그에게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동생을 가르치다 보니, 아카데미까지 가게 된 건 알겠는데, 차석까지 하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사무엘이 다프네의 학습 진도에 맞추어 의문을 품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 그건…….”
다프네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곧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죠. 이 세상에는 귀찮은 인간이 어디에든 있는 법이니까요.”
“귀찮은 인간?”
“왜 자꾸 캐물으시죠? 제 사생활입니다.”
다프네는 그 귀찮은 인간이 바로 리암이라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간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리암은 더는 그녀의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 * *
아카데미에서 다프네가 열심히 공부하게 된 것에는 ‘사무엘’의 공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동생인 사무엘 서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공부하던 학생 중에는 벌써 2년째 졸업하지 못하는 열등생 ‘사무엘’이 있었다.
입학 초기에는 다프네도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진학한 것은 사랑하는 동생이 ‘누나라면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 말을 증명해 줘!’라며 두 눈을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사 졸업’만을 목표로 둔 그녀가 덜떨어지는 열등생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멍청한 사무엘이다!」
「야, 두꺼운 안경은 뭐 하러 쓰냐? 보이나 안 보이나 어차피 공부도 못하는 게.」
「아휴, 이 더벅머리 좀 봐. 허리는 구부정해서…… 사무엘은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
……신경 쓸 이유는 없는데, 신경이 쓰였다.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이 입을 모아서 ‘멍청한 사무엘’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그것이 그녀의 예쁜 동생을 향한 욕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를 들을 때마다 분노가 솟아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열등생 사무엘에 대한 학생들의 괴롭힘이 극에 달했던 어느 여름날.
분노를 참지 못했던 열네 살의 다프네는 결국 그의 기숙사로 쳐들어가고 말았다.
「사무엘 라모니아!」
그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자, 열등생 사무엘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안경을 끼워 썼다.
「다, 다프네 서튼?」
그는 특유의 더듬거리는 투로 그녀를 부르곤 잔뜩 몸을 웅크렸다.
아마 다른 아이들처럼 다프네까지 그를 괴롭히러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프네는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책상 위로 제 노트를 내려놓았다.
「너, 나랑 공부하자.」
「……응?」
「됐고, 공부해! 그리고 네 이름은 오늘부터 사무엘이 아니고 그냥 ‘엘’이야. 이름을 제대로 불리고 싶으면 최소 30등 안에…… 아니, 10등 안에 들도록 해!」
「어, 어?」
그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이름을 빼앗기고, 다프네와 공부까지 해야 했다.
다프네는 그가 어떤 질문을 해도 완벽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더욱 공부에 매진했고, 결국에는 아카데미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얻고 말았다.
졸업 후 엘은 주기적으로 다프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건 지난 생과 이번 생에서 달라지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다프네는 가끔 이 사실이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다.
‘대체 엘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매번 어떻게 알아내는 걸까?’
딱히 주소를 알려 주지 않아도 안부 편지를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고작해야 지방 귀족가의 아들인 그가 대단한 정보력을 가졌을 것 같지도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