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8화
깜빡 잠이 들었던 다프네는 뺨에 닿는 낯선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
그러자 곧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암 슬로언이 그녀의 뺨을 쥔 채로 가까운 곳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잘 잤어? 그런데 이런 미남을 향해 괴물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공작님은 미남이 아닙니다.”
다프네는 제 뺨을 쥔 그의 손을 ‘탁’ 쳐 내며 노려보았다.
“공작님, 혹시 지금.”
그녀가 무척 의심하는 투로 건넨 이야기에 그는 얼른 손을 휘저었다.
“그럴 리가! 설마 내가 자는 사람에게 키스나 할…….”
“어린애도 아니고, 자는 사람 얼굴에 낙서하시면 안 됩니다.”
“뭐?”
리암은 그녀의 오해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작님이 제 얼굴을 붙잡을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어린앤가?”
“스무 살은 아직 철이 없을 나이입니다.”
“하, 정말 기가 막혀서.”
이쯤 되니 리암은 도둑 키스를 노리는 치한으로 오해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모든 스무 살을 대표해서 말하는데, 당장 사과하도록 해.”
그는 조금 전까지 다프네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쫙 펼쳐 내밀었다.
“그대의 얼굴에 허옇게 낙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다프네 서튼 자신이야.”
“……네?”
다프네는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엔 번들거리는 것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분비해 내는 액체의 한 종류로 추측되었다.
그러니까 침 말이다.
“헉.”
다프네는 얼른 제 뺨을 손으로 쓸었다. 리암이 미처 닦지 못한 침이 뜨끈하게 묻어 있었다.
“나 참.”
리암은 일단 제 손을 손수건으로 닦은 후, 그걸 다프네에게 건네주었다.
“어서 닦아. 이 어린애 같으니.”
재빠르게 얼굴을 닦은 다프네는 손수건을 모아 쥔 채로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과는?”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공작님께요.”
“그리고?”
“전 세계의 스무 살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드립니다. 부디 침이나 흘리는 애송이를 용서해 주세요.”
“잘못을 인정한다니 다행이군.”
그는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디 가십니까?”
“어딜 가긴……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는 턱 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넓은 승강장 사이로 ‘중앙역’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였다.
그들이 탄 기차는 어느새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 * *
리암은 ‘그럼 수고해!’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승강장을 떠났다.
다프네는 혼자 남아서 다시 수많은 트렁크를 내려야 했다. 열일곱 개나 되는 짐을 옮기면서 다프네는 리암을 악동으로 오해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간식을 나누어 준 것을 빌미로 좀 도와 달라고 했을 텐데……!’
다프네는 끙 소리를 내며 짐칸에서 트렁크를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한 남성이 커다란 카트를 끌고 와 다프네의 곁으로 다가온 것은.
“이걸 쓰면 쉬울 거야, 다프네.”
“어, 고맙…….”
카트 위로 트렁크를 내려놓은 후에야 다프네는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높이 들었다.
“……?”
여전히 카트의 손잡이를 쥔 금발의 남자가 두꺼운 안경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왠지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누구…… 세요?”
“아……. 날 잊어버렸구나.”
상대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굴 때, 다프네는 그의 안경에 수많은 흠집이 나 있음을 알아차렸다.
“혹시…… 엘이야?”
조금 전 기차에서 떠올렸던 상대임에도 다프네는 상대가 정말로 ‘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엘은 빗지 않은 금발을 엉망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항상 몸을 깊숙이 수그린 채로 지내는 소심한 남자애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와 엘의 공통점이란 그저 시력이 걱정될 만큼 두꺼운 안경뿐이었다.
솜씨 좋은 미용사가 깔끔하게 잘라 낸 머리카락도, 다프네를 똑바로 바라보는 바다색 눈동자도 모두 낯설기만 했다.
게다가 조금 낡아 보이긴 해도 제법 좋은 정장까지 입고 있었다.
‘……하긴.’
다프네는 새삼 그가 귀족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비록 재산 하나 없는 가문의 아들이긴 하지만, 집 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좋은 옷 하나쯤은 있을 법했다.
“다행이다.”
그는 다프네의 손을 맞잡으며 방긋 미소 지었다.
“다프네가 나를 기억해서.”
“미안해,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해서.”
“아,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가 얼른 고개를 저을 때, 그들의 뒤에서 역장이 삑 호루라기를 불었다.
곧 열차가 움직일 것이라는 신호였다.
다프네는 아직 열차 짐칸에 쌓인 리암의 가방을 떠올랐다.
“아, 미안. 내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 서둘러야…….”
“도와줄게!”
“뭐?”
다프네가 도움을 허락한 적도 없는데, 그는 부리나케 짐칸으로 달려가 정확히 리암의 가방만을 집어 들었다.
다프네는 그를 만류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다가 열차가 출발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다프네는 가방을 들어 옮기며, 이따금 엘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엘…… 키도 큰 건가?’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고개를 바짝 들어서 올려다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긴, 엘은 나보다 두 살이나 연상이었지.’
다프네는 마지막 가방을 카트 위로 툭 올려놓고 엘을 빙글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엘과 만나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평범한 열일곱의 다프네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을 테지만, 현재의 그녀는 5년의 시간을 거슬러 왔다.
그러니까 그를 만나지 못한 시간은 지난 생의 기간까지 헤아려야 했다. 정말로 아득할 만큼 길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엘이 낯설게 느껴진 걸지도 몰라.’
다프네는 그리 생각하며 그에게서 느낀 이질감을 금방 털어 냈다.
“도와줘서 고마워, 엘. 덕분에 금방 끝났어.”
“아니야, 내가 도움이 되어서 기뻤어.”
“아, 여기에는 무슨 일로…….”
“응, 관심을 둔 사람이 온다고 해서 마중 나왔어.”
그가 카트를 밀며 대답했고, 다프네는 얼른 자신이 밀겠다며 그를 만류했다.
“내가 하게 해 줘, 난 다프네에게 받은 것이 많잖아.”
그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다프네가 카트 손잡이를 붙잡지 못하도록 방향을 바꾸어 섰다.
“이렇게 도울 수 있어서 기뻐.”
“하지만 이건 내 일인데…… 게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며?”
“응, 괜찮아, 괜찮아.”
그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다른 질문을 건넸다.
“다프네는 언제까지 수도에 있을 거야?”
“모르겠어. 주인님의 일정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
“주인님이라, 리암…… 아니, 공작님 말이지?”
“응,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그는 잠시 카트를 멈추었다. 마침 무거운 가방을 든 신사가 그 앞을 지나갔는데, 신사는 길을 비켜 준 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카데미에 졸업생의 취업 동향을 알아보는 부서가 있더라고.”
“아하.”
다프네는 이제야 그가 어떻게 매번 다프네가 있는 곳으로 편지를 보냈는지 알아차렸다.
지난 생에는 오린샤이어의 목장에 근무자로 이름이 등록되어 있으니, 이를 통해서 주소를 알았을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공작가에 ‘하인’으로서 등록이 되었을 테고.
“매번 편지를 보내 줘서 고마워.”
“뭘, 당연한 건데……. 그런데 다프네.”
“응?”
그렇게 대답할 즈음, 다프네는 역 정문 앞에 세워 놓은 공작가의 자동차를 발견했다.
먼저 가 버렸을 줄 알았던 리암은 어쩐 일로 팔짱을 끼운 채, 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래?”
다프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다시 제자리에 멈추어 선 엘이 그녀에게 청했다.
“저기, 수도에서 지내는 동안 바쁘지 않으면 나와…… 만나 줄래?”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다프네는 아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이 안 날 것 같아.”
“아…… 난 잠시라도 괜찮은데. 어떻게든 안 될까?”
“아니, 사실 일정이 좀.”
다프네는 곤란해하며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격 나쁜 리암 때문에 바쁠 텐데,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 갑자기 공작가로 떠나면서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수도의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야 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은사님들께도 갈 생각이었다.
그들은 저명한 사람들이니 어쩌면 왕이 리암의 공작 위를 승인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셔가 부탁한 피부를 반질반질하게 해 주는 기적의 비누도 찾아봐야 했다.
지난번 크림은 별로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발라도 그가 눈부신 미남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잠시라도 좋으니까, 제발. 응?”
엘은 이제 아예 두 손을 모아 간곡하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하긴…… 짐을 내리는 걸 도와줬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좀.’
다프네는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잠시만이다?”
“응! 시간이 될 때 여기로 심부름꾼 소년을 보내. 난 항상 다프네를 위해서 시간을 비워 두고 있을게! 통상적인 시간은 물론이고 아침이나 새벽도 괜찮아. 한밤중이라 해도 언제든 달려올게!”
그가 호들갑을 떨며 쪽지를 하나 쥐여 주었다.
“뭘 그렇게까지 해? 서로 안 맞으면 못 보는 거지.”
“그건 싫어, 난 다프네와 만나고 싶단 말이야.”
이쯤 되니 다프네는 그가 귀찮다고 생각한 것이 조금은 미안해졌다.
이렇게까지 그녀와의 우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니…….
“……알았어, 꼭 만나자.”
“응,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그는 이제 카트를 놓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샐쭉 짓는 미소가 엘답지 않게 상큼했다.
“연락해야 해?”
“알았어.”
“꼭이야?”
“알았다니까, 너 계속 귀찮게 굴래?”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도리질을 치고는 살짝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다프네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시 바라본 엘은 들뜬 발걸음으로 인파 사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잠깐 만나서 대화나 하자는 것이 저렇게까지 기쁠 일인가?
‘뭐…… 엘은 아마 나 외에 친구가 없을 테니까.’
다프네는 이제 직접 카트를 끌고 리암이 기다리는 정문 밖으로 나왔다.
“뭐?”
마침 리암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느 사내로부터 어떤 보고를 듣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몹시 불쾌한 모양이다.
다프네는 짐을 싣는 척하면서, 대체 무엇이 리암의 기분을 이토록 엉망으로 만드는지 엿들었다.
“당분간 알현이 금지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분노가 섞인 그의 질문에, 상대 남성은 정중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네, 전하께서는 업무 시간은 물론 아침이나 새벽, 한밤중까지도 알현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
리암이 시비조로 물었지만, 일개 심부름꾼이 주인의 의중까지는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죄송하다며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다프네는 가방을 넣으며 대체 이 나라의 왕은 얼마나 고고하신 분이길래, 지방에서 찾아온 신하도 제대로 만나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저 공작님을 기다리게 할 정도라니…… 분명 콧대가 하늘보다도 높이 있는 분이겠지.’
왠지 엄청 재수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뭐, 다프네는 평생 볼 일 없는 상대니까 그걸 검증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