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화 (11/152)

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1화

“그러니까, 나는…….”

“아이참, 어서 해 봐! 첫인상이 중요하다니까! 어서!”

다프네가 걱정스레 건넨 말에 소년은 적당히 그녀가 한 인사를 따라 했다.

제법 그럴듯해 보여서 만족스러웠는데…… 긴장이라도 했는지 아이의 표정이 무척 굳어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응, 잘하네. 하지만 아무리 무서워도 방긋방긋 웃는 거 잊지 말고. 웃는 얼굴은 무적이라고 하잖아?”

다프네는 마지막으로 소년을 향해 두 주먹을 내밀어 흔들었다.

“나 다프네 서튼이 널 응원할게!”

“……서튼?”

아이가 깜짝 놀라며 묻는 말에 그녀는 괜히 한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 서튼은 사용인을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이름이 드높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열 살짜리 아이도 알 정도라니.

“너무 놀라는 모습을 보니 부끄럽다, 얘. 그럼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다프네는 얼른 자전거 위에 올라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소년은 여전히 다프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저 소년은 서튼을 동경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프네는 괜히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 * *

다프네는 마을로 내려가 우선 우편국을 통해 사무엘에게 편지를 보냈다.

착한 동생은 오린샤이어에서 무척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줄곧 보내어 왔다.

‘그러고 보니…….’

다프네는 우편국에서 나오며 지난 생에 사무엘이 보냈던 편지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가문 회의에 속한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나를 환영해 주셨어. 슬로언 공작가에는 좋은 분들만 계신 모양이야.]

다프네는 똑똑한 사무엘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힌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아마…….’

이번 회의는 관습과는 달라진 서튼의 후계자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 다프네 서튼이라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열의를 갖고 이 일에 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의외로 간단히 찬성해 줄지도 모른다.

당장 리암과 아셔만 보아도 다프네의 존재를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우편국에서 한참 페달을 밟아 마을 미용 상점에 도착해 보니, 꽤 많은 사람이 ‘기적의 크림 대기’라는 문구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새벽부터 줄을 선다며 나갔음에도, 아셔의 순서는 다섯 번째.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에 저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만드는 크림이라니. 정말 효능이 기대되는 물건이었다.

“아셔, 안 추워요?”

“뭡니까, 왜 왔습니까?”

그는 단번에 눈을 세모나게 뜨고는 다프네를 경계했다. 설마 그를 이용해서 새치기하거나, 크림을 얻어가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요.”

다프네는 아셔는 물론 그의 뒤에 선 사람들을 향해서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크림을 살 돈도 없으니까요. 아셔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을 뿐이에요.”

이에 그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은 금세 사그라졌다. 새치기만 하지 않는다면 딱히 문제 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건 참 다행인데…….

문제는 아셔 역시 다프네에게 관심이 사그라졌다는 것이다.

“전 당신에게 할 말 없습니다. 가세요.”

그는 고개를 획 돌려서 빨갛게 된 손끝을 후후 불기만 했다.

“장갑도 안 끼고 나왔어요?”

다프네가 놀라며 물었다. 계절은 둘째 치고 점잖은 신사가 되어서 장갑을 끼지 않고 나오다니.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제가 당신인 줄 압니까?”

그가 대답을 회피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곧 뒤에 서 있던 노부인이 사정을 말해 주었다.

날씨가 춥다며 그가 노부인에게 가죽 장갑을 양보했다고.

“멋지네요, 아셔.”

“누, 누가 당신한테 그런 소리 듣자고 한 줄 압니까? 전 공작님의 수하로서 언제나 신사답게 행동할 의무가 있는 것뿐입니다!”

그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매장에서 직원이 나와 딸랑딸랑 종을 울렸다. 크림의 판매를 개시하겠다는 것이다.

아셔의 신경이 단번에 그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다프네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가 물건을 사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섯 번째 순서인 그는 다행히 바라던 물건을 품에 안고서 매장 밖으로 나왔다.

“잘 샀어요?”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다프네가 자전거를 끌며 친근하게 이야기를 걸어오자 그는 도망가듯 걸음을 서둘렀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산 거죠?”

“대체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합니까?!”

“공작님이요.”

“……후, 훌륭한 추론이지만 그건 아닙니다.”

다프네는 빙글 돌아서며,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불쑥 올려다보았다.

“그럼, 아버님을 뵙는 게 기대돼서?”

아셔 마플의 아버지인 ‘휴고 마플’은 서부 엠버혼의 지방관으로 이번 회의에 참석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번 회의에 오지 않으실 겁니다.”

시무룩하게 이야기하던 아셔는 얼른 안경을 고쳐 쓰고는 다프네를 삐죽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존재를 찬성하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 역시 공작님 쪽의 계승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인가요?”

“어, 어떻게 그런 말을! 대체 누가 또 그런 개소리를 합니까!”

“공작님이요.”

“이번에도 후, 훌륭한 추론이지만…… 아버지도 곧 공작님을 인정하게 되실 겁니다. 훌륭한 분이니까요.”

“그 훌륭한 분이 하신 말씀을 두고, 아셔는 두 번이나 개소리라고 한 거네요.”

“아니라고요!”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다프네는 놀리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작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아셔 마플이 공작님의 말씀을 개소리라며 힐난…….”

“악!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거나 빨리 물어봐요. 추워 죽겠으니까.”

새벽부터 겨울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거의 모든 관절이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다프네는 끌고 온 자전거에 앉아서, 뒷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타요. 저택까지 태워다 줄게요. 가면서 이야기해요.”

“추워 죽겠는데 자전거를 타라고요?”

“제 등에 기대면 따듯할 거예요.”

“미, 미쳤습니까?! 당신은 부끄러움도 없습니까?! 남들이 어떻게 볼지……!”

“그야 자전거를 끄는 사람과 얻어 타는 사람으로 보겠죠.”

아셔 마플은 잠시 고민했다. 저 발칙한 여자의 자전거에 타고 싶지는 않았지만, 몹시 지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안전 운행, 전방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살포시 엉덩이를 기대어 앉았다.

“무서우면 제 허리를 안아요.”

“그거야말로 개소리군요.”

그가 가볍게 비웃는 소리를 건넬 때, 다프네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짧은 흔들림에 놀란 아셔는 잠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중심을 잡은 자전거는 정비된 마을 길을 안정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셔는 여전히 얼어붙을 것 같은 몸이 불편했지만, 제 발로 걷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자 여기까지 자전거를 끌고 와 준 다프네가 조금은 고맙게 생각되었다.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선뜻 그녀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아니 그게, 헉.”

하지만 다프네는 제 몸보다 훨씬 큰 남자를 끌고 가는 것이 힘든 탓인지 벌써 숨을 헉헉대고 있었다. 도무지 질문할 상황이 되지 않는 듯했다.

아셔는 왠지 쌤통이라는 생각에 히죽 웃음이 흘렀다.

낑낑거리던 다프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가문 회의를…… 허억.”

“그럴 줄 알았습니다. 공작님이 당신 남동생을 찾지 않으니, 원로들이 달려오는 것도 당연하겠죠.”

“그래서 가장, 끄윽! 힘 있는 사람을!”

“공작님과 가장 가까운 핏줄이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오신 거군요.”

“으윽!”

“하긴 그분과 공작님이 한뜻으로 당신을 지지한다면, 다른 이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밀어붙일 수는 있을 겁니다.”

아셔는 낑낑거리는 다프네를 흘긋 돌아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책임지겠다며 애를 쓰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고집을 쓰고,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당신이 공작님을 어떻게 꼬드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남동생을 부르세요.”

“절대, 싫어요!”

그리 답한 후에는 자전거에 조금 더 속도가 붙었다.

“이 고집불통 같으니!”

아셔는 작게 혀를 찼다.

“당신의 그런 모습이 그분께는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을 겁니다.”

그는 몇 번인가 만난 적 있었던 가문 회의의 수장을 떠올렸다.

“교양이 깊은 분입니다. 감히 공작님께 버금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학문이면 학문, 예술이면 예술. 모든 분야의 재능을 타고 나셨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이런 설명을 하고 있자니, 아셔는 왠지 제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슬로언 가문의 핏줄은 대단했다. 이런 위대한 분들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그의 큰 행복이었다.

이쯤 되면 다프네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깨닫지 않았을까?

“왠지 엄청 잘난 척할 것 같은 분이네요.”

“…….”

그 어이없는 반응에 아셔는 기가 막혀서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끄응.”

한참 나아가던 자전거의 속도가 조금 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 좌우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힘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문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저택에 도착하기나 하겠습니까?”

“가고 있어요! 하윽!”

“진짜 못해 먹겠네. 당장 멈춰요.”

얄미운 상대이긴 해도, 가느다란 아가씨가 그를 짊어지고 가겠다며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째 신사로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프네가 두 다리를 딛고 서자, 아셔도 뒷자리에서 내렸다.

“비켜봐요.”

혹시 다프네가 끝까지 데려다주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곧 언덕이라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언덕이 있는데 날 앉혀서 올라가려고 했어요?”

“가벼우니까 가능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몸집이 크네요.”

“나 참.”

그는 다프네가 뒷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