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동생은 안 됩니다, 공작님 10화
“일단은 고마워하려고 해, 그대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방에 제법 적응했지.”
“다행입니다.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열리지 않는 서랍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열쇠를 잃어버리신 모양이야.”
“업자를 부를까요?”
다프네가 묻자,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뭐, 아버지의 비밀이라면 지켜드릴 생각이야.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신사의 비밀은 지켜드려야지.”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그대라면 동의할 줄 알았어.”
리암은 책상을 빙 돌아 다프네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역시 마음에 들어.”
“아…… 예, 저도 제가 마음에 듭니다.”
“오늘 보니 꽤 도움도 되는 것 같고, 무엇보다 내가 아버지의 상실을 받아들이는데, 그대가 필요해.”
“그건 제 전문 분야죠.”
“그렇지.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우리의 깊은 유대를 이해하지 못해.”
“똥 멍청이들!”
“그래, 똥 멍청이 같은 슬로언의 원로들은 맹약에 무척 진심이고.”
“그, 그런 훌륭하신 분들의 이야기는 왜…….”
리암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원로들의 대표가 보낸 것으로, 하루빨리 서튼의 ‘아들’을 데려와 가문의 맹약을 맺으라고 재촉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맞이하겠다는 답을 했었지.”
“역시 공작님! 모든 지배자의 거울!”
다프네가 두 손을 딸랑거리며 마음에도 없는 찬양을 하는 모습에, 리암은 씩 미소를 짓고는 오늘 도착한 또 다른 편지를 내어 보였다.
[가문 회의에 소속된 일동이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그 짧은 문장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들의 힘을 총동원해서라도 다프네를 저택에서 끌어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서튼 가문이 공작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으로 제법 인정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용인 사이의 일이었다.
진짜 귀족의 피가 섞인 이들에게 서튼은 그저 미천한 일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힘을 모아서 다프네를 저택 밖으로 끌고 가려 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저,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프네는 유일한 믿을 곳인 리암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저들에게 절 수행원 삼으시겠다고 강하게 명령해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나도 그렇게 간단히 해결하고 싶지만…….”
그는 편지를 책상 위로 돌려놓은 채로 팔짱을 꼈다.
“나도 아직 정식으로 작위를 승계받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형편이야.”
“네? 하, 하지만 공작님이 공작님이 아니라면 대체…….”
“공작이긴 해. 다만 왕께서 승계 인가를 내려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러모로 힘이 부족할 뿐이지.”
“그러니까 이른바…….”
“미허가 공작, 이라고 해야 하나. 가신 중에도 아직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휴고 마플이라든가. 뭐, 어쨌든 그래.”
그는 손가락 끝을 들어 빙글빙글 돌리며 설명했다.
다프네는 꽤 충격을 받았다.
그간 리암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쓴 순간들이 모두 허사로 느껴진 것이다. 왠지 저 야살스러운 남자에게 속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내 멱살을 쥐고 싶다는 얼굴이 되었군.”
그 말 그대로였다.
왜 자격도 없는 사람이 다프네를 시험한다며 쓸데없이 기운을 빼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의 나라도 가문 회의에서는 목소리가 큰 편이니까, 제법 도움은 될 거야.”
“역시 제 주인님!”
“하지만 나 혼자만의 주장으로는 힘을 얻기 어렵지.”
“다른 분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뜻이지요?”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그래야 나의 귀여운 간신배지.”
리암은 씩씩하게 대답하는 다프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들부들한 은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드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음, 일단.”
그는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공작 가문의 회의에서 발언권은 일정한 기준으로 그 무게가 달라져.”
“기준이 있군요.”
“그래, ‘공작’을 기준으로 삼아서, 가장 가까운 ‘피’를 지닐수록 그 의견에는 힘이 실리지.”
그러니 다프네가 공략해야 할 상대는 단 한 명. 그와 가장 가까운 혈연인 회의 참가자.
“나와 함께 가장 강력한 인물이 그대를 지지하기만 하면…… 다프네 서튼?”
“네, 네?”
그녀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듯 이리저리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자 리암은 손을 내려 그녀의 한쪽 뺨을 쥐었다.
“지금 근사한 미남을 눈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로운 건가?”
“아뇨, 절대 미남은 아니시고요. 아니, 그게…….”
다프네는 자신이 무엇을 부정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황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연스레 그의 손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가, 가장…… 가까운 핏줄이라면? 어느…….”
그녀가 난데없이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하기 때문인지, 리암은 뜸을 들이지 않고 얼른 답을 들려주었다.
“나머지는 아셔 마플이 설명해 줄 거야. 가 봐.”
아니었다.
그는 뾰로통한 얼굴로 다시 제 집무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빨리 알려 주세요.”
“아셔의 설명을 잘 듣고 ‘그’의 지지를 얻을 방법을 잘 고민해 보도록 해. 까다로운 인물이니까.”
“아셔는 지금 마을에 피부를 반질반질하게 해 주는 기적의 크림을 사러 갔다고요! 그냥 알려 주세요!”
“바르기만 하면 예쁜 남자가 된다는 발칙한 광고의 크림 말인가. 그가 외모에 신경을 쓰다니……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겼나?”
“그런 건 되었으니 알려 주세요!”
다프네가 다시 요청했지만,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모자만 만지작거릴 뿐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프네는 이 부조리함을 참을 수 없었다. 발바닥을 핥을 기세로 간신배 짓을 했으면, 주인도 뭔가 돌려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나.
“아, 회의는 내일이야. 안건이 안건인 만큼 다들 열심히 달려온다더군.”
그는 ‘그럼 수고해’라는 말을 남기고 한쪽 손을 살살 휘저었다.
다프네는 그를 잔뜩 노려보다가, 곧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복도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그녀는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아니야.”
불안으로 요동치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킨 후에는 이성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었다.
실제로 리암과 가장 가까운 핏줄은 그의 형님이었다.
하지만 지난 생에 알게 된 정보에 의하면, 그는 가문의 일에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이제는 가문이 아니라 ‘왕’에게 속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런 유서 깊은 가문에서 회의를 한다면 보통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이기 마련이었다.
다프네는 희망이 샘솟았다.
‘노년층의 지지를 받는 것은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야.’
지난 생에서 그녀는 오린샤이어에서 지냈다.
그곳은 청년들이 대거 대도시로 떠난 탓에 인구분포가 극단적인 노인 밀집형이 된 시골로, 다프네는 동네 어르신들의 애정을 독차지해 왔다.
그 증거로 그들은 항상 다프네를 찾곤 했다. 울타리가 망가졌다거나,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거나, 양털을 깎아야 할 때도!
다프네가 결혼하여 떠나지만 않았어도, 오린샤이어 마을 협회에서 제법 그럴싸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빨리 시내로 가서 아셔 마플을 만나고 어떤 분인지 물어보자.’
다프네는 얼른 외투와 모자를 챙겨, 저택 뒷문으로 나왔다. 정원사 아저씨의 양해를 구하여 자전거까지 빌린 후에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 문득, 저택 정문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작은 소년을 발견했다.
“누구지?”
사무엘과 비슷한 나이일까? 소년은 먼 곳에서 온 듯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다프네는 남동생을 사랑하는 누나로서, 저렇게 귀여운 남자아이를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방향을 바꾸어 소년의 앞으로 다가갔다.
“구인 광고를 보고 왔니?”
다프네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소년이 든 신문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조금 전에 리암이 말한 바와 같이, 이 거대한 저택에는 하인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벌써 일을 하려고 하다니 착하기도 하지.”
다프네는 소년이 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 새카만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너무 귀여웠다.
“아니, 난…….”
“참고로 네가 가려고 하는 저쪽 문은 가문에 속한 높은 분들이 다니는 곳이야. 한마디로 거들먹거리는 재수 없는 사람들만 쓰는 문이라는 뜻이지.”
다프네는 아이가 정문으로 가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농담 섞인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소년의 표정이 잠시 좋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 다프네가 제대로 된 조언을 해 주지 않았다면, 정문을 두드리는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좀 급하긴 한데, 널 뒷문까지 데려다줄게.”
다프네는 소년의 가방을 대신 들고는 자전거의 짐칸에 툭 올려놓았다. 그 후에는 자전거를 끌고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빙 둘러 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다급한 걸음으로 다프네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아니, 저기!”
“에이, 고맙다고 안 해도 돼. 꼭 내 남동생이 생각나서 그런 거니까. 이제 다 왔다.”
다프네는 가방을 다시 소년에게 내밀었다.
“어서 들어가 봐. 다들 친절하게 대해 주실…… 아, 예의 바르게 인사할 줄은 아니? 이렇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는 거야.”
그녀는 아이가 다른 사용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기를 바라며 얼른 멋지게 인사하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아이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다프네를 바라보았는데, 아마 지금까지 이런 인사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