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도망갈 곳이 없었다
처음엔 주환이 하는 말인 줄 알았고, 그다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자신의 머릿속에만 울리는 환청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했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비집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속삭임이 어쩌면 자신이 잃어버린 10년 전 이병 때의 기억이지 않을까.
내가 정말 책 속에 빙의한 것이 아니라면 17살의 평범한 고등학생인 자신과 19살의 군인 이나리가 같은 사람이고, 그 2년간의 공백 속에서 에스퍼로 발현해 입대한 거라면…….
이쪽과 저쪽, 뻥 뚫린 공백이 어렴풋하게 채워지면서 소름이 오스스 돋아 올랐다.
내가 대체 무엇을 했길래 최강이 내게 좋아한다고 말해 보라고 하는 거야?
나리는 헉 숨을 들이켜고 마구 발버둥을 쳤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부정해 보아도 주환의 손길과 가이딩을 따라 얼기설기 엉킨 틈새가 벌어지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나랑 같이 죽겠다고 했잖아? 그 말 물리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내가 언제!
〈생도님이 아니지. 이제는 최강 대위님이지. 함부로 까불지 마라. 이나리 이병.〉
“하, 하아? 뭐? 자, 잠깐만…….”
대체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대체 그 싸가지한테 내가 뭘 했길래 그토록 사람을 굴리고 갈군 거냐고!
“바, 박 소령님, 그만…… 그만하세요. 제발, 하아…….”
온몸이 간지럽고 심장이 마구 뛰는 것보다도 귓가에 울리는 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부터 내장까지 뒤집어 놓았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서 정신이 아득한 어둠 속으로 꺼질 것만 같은데,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잃어버린 과거의 파편이 반짝반짝 일렁였다.
손만 뻗을 수만 있다면.
저 틈새를 열어젖힐 수만 있다면……!
나리가 손을 뻗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스트랩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그녀를 옭아맸다.
“하아, 하아! 하! 으으!”
주환은 과호흡을 일으킬 듯이 숨을 몰아쉬는 나리를 올려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나리의 입술 위에 붉은 핏방울이 립스틱처럼 번져 있었다.
“그만……. 말 좀…… 해 줘요……. 이런 식으로 가이딩, 받기, 흐으, 하아, 싫다고…… 했는데, 왜…….”
주환은 애원하는 나리의 안대를 벗겨 올렸다. 눈물에 발갛게 부은 흐리멍덩한 나리의 눈동자 위에 무뚝뚝한 주환의 얼굴이 비쳤다.
“하아, 하. 흐읍…….”
나리는 거친 숨을 고르며 눈을 끔벅거렸다. 알 수 없는 힘에 심연으로 침전하는 중에 검은 수면 위로 보이던 과거의 파편이 사라지고 주환이 보였다.
주환은 나리 위에 자기 몸을 겹치고 그녀의 입가에 번진 핏물을 핥았다. 드디어 방해할 사람도 없고 쫓길 시간도 없이 둘만 남았다.
오랫동안 굳어진 나리의 파장이 주환의 가이딩에 녹아 허물어지는 이 순간에도 나리는 주환을 쳐다보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했다.
“풀어, 주세요…….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잖습니까?”
“…….”
“아, 이렇게 사람 묶고 하시는 게 취향……이신가요? 전 이런 건 좀…….”
“후으…….”
주환은 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들어 상체를 일으켰다.
주환이 나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하얀 해군 정복을 입고 있었다. 단추를 풀어 헤친 틈 사이로 탄탄한 구릿빛 굴곡이 훤히 드러났다.
주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리를 내려다보며 번들번들하게 젖은 입술을 쓸어 냈다.
“제 말이 끝나기 전까지 못 풀어 드립니다. 신체 강화 어빌리티로 순식간에 잠수함을 손상시켜 모두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나리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였다. 오감 신경을 너무 예민하게 세웠나? 눈에 너무 자극적인 장면에 나리는 뇌가 얼어 버린 것만 같았다.
저, 정신 차려, 이나리!
나리는 질끈 눈을 감고 입술을 말아 물며 혀로 입술에 난 상처를 훑었다. 비린 피 맛만 생각하려고 했다.
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앞으로 내가 말할 것은 1급 군사 기밀이며, 외부로 이 정보가 새어 나갈 시 군법으로 처리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이 중사와 저를 감시하고 있다고만 알아 두십시오.”
가, 감시?
“아, 아니, 이렇게 묶어 두고 여기저기 다 키스한 걸 누가 보고 있었다고요?”
나리는 대경실색했다.
주환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워치를 들어 보여 주었다.
“몰랐습니까? 군부대 곳곳에 있는 CCTV와 군인들의 워치에 있는 센서는 가이딩을 거짓 기록할 수 없게끔 만들어졌습니다. 의무실에도 달린 CCTV가 여기라고 없겠습니까?”
나리는 주환의 말에 입을 뻐끔거렸다.
“여긴 알파 81부대가 아닙니다. 이 중사, 말과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무슨 포로라도 된 기분이네요. 잡혀서 갇히고 묶이고 멋대로 옮겨지고 감시까지.”
주환은 나리의 가시 돋은 불평에도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최강 대령을 막으려면 이 중사님부터 멀리 떨어트리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예? 그분 또 무슨 사고 치셨습니까? 근데 저랑 무슨 상관이길래 제가 서해 해저에 잡혀 있어야 합니까?”
“…….”
차마 최강이 널 좋아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환은 위에서 지시한 그대로 말했다.
“명령 불복종, 동시에 여론 조작, 쿠데타 계획, 군 상부 최고 등급 기밀에 손을 댔다는 것까지 밝혀져 국민과 대통령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상황입니다. 엊그제 알파 81 특수 연대장을 사로잡아 군 재판에 세우라는 임무가 하달되었습니다.”
“허…….”
뭐, 뭐라고?
“이나리 중사의 A급 쉴드 어빌리티는 처음부터 해군에서 쓰려던 것이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여 최고 수령부의 경호를 담당하려고 저와 매칭되었습니다.”
나리는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그럴 리가…….
“이 중사의 의사와 상관없이 해야 하는 임무입니다. 거부 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졌습니다.”
“저, 저를요?”
“전부 다.”
“전부 다? 저랑 최강 대령님이랑 또 누구를……?”
“최강 대령, 유일한 소령을 비롯한 반역 행위에 동조한 모든 장교와 병사를 말입니다.”
“…….”
미친 거 아냐?
자신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최강과 이능력자 특수 연대를 배신하고 버릴 리 없잖아!
혼란스러운 와중에 황에덴에게 이용만 당하고 죽은 에스퍼들, EMP 공격과 몬스터들로 쑥대밭이 된 부대가 머리에 스쳤다.
욱하고 욕이 치밀어 올랐다.
“이 중사와 제가 탄 잠수함의 목적지는 괌 해군 기지에 있는 연구소입니다. 그곳에서 전보다 정밀하고 정확한 매칭 테스트를 받게 될 거고 태평양권 이능력자 동맹 조약에 따라 동맹국의 S급 이능력자들과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최강 대령님을 막으려고 다른 나라의 에스퍼들을 부른다고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강 대령의 능력이 순간 이동인 점을 생각했을 때, C15 균열을 닫는 황혼 작전 이후 그가 도망치거나 쿠데타를 일으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죠.”
주환은 험악하게 굳은 나리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일한 소령과 최강 대령, 황에덴 생도가 황혼 작전을 무사히 잘 완수하는 동안 이 중사도 이 중사의 임무를 잘 수행하기만 하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나리는 소름 돋는 위화감을 느꼈다.
상부의 명령대로 무사히 진행될 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일 뿐이다, 라면서 둘러대도, 결국에 황혼의 영웅은 재판장에 서서 불명예스럽게 죽거나 명예롭게 전장에서 죽게 될 거라고 선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 알겠습니다…….”
나리는 참담함을 삼키고 대답했다.
그저 강의 곁을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한 때가 있었던 거 같은데, 막상 그의 곁을 떠나 반대편에 서서 맞서게 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에덴과 일한의 옆에 서 있던 최강도 나리와 똑같은 명령을 받아 원치도 않던 단상 위에서 언론의 카메라 세례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럼, 전체적인 임무를 숙지하신 줄 알고 이제부터 스트랩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주환은 나리의 스트랩을 하나둘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나리는 가만히 좁은 잠수함의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유일한 소령님, 괜찮아질 거라면서요? 이게 괜찮아질 상황인가요? 항상 전역하겠다고 투덜댔을 때마다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려 주셨으면서, 왜…… 이번에는 막아 주시지 않았나요? 왜 제가 여기까지 끌려오게 놔두셨어요!
“……괜찮습니까?”
주환이 나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나리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천장을 향해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며 번쩍 눈을 떴다.
천장의 무늬, 이음새, 자그마한 어둠 하나하나를 살피며 어디에 감시자의 눈이 있을지 찾기 시작했다.
주환이 나리를 보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더니 침대 밑으로 내려와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유일한 소령이 맨 처음 내게 당부한 게 뭔지 아십니까?”
“…….”
“이 중사의 괜찮다는 말을 믿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제가 안 괜찮으면 뭐 상황이 나아지나요? 군인이 하는 일이 위에서 하라는 대로 까는 거지, 뭐…….”
나리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주환을 쏘아보았다. 주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턱을 괴었다.
“전, 진심으로, 괜찮습니다.”
나리는 엉성하게 걸쳐진 환자복을 훌렁 벗더니 구깃구깃 둥글게 말아 주환을 향해 냅다 던졌다. 멍하니 나리를 보고 있던 주환은 얼굴을 찌푸리며 제 얼굴을 맞힌 환자복을 걷어 냈다.
“박주환 소령님.”
속옷만 걸친 나리가 험악하게 주환을 쏘아보고 있었다.
“최강 대령님이 제게 처음으로 당부하신 말이 뭔지 아십니까?”
잠수함이 더 깊은 곳으로 하강했나. 나리의 파장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압박감이 주환의 온몸에 휘감겼다.
“……뭡니까?”
나리는 맘 같아서는 ‘우리 연대장님이 가이드 새끼들 믿지 말라고 하더라.’ 하며 가운뎃손가락을 세우고 욕이나 실컷 해 주고 싶었지만, 미친 척 왈왈 대들어도 저랑 같이 화를 내고 소리 지를 사람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뭘 해도 총구를 겨눌 사람뿐이라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해 봤자 별로 좋을 게 없을 거 같습니다……. 제 군복은 어디 있습니까?”
나리가 다리를 꼬면서 카메라를 향해 이죽거렸다.
“아니면, 아까 하려다 만 거나 계속할까요? 감시자분들이 꽤 기대하셨을 텐데 그만두셔서 말입니다.”
“……됐습니다.”
주환은 자신의 상의를 벗어 나리의 맨어깨를 감싸 주었다.
“가서 식사와 입을 옷 가져오겠습니다.”